# 138. 폐허 (2)
사방이 콘크리트로 막힌 회색 밀실.
“근데 우리에겐 문제가 있습니다.”
한수호는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우리만으로 힘이 부족한 거 아니냐고?”
두꺼비 요원이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물었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 실력으론 블랙과 혜성 선배님의 배후 조직을 상대하는 게 무리입니다. 인원도 부족하고 말입니다.”
한수호는 입구 쪽을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일단 국장의 비밀 요원들은 전투 요원이라기보다 보조 요원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두꺼비 요원이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막내와 한수호, 장진우 셋이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해야 했다.
“장 팀장님의 몸도 좋지 않고요.”
막내도 앉아 있는 장진우를 힐끔거리며 무거운 표정으로 거들었다.
장진우는 63스퀘어에서 회색 마스터의 분신에게 크게 당한 상태였다. 외상은 치료했지만, 내상은 아직 남아 있었다. 특히 당시 단전을 다친 탓에 스킬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있잖아. 내가 퀵으로 보낸 버프 아이템 받았지?”
두꺼비는 히죽 웃었다.
“퀵이요? 그거 연구원님이 보낸 거예요?”
막내는 한수호와 광화문에 진입하기 전을 떠올렸다.
일대는 버려진 차들로 주자창이 돼 있었다. 둘은 차를 버리고 광화문까지 미친 듯이 달려갔다. 검은색 오토바이를 탄 요원을 만난 건 그때. 그는 누군가의 심부름이라면서 알약을 줬다. 막내와 한수호의 코드번호, 암호명, 패스워드를 정확히 읊으며.
‘NSA의 요원인가? 혹시 국장님이나 장 팀장님이 보낸 건가?’
막내는 알약을 받아들고 머뭇거리다가 복용했다. 그다음은 익히 아는 대로. 둘은 효율 100%가 넘는 버프를 받아 유수혁과 한동안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다.
“그럼 나 말고 누가 그런 걸 만들겠어? 너희가 광화문으로 올 걸 예측했거든.”
두꺼비는 자랑하듯 가슴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정부 연구기관의 단점이 뭔지 알아? 인권이다, 윤리다, 법이다. 이것저것 제약이 많다는 거야. 이번만 해도 그래. 일본 놈들이 천공의 검과 리제너레이션으로 솜씨를 뽐냈는데, 우리도 놈들 못지않게 숨겨놓은 비장의 무기가 많거든. 언론의 극성 때문에 만들고도 공개를 못 했을 뿐이지.”
두꺼비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낯선 요원이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왔다.
“이게 다 뭡니까?”
“뭐긴? 다 내 예쁜 아기들이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놈들이 몬스터의 힘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힘을 강화했다면, 우리도 우리 나름의 방법으로 업그레이드한다.”
두꺼비는 킥킥거리며 캐리어를 열었다.
막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캐리어를 바라봤다. 한수호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두꺼비의 어깨 너머, 캐리어에서 밝은 빛이 뿜어졌다.
“계속 블랙과 혜성 씨의 배후 조직에게 휘둘리기만 했지만, 이젠 우리가 반격할 차례야.”
옆에 있던 장진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
일본 L 호텔 VIP 룸.
- 영웅이 돌아왔다.
“제길. 완전히 놈만 좋은 일을 시켜줬군.”
흰 마스터는 석간신문을 신경질적으로 구겨 던졌다.
신문마다 일면은 온통 한국의 이혜성 기사로 도배돼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일, 한 양국의 공조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공식 브리핑과 함께였다. 물론 혜성이 돌아온 데에는 일본의 첨단 아이템이 필수였다는 자화자찬도 곁들여져 있었다.
TV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혜성의 사건을 속보로 내보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 남아 있는 부하로 혜성을 공격한 건 좋았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유수혁을 우연히 끌어들여 덮어씌운 것도 좋았다. 문제는 뜬금없는 일본 정보국의 개입. 그들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렇다고 혜성을 다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사건 이후 혜성의 곁에는 경호원들과 기자들이 바글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솔직히 나도 내각정보조사실이 나설 줄은 몰랐으니까. 기타무라 놈.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발악을 하는군.”
흰 마스터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화를 억눌렀다.
“유수혁은 어떻게 됐지?”
“NSA에게 생포돼 비밀 감옥으로 이송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당한 것 때문인지 이번엔 유수혁의 신변을 극비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NSA의 특별경호팀이 붙은 것 같습니다.”
“놈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한국에 남아 있는 자네 아이에게 연락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놈을 제거하라고. 이번엔 절대 실수하면 안 될 거야. 정계 반응은 어때?”
흰 마스터는 심호흡한 뒤, 질문을 계속했다.
“크게 둘로 나뉩니다.”
검은 마스터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첫 번째는 굳이 우리의 자산을 투입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와줄 필요가 있느냐는 쪽이었다. 블랙에 호의적이었던 자들. 구체적으론 블랙에게 정기적으로 막대한 돈을 받은 자들의 반응이었다.
반면 일부에서는 대환영이라는 논평을 내고 있었다. 게이트 시대에는 국경이 무의미. 과거를 잊고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암암리에 세력을 키운 블랙에 대한 견제심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자넨 일단 내부 단속에 주력해. 기타무라의 손발을 자르는 건 내가 맡지. 그리고 한국의 지하 마켓 쪽에도 연락해. 놈들도 이혜성과 그 동료에게 원한이 많을 테니까.”
흰 마스터는 목소리를 낮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혜성은 곧 일본에 진출할 거야. 밤안개와 일본 내 우리의 적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을 개시할 테고. 하지만 여긴 우리의 본진. 녀석에게 밀릴 수 없다.”
흰 마스터는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 놈은 뭘 하고 있지?”
“놈은……”
검은 마스터는 그를 따라 일어나며 갓 들어온 혜성의 소식을 보고했다.
***
종로 3가 I 빌딩 2층.
사무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가운데, 긴 복도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십여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와 귀에 찬 핸즈프리로 상징되는 혜성의 경호원들이었다.
“이혜성은 지금 뭐 해?”
경호 책임자가 입구 쪽에서 다가와 물었다. 상부에 혜성의 동향을 보고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안에서 공익광고 촬영이 한창입니다.”
경호원은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스튜디오를 곁눈질로 가리켰다. SJ 스튜디오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광고 촬영이라고? 무슨 광고인데?”
경호 책임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터뷰, 행사, 브리핑 등 혜성은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광고 촬영이라니. 짜증이 나는 게 당연했다.
“무슨 시민 단체가 주관하는 것 같은데요. 해외 결식아동 돕기라나?”
“뭐? 결식아동? 지금 제정신이야?”
경호 책임자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비웃음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전부터 일정이 잡힌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시잖습니까? 시민 단체는 말이 많은 거. 바쁘다고 스케줄을 미루면, 이혜성이 아니라 우리가 집중포화를 맞을 겁니다. 바로 신상도 털리고요.”
경호원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명하다고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유명세 때문에 행동의 제약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환장하겠군. 아무튼 감시 철저히 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 지난번엔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감사 쪽에서 신경 많이 쓰는 거 알지?”
책임자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다가 도로 넣었다. 빌어먹을 건물 내 금연.
“염려 마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빌딩 안팎에 우리 애들이 쫙 깔렸습니다.”
경호원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나저나 언제 들어갔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들어간 지 한 두어 시간 됐을 겁니다. TV 광고라 이것저것 할 게 많은가 본데요?”
경호원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막내에게 슬쩍 눈짓했다.
“제가 한번 보고 오겠습니다.”
눈치 빠른 막내 경호원은 빙그레 웃으며 스튜디오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드는구먼. 이 나이에 보모처럼 경호원이라니. 빨리 때려치우고 민간 길드로 옮기든가 해야지.”
다시 경호 책임자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쾅, 스튜디오에 들어갔던 막내 경호원이 문을 박차고 복도로 나왔다.
“뭐야?”
다른 경호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녀석을 주목했다.
녀석은 뭔가에 크게 놀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만 뻥긋거릴 뿐.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씨발, 이혜성!”
책임자는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다른 경호원들도 굳은 표정으로 우르르 따라갔다.
높은 천장, 화려한 인테리어, 수십 대의 고가 카메라와 조명판이 제일 먼저 보였다. 문제는 스튜디오 바닥. 스태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어떤 놈이야?”
누군가가 급히 쓰러진 스태프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이혜성은?”
책임자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쳤다.
스태프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혜성. 놈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로 나간 것 같습니다.”
다른 경호원이 우측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건물 뒤쪽으로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젠장!”
책임자는 재차 욕을 퍼부으며 창가로 달려갔다.
건물 뒤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 둘이 마찬가지로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스튜디오는 이 층에 있었다. 굳이 능력이 없더라도 훈련받은 요원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높이였다.
“어쩌죠?”
복도에서 얘기했던 경호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보고만 있을 거야? 당장 이혜성 잡아 와!”
책임자는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발악하듯 외쳤다.
“아, 알겠습니다.”
경호원은 경례도 잊고 밖으로 우르르 흩어졌다.
“씨발, 이혜성.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책임자는 쓰러진 경호원들을 내려다보며 부득 이를 갈았다.
***
“……당장 이혜성 잡아 와!”
멀리서 경호 책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 다녀와서 술이라도 한잔 사야겠는데?”
야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혜성. 지금 그가 있는 곳은 I 빌딩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대로변이었다.
“안 타실 거예요?”
택시 기사가 조수석 쪽 창문을 내리고 재촉했다. 다른 이의 소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갑시다.”
혜성은 히죽 웃으며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인사동이요. 안국역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 기사는 미터기를 켜고 가속 페달을 천천히 밟았다.
잠시 후, 택시는 다른 차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얼마 전에 혜성의 활약으로 엉망이 된 곳, 지하 마켓이 있던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