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37화 (137/150)

# 137. 폐허 (1)

SJ 기획, 소회의실.

“외국 정보국 놈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건 이해하겠어. 그런데 현장에서 막내와 한수호를 데려간 자들이 있다고?”

박무영은 광화문의 사진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모르는 요원들이 막내와 한수호를 연행하듯 데려가는 사진이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한진영의 사진도 있었다.

솔직히 이건 예상외였다. 물론 그들이 블랙을 잡는 데 핵심은 이혜성이었다. 하지만 막내와 한수호 등도 조력자로서 가치가 있었다.

“네. 현장에서 국장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다른 기관이 끼어든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한수은도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모르는 기관?”

박무영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제주도 사건 다음부터였을까? 그들과 혜성의 관계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박무영은 장진우를 떠올렸다. 그의 최후를 멀리서 본 목격자. 장진우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야. 내 최후는 완벽했다. 그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을 터. 죽음 뒤에 가려진 것은 보지 못했을 거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원래 의심은 할수록 더 커지는 법이었다. 지금은 과거에 대한 의심보다 미래에 대한 추진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진영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야. 겉보기엔 성급하고 다혈질이지만, 실제로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우거든. 그의 자작극일 가능성은?”

“그것도 계산에 두고 있습니다.”

한진영이 그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 제3의 기관이 개입된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막내와 한수호를 빼돌려 다른 임무를 맡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강지영을 보내 혜성 씨와 접촉해. 다음 목표는 일본의 블랙. 계획대로 일을 추진한다. 다만 NSA의 감시망도 강화하는 한편, 막내와 한수호, 장진우, 두꺼비 요원 등의 신상확보에 주력한다.”

“최근 혜성 씨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습니다. 몰래 접선하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혜성 씨의 외부 스케줄 조절은 내가 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한수은은 꾸벅 묵례하고 물러났다.

“우리의 다음 전장은 일본. 이 기세를 몰아 과거의 은원을 끝낸다.”

박무영은 남은 두 마스터를 떠올리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콘크리트 밀실.

“팀장님? 연락이 끊겨서 걱정 많이 했는데. 팀장님이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막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높였다. 한수호도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장진우가 서 있었다. 고문을 받은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한 며칠 푹 쉰 것처럼 좋아 보였다.

“여긴 어디입니까?”

“NSA의 비밀 지부 중 하나야. 원래 요인 보호를 위해 쓰이던 곳이었는데, 국장님이 서류를 조작해서 그중 한 곳을 빼돌린 거지.”

장진우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연락이 끊겼던 두꺼비 연구원이었다.

막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는 가운데, 장진우가 밀실 중앙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밤안개가 살아 있다. 그리고 NSA나 CIC보다 상위인 비밀 조직이 있다. 그 극비조직은 때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NSA에 외압을 가하기도 한다. 국장님도 이걸 알고 계셨어. 게다가 이번 광화문 사건을 통해 그 극비 조직의 힘이 국외까지 통한다는 것도 확인했고. 그래서 우릴 이곳으로 모은 거야.”

장진우는 국장의 과거를 떠올렸다.

한진영도 괜히 국장이 된 건 아니었다. 밤안개 이전에 활약하던 1세대 각성자였다. 비록 지금은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현장에서 단련된 날카로운 감각은 여전했다.

“혜성이 형의 배후에 있는 조직의 눈을 피하려는 겁니까?”

“그렇지.”

“하지만 소속이야 어찌 됐건 형의 배후 조직도 국가 기관이 아닙니까? 공개적으로 협조하는 건 어떻습니까?”

막내는 이렇게 질문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 현장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국장의 철칙이었다. 특히 게이트 시대 초기에는 아이템 보상을 노리고 능력자끼리 뒤통수를 치는 일이 만연했다. 이게 몸에 밴 것인데, 이건 같은 국가 기관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국가를 위한다고 믿었던 비밀 조직이 배신이라도 한다면?’

막내는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국가기관의 힘은 하나에 집중되면 안 된다. 효율성 측면에선 좋겠지만, 그 힘이 타락할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한국의 기관이 NSA와 CIC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혜성의 배후 조직의 외압이었다. 심지어 NSA 내부의 극비 자료들도 놈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따라서 NSA 내부 팀으로는 비밀 조직을 추격하는 게 무리라고 판단, 국장은 여기 있는 넷으로 극비 팀을 만든 것이다.

“현장에서 국장님이 당황하며 화를 낸 건요?”

이번엔 한수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연기지. 원래는 둘을 몰래 데려올 생각이었어. 그런데 둘이 혜성 씨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바람에 플랜 B로 바꾼 거야.”

“우릴 데려온 요원들은 뭡니까? NSA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국장님이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준비한 팀.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 해도 혜성 씨 배후 조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놈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 다른 제3의 세력이 끼어들어 우리를 데려간 것처럼 위장한 거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일종의 시간 끌기인 셈. 혜성의 배후 조직의 눈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 우린 NSA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제3의 세력에 납치된 상태지. NSA의 수사팀이 우릴 찾고 있지만, 단서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할 거야.”

“혜성 선배님은요? 선배님이 걱정을 많이 할 겁니다.”

“혜성 씨는 걱정하지 마. 귀띔 정도는 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 혜성 씨도 자신과 손잡은 조직을 의심하고 있을 거야. 제주도에서 몇 가지 석연찮은 일이 있었거든.”

장진우는 여기까지 말한 뒤 테이블 옆을 바라봤다.

“난 장 팀장의 연락을 받고 연구소 지하에서 오래된 문서를 빼돌렸지. 그러던 참에 국장이 보낸 사람을 만나 곧장 이리로 왔고 말이야.”

팔짱을 낀 두꺼비 연구원은 제로 프로젝트의 일부 내용을 전했다.

비밀 실험. 실험체들. 블랙.

아마 한국만이 아닐 것 같았다. 당시엔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뇌피셜이야. 증거가 없거든.”

두꺼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쓰게 웃었다.

막내와 한수호는 그 외에도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의문을 풀 기회는 많이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혜성 씨 배후 조직의 정체를 알아낸다. 둘째, 제로 프로젝트를 파헤친다. 셋째, 국내는 물론, 국외의 블랙을 뿌리 뽑는다.”

장진우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결연하게 말했다.

막내와 한수호도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잠시 후, 막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저기 찌르고 다닌 보람이 있어. 블러디 클로버로 추정되는 자에게서 연락이 왔거든.”

장진우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메모지를 내밀었다.

35.6586436 / 139.7444686

누군가가 급히 휘갈겨 쓴 숫자가 적혀 있었다. 보고 외우는 것도 힘들었다.

장진우는 메모를 입수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지방 모텔에 투숙. 한밤중 괴한의 침입. 쫓고 쫓기는 추격전. 객실에 돌아오니 덩그러니 남아 있는 메모 하나. 영화에서 메시지를 몰래 보낼 때 자주 등장하는 방법이었다.

“이게 뭡니까?”

막내는 메모를 들고 조명에 이리저리 비춰봤다. 숫자를 활용한 암호 코드가 떠올랐다.

“좌표. 도쿄타워야.”

“일본이요?”

막내와 한수호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

강남 모 커피숍.

은은한 클래식이 들리는 가운데, 혜성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은퇴 번복 이후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어딜 가나 요원과 기자 수십 명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막내와 한수호에게도 따로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지금도 인터뷰 막간을 이용해 잠깐 쉬는 것뿐. 커피숍은 그의 관계자들로 가득했다.

‘걔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안전한 걸까?’

그는 조금 전 발신자 불명의 문자를 떠올렸다.

- 우리 잘 있어요. @[email protected]

밑도 끝도 없는 문자 하나.

혜성은 그것이 막내가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건 막내의 습관이었으니까.

‘블랙. SJ 기획. NSA.’

혜성은 자신을 둘러싼 세 기관을 떠올렸다.

대외적으로는 혜성이 NSA 소속이면서 블랙에 대항하기 위해 SJ 기획과도 손을 잡은 모양새였다. 즉, 블랙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형상. 하지만 물밑에서는 NSA와 SJ 기획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기관 대 기관의 자존심 문제는 아니었다.

혜성은 제주도행 비행기에서 장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분명 밤안개는 뛰어난 요원이었네. 모두의 우상이었지. 하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진 말게. 그는……

장진우가 제주도의 호텔에서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 일부러 죽으려는 듯한 저돌적인 움직임. 그때 밤안개의 행동이 딱 그랬거든. 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어. 워낙 어두운 탓에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그때 밤안개가 흘린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네. 그때 밤안개가 흘렸던 피는…… SS급 몬스터와 같은 보라색이었네.”

몇 주일이 지났지만, 그때 장진우와 했던 대화는 지금도 토씨 하나까지 생생했다.

‘혹시 장 팀장님과 막내, 수호는 블랙이나 SJ 기획, 또는 밤안개의 과거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게 아닐까?’

그는 문득 여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막내와 한수호, 장진우, 두꺼비 연구원 등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도 회색 마스터와의 대결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거라면 녀석들이 자신한테까지 말을 아끼는 이유도 설명됐다. 그가 다른 기관과 연결돼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역시 막내한테는 얘기를 할 걸 그랬나?’

사실 혜성도 SJ 기획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막내나 장진우에게는 기회를 봐서 몇 번이나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털어놓으려 하니, 그도 SJ 기획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요원들이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조직이 국가의 최고위층과 연결됐다는 게 전부였다. 조직의 구성, 인원, 목적, 심지어 SJ 기획의 실질적인 대장이 정말 밤안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곳은 하나. 블랙을 잡고 밤안개의 과거를 확인하는 것밖에 없었다.

‘다음은 일본인가?’

그는 블랙의 거점을 떠올렸다. 부활을 대가로 정해진 차기 행선지. 다만 새로운 전장으로 가기 전에 먼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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