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36화 (136/150)

# 136. 이혜성 리턴즈 (3)

CIA 한국지부, 제1 관측실.

조금 어두운 조명 아래에는 쉰 명의 관측 요원들이 바싹 붙어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었다.

“비상! 서울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 활성화가 감지됐습니다!”

“에너지 증폭! 추가 각성입니다!”

감시 요원들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외쳤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곧 모니터에 광화문 광장이 확대돼 나왔다. 허리에 여덟 개의 빛나는 구슬을 두른 사내가 온갖 몬스터의 혼합으로 보이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리제너레이션으로 화려한 부활을 알린 혜성이었다. 특유의 검은 정장은 일렁이는 갑옷 형태로 변해 있었고, 손에 낀 가죽 장갑은 무형검을 카피한 탓에 은은하게 빛났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이혜성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파장을……”

부 지부장 데이비드 E. 워넬, 검은 머리 외국인이자 한국명 주성옥은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응시한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테러로 시선을 잔뜩 끈 것치곤 허무한 결말이었다. 유수혁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일방적으로 당했다. 놈의 모든 스킬은 혜성에게 카피 당한 상태. 그나마 혜성이 놈을 생포하기 위해 손에 인정을 둔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놈은 진즉 피떡이 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NSA 요원들이 나타났다. 유수혁의 능력 봉인 및 체포, 부상자들의 치료, 각성한 혜성의 정밀 검사 등. 요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기가 막히는군. 전에도 강하긴 했지만, 이젠 다차 카피까지 가능한 건가?”

주성옥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모니터 옆의 수치를 주목했다.

모든 수치 999,999,999.

혜성은 지하 마켓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치를 뿜었지만, 그때는 한국 NSA의 방해 때문에 수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혜성의 능력을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국에도 다차 각성자는 많았지만, 이 정도로 복잡하고 강한 파장을 뿜어내는 건 아직 보고된 바가 없었다.

“동원할 수 있는 위성은 총동원해. CIC에도 협조 요청 보내고. 일본이나 중국 쪽 반응도……”

그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관측실은 더 분주해졌다.

“SS급 이상의 괴물 능력자인가? 밤안개만으로도 벅찬데…… 또 누가?”

주성옥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용자와 아이템의 시너지 효과. 일 더하기 일이 삼 또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터. 그 대표적인 예가 조금 전 혜성이 보여준 다차 카피였다.

‘아마 놈의 능력은 저게 전부가 아닐 거다. 아직도 상당한 잠재력을 숨기고 있겠지. 언젠가 놈의 잠재력이 폭발한다면?’

그는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흥분은 새로운 유형의 능력자를 접한다는 것. 두려움은 그 새로운 능력자가 자신의 조국, 미국의 이익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각,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의 정보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태호의 병원 검사실.

위잉, 모터가 돌아가는 차가운 기계음이 들렸다.

혜성은 온몸에 각종 센서를 주렁주렁 단 채 기계에서 나왔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MRI 같은 기계 속에 있는 건 질색이었다. 투명한 유리 건너편에서는 태호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환자복을 벗고 검사실 구석의 옷걸이에서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었다. 현장에서 일본 측 능력자가 스캔과 힐링을 동시에 진행한 덕분인지 몸이 가뿐했다. 생각해 보니 전투 후에 이렇게 가뿐한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됐냐?”

혜성은 문을 열고 태호 쪽으로 건너갔다.

“축하한다. 다차 카피를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템이라니. 일본 기술이라고 했지? 일본 놈들, 아마 지금쯤 배가 엄청나게 아플 거야. 보나마나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쏟아부었을 테니까.”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거지?”

혜성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허리를 더듬었다. 전투가 끝나고 2차 각성이 사라진 뒤, 빛나는 구슬들도 그의 몸에 흡수되듯 사라진 상태였다.

“엄밀히 말해 리제너레이션은 구슬 형태가 아니라 고도로 밀집된 에너지 덩어리야. 네 몸에 잠재된 대수영처럼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 네 몸이 위험할 정도로 강한 데미지를 받을 때만 활성화하는 것 같아. 뭐, 자세한 건 좀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태호는 리제너레이션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했다.

에너지를 외부에서 공급하는 일종의 보조배터리라니. 설명하는 쪽이나 듣는 쪽, 둘 다 황당했다.

“아무튼 축하한다. 은퇴는 완전히 물 건너갔구나.”

태호는 피식 웃으며 책상에 놓여 있던 신문을 던졌다. 갓 발행된 따끈따끈한 석간이었다.

- 영웅의 귀환.

헤드라인부터 짧고 거창했다.

신문은 모든 면이 혜성의 특집 기사로 도배돼 있었다. 정부에서 언론을 통제했지만, 어떻게 구했는지 그가 새로운 2차 각성을 한 모습도 작게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대박을 노린 BJ나 파파라치가 정부의 대피령을 무시하고 근처 빌딩에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젠장. 기자 놈들, 아주 신났네, 신났어. 부모님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혜성은 신문을 잠깐 훑어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던졌다.

그가 2차 각성한 이후, 어머니는 하루도 그를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색하진 않았어도 은퇴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반대. 평소 그가 국가 요원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시던 분이었느니, 그의 귀환을 두 팔 벌려 환영하실 게 뻔했다.

“하아, 엄마가 걱정이 크시겠네.”

혜성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라는 말보다 엄마가 더 익숙했다.

“왜 어머니뿐이냐? 아마 아버지가 더 실망이 크실걸? 부모님께 잘해라. 세상에 그런 분 둘도 없으니까.”

태호는 뭔가를 안다는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 기절했을 때…… 아니다. 이건 비밀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뭔데? 무슨 일이 있었는데?”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네 부모님께 직접 여쭤 봐.”

태호는 혜성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눈치였다. 하지만 녀석의 무거운 입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유명했다. 혜성이 백 번을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줄 게 뻔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어때?”

혜성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모니터에는 어려운 수치와 파장이 잔뜩 나열돼 있었다.

“지금은 괜찮다. 지금은.”

“지금은? 그게 무슨 뜻이지?”

“지금은 별문제가 없을 거야. 아이템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니까. 하지만 네가 2차 각성하고 아이템이 활성화되면 얘기가 달라지지. 최근 발표된 각성자 신체와 에너지의 공명 이론에 따르면……”

태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쉬운 말로 해줘.”

“쉽게 말해 8개의 외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만큼 네 몸에 걸리는 과부화도 8배가 된 거야. 전의 상태가 예견된 폭탄이라면, 지금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된 거지. 씨부럴.”

태호는 습관적으로 욕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의사로서 하는 말인데. 그냥 은퇴하는 게 어때? 돈, 명예. 이젠 아쉬울 게 없잖아?”

녀석의 표정은 진지했다.

“고민해볼게. 나 간다. 검사 결과는 간단히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줘.”

혜성은 쓰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검사실을 나왔다.

“또 어디 가?”

등 뒤에서 태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본부. 나 원래 조사관들하고 문제 있었던 거 알지? 은퇴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거든. 그리고 공식 인터뷰에, 각종 보고에. 거기에 지체 높으신 분들이 이것저것 행사도 준비했다고 하더라. 아마 며칠간 정신없을 거야.”

혜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태호의 얼굴을 더 볼 수 없었다. 녀석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녀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병원 밖에는 요원 십여 명이 몇 시간 전부터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만으로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얘들은 또 어디에 간 거지? 대체 둘이서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막내와 한수호의 이름을 되뇌었다.

2시간 전. 전투 직후의 처리로 한창 혼란스럽던 와중이었다. 낯선 요원들이 검은 승합차를 타고 등장해 치료를 받던 막내와 한수호를 연행했다.

“너희 누구야?”

국장이 성난 목소리로 묻자, 그들 중 하나가 말없이 파란 서류철을 내밀었다. 그리고 국장의 반항은 그것으로 끝. 국장은 그들이 막내와 한수호를 데려가는 걸 잠자코 보기만 했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혜성을 불렀지만, 국장의 반응을 보곤 이내 자포자기한 듯 순순히 따라갔다.

“얘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그들이 사라지기 직전, 국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다리라는 말뿐. 그리고 다시 막내와 한수호는 연락이 끊겼다. 마치 광화문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때 혜성은 다른 쪽에서 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새끼들. 국장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보낸 건가? 본부에서 한 번도 못 본 얼굴이었는데. 대체 누구지?’

그는 둘을 데려간 요원들을 떠올렸다. 분위기는 조사관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은밀하고 어두운 인상이었다.

“새로운 2차 각성을 축하할 틈도 없군.”

혜성은 심호흡하며 병원의 문을 열고 나왔다. 겉치레의 공식 행사들 뒤에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

회색 콘크리트로 된 밀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지하 특유의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규모는 약 스무 평 남짓. 비상시 대피소로 쓰이는 곳인지 벽걸이형 TV와 침대 두 개, 샤워실 등이 있어 부족함은 없었다. 심지어 구석에는 전자레인지와 인스턴트식품도 잔뜩 있었다.

“젠장. 여긴 어디야? 우릴 어쩔 셈이지?”

막내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을 서성였다.

“정부의 비밀요원들일까요? 아니면 혜성 선배님을 돕고 있는 조직?”

한수호가 침대에 걸터앉아 막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녀석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둘은 승용차에 타자마자 손에 수갑을 차고 두꺼운 안대로 눈이 가려졌다. 아는 것이라곤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30분 정도 달렸다는 것뿐. 누군가가 손에 수갑의 열쇠를 쥐여 줬을 때는 이미 밀실에 들어온 뒤였다.

쿵쿵. 막내는 벽에 머리를 박으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현장에는 혜성이 형하고 국장님, 우리 쪽 요원들이 잔뜩 있었어. 그런데 국장님이 우리를 그냥 보내줬다는 건, 국장보다 높은 사람이 놈들을 보냈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놈들은 우릴 해칠 마음은 없는 것 같아. 그랬다면 우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침착하자, 침착해. 막내는 심호흡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때였다.

“맞아. 정확한 추측이다.”

문가에서 누군가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막내와 한수호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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