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35화 (135/150)

# 135. 이혜성 리턴즈 (2)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옆.

- 스캔 완료. 잠시 대기하라.

혜성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몸의 상처와 피로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보니 확실히 전보다 몸이 가벼웠다.

‘일본의 능력자는 스캔과 힐링을 병행한 건가?’

그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동기화는 스캔으로 끝이 아니었다. 혜성의 데이터를 아이템에 입력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얼마 동안은 놈의 말대로 기다려야만 했다.

“전투는?”

그는 막내와 한수호를 떠올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동상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광장 쪽을 바라봤다.

“씨발.”

그의 입에서 대번 욕설이 튀어나왔다.

유수혁이었던 몬스터가 막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오지 마!”

막내는 주저앉은 채 물러나며 사력을 다해 화염구를 던졌다.

하지만 놈의 주위에 쳐진 무형의 방어막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한수호도 놈에게 당한 탓에 도와줄 수 없었다. 절체절명.

“에라 모르겠다.”

혜성은 폭탄 하나를 꺼내 들고 놈을 향해 돌진했다.

- 멈춰!

핸즈프리에서 일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50미터, 30미터, 10미터. 혜성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놈의 괴상한 몰골, 음산한 기운, 역겨운 냄새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문득 막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이게 형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라면, 우린 중요한 조연일 거예요.

그때는 단순한 농담으로 여겼는데. 어쩐지 자신이 정말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영화에는 주인공이 성공하는 것도 있지만, 주인공이 장렬하게 죽는 새드 무비도 있잖아? 역시 내 장르는 새드 무비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놈을 향해 돌진했다.

물론 폭탄을 한꺼번에 다 터뜨리면 막내와 한수호도 위험했다. 그는 달리는 동안 왼손으로 나머지 폭탄을 떼어내 버렸다.

놈에게 찰싹 달라붙어 하나만 터뜨린다. 그러면 놈을 제거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터. 놈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 막내와 한수호는 전장을 이탈한다. 짧은 순간에 그가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크륵. 아직 거기 있었나?”

유수혁은 혜성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놈의 말에는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가자!”

혜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뭔가 번쩍하고 떨어졌다.

***

“형!”

막내는 오른손으로 눈을 가리고 혜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좌측 5미터. 혜성은 눈부신 빛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너무 밝은 탓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막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혜성이 손에 폭탄을 들고 미친놈처럼 달려오던 장면, 유수혁이 혜성을 돌아보며 왼손을 슬쩍 휘두르던 장면, 무형검이 혜성의 목을 찌르려던 찰나 하늘에서 별안간 벼락이 떨어진 장면. 이 모든 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한바탕 꿈을 꾼 기분이었다.

“선배님!”

멀리서 한수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도 혜성의 마지막을 본 것 같았다.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유수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혜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막내와 한수호는 관심 밖. 혜성의 변화에 잔뜩 흥미가 동한 눈치였다.

“새 아이템이라도 얻은 건가?”

놈은 혜성을 향해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퍼엉, 검은 강기가 혜성을 향해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근처에 닿는 모든 걸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흑 속성의 공격. 그러나 검은 강기는 혜성의 빛에 닿자마자 스며들듯 스르르 사라졌다. 방어막으로 튕겨낸 게 아닌, 흡수한 것 같았다.

“뭐지?”

유수혁은 흠칫 놀라는 한편, 무형검을 날리기 위해 왼손을 들었다.

“이런 느낌이었나?”

혜성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빛 속에서 혜성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희미하게 손을 들었다.

퍼엉, 방금 놈이 쏜 강기가 그대로 놈을 향해 돌아갔다. 형태는 같지만 위력은 그 이상. 크기는 20% 정도 더 컸고, 속도도 훨씬 빨랐다.

“이 새끼가.”

유수혁은 급히 양손을 들어 상체를 보호했다. 콰쾅, 폭발과 함께 놈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뭐지? 스킬 카피가 돌아온 건가? 아닌데. 2차 각성하곤 뭔가 다른 거 같은데.”

막내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죽어!”

유수혁은 재차 왼손을 휘둘렀다. 파지직, 노란색 뇌전의 기운이 혜성을 향해 날아갔다.

이번에도 빛 속의 혜성은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타격을 받아 뇌전을 카피하려는 것처럼. 그다음 그는 이어서 왼손을 휘둘러 똑같은 뇌전을 발사했다.

“크윽!”

유수혁의 공격, 혜성의 흡수와 반사, 다시 유수혁의 양손 가드와 후퇴. 둘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정말 스킬 카피가 돌아온 겁니까?”

멀리서 한수호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면 이전의 2차 각성과 확연히 달랐지만, 녀석은 혜성이 힘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그래. 그런 것 같다.”

빛 속에서 혜성의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그냥 죽어!”

유수혁은 광기 어린 눈을 번쩍이며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빛, 어둠, 불, 물, 얼음, 바람, 땅, 번개. 다양한 자연계 속성 강기가 형형색색 빛나며 혜성을 향해 날아갔다.

“쯧쯧.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혜성은 두 팔을 큰 대자로 벌리고 놈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콰콰쾅, 연신 요란한 폭발이 일었다.

그는 제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섰다.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는 유수혁, 반대로 여유롭게 천천히 다가오는 혜성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이윽고 빛이 서서히 옅어졌다. 혜성은 옷매무시를 바로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정장, 검은 장갑,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 이젠 ‘이혜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시그니처 전투 복장이었다.

“형! 역시 돌아온 거야?”

막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그래. 걱정시켜 미안하다.”

혜성은 막내를 향해 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그런데 저건 뭐지?”

막내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한 박자 늦게 혜성의 허리를 주목했다.

혜성의 허리 주위에는 흰색,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하늘색, 녹색, 황토색, 노란색으로 빛나는 여덟 개의 구슬이 둥둥 떠 있었다. 자연계 빛, 어둠, 불, 물, 얼음, 바람, 땅, 번개 등을 대표하는 색깔. 아까 혜성의 주위를 감쌌던 빛의 정체도 그 구슬에서 뿜어진 것 같았다.

“새 아이템과 2차 각성의 시너지인가? 재미있는 능력이군.”

혜성은 놈을 향해 오른발을 슬쩍 굴렀다.

허리춤의 녹색 구슬이 번쩍임과 동시에, 그의 발밑에 바람의 기운이 맺혔다. 그는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유수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뭐야?”

유수혁은 당황해서 급히 물러났지만, 혜성의 바람이 한 수 위였다.

혜성은 오른손으로 놈의 복부를 강타했다. 부웅, 허리춤에서 황토색 빛이 뿜어졌다. 단단한 대지의 속성.

“크헉!”

유수혁은 침을 흘리며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복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시 혜성은 바람을 타고 둥실 떠올랐다. 이번엔 얼음의 기운을 맺은 돌려차기. 쾅, 상체에 엷은 얼음이 맺힌 가운데, 놈은 30미터쯤 떨어진 철근 구조물에 처박혔다.

“나, 유수혁이야!”

유수혁의 발악은 계속됐다. 이번엔 무형검을 이용한 마구잡이 공격. 하지만 혜성은 카피캣으로 놈의 무형검을 카피해 그대로 되돌려줬다. 콰콰쾅, 유수혁의 괴물 같은 몸은 금세 피로 얼룩진 만신창이가 됐다.

“이, 이게 뭐냐?”

놈이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이거? 2차 각성, 버전 2.0쯤 되려나?”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곤 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SJ 기획, 소회의실.

“저게 뭡니까?”

한수은은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중앙의 모니터에 잠깐 비친 막내와 한수호의 표정과 똑같았다.

“방금 혜성 씨가 말했잖아. 2차 각성 버전 2.0이라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지은 건지. 다른 건 몰라도 작명 센스는 영 꽝이군.”

박무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리제너레이션과 혜성 씨의 2차 각성이 융합한 겁니까?”

그녀는 뒤늦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맞아. 일본 놈들, 정말 대단한 걸 만들었단 말이지. 뭐, 우리도 일본 정보국에서 이 프로젝트를 빼내는 데 고생 좀 했지만.”

박무영은 통쾌한 듯 소리 죽여 웃었다.

한, 일 정보국의 숨 막히는 물밑 전쟁. 그 승리의 대가 중 하나가 바로 리제너레이션 프로젝트를 알아낸 것이었다. 그는 모니터에 비친 혜성의 허리춤을 주목하며 말을 이었다.

“리제너레이션. 본래는 에너지원을 다쳤거나 에너지가 부족한 각성자를 보조하기 위한 프로젝트였어. 일종의 외장 하드나 보조배터리처럼 에너지를 외부에서 보완하자는 거지.”

“과연. 어떻게 보면 혜성 씨를 위한 맞춤형 아이템이군요. 기타무라가 그토록 반대한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한수은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리제너레이션은 단순히 혜성 씨의 능력을 되찾게 해준 것만이 아니야. 혜성 씨의 공략 방법이 뭐였지?”

박무영은 눈으로 웃으며 한수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족이나 지인, 인질 등으로 위협하는 것. 하급 몬스터로 먼저 2차 각성을 유도하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속성으로 속성 간의 상성을 이용하는 것.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수은은 잠깐 망설이다가 박무영과 우민창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맞아. 혜성 씨는 그동안 듀얼 각성자에게 약한 면이 있었지. 낮은 등급으로 2차 각성하는 바람에 막내와 한수호가 고생도 많이 했고. 하지만 이제부턴 달라.”

박무영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모니터의 혜성을 주목했다. 허리춤에 둥실 떠 있는 여덟 개의 구슬이 필요에 따라 밝았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구슬 하나하나가 전부 에너지원이야. 즉, 혜성 씨는 여덟 개의 단전을 가진 셈이지. 따라서 혜성 씨가 카피할 수 있는 스킬은 이론상으로 최대 8개. 앞으론 시간 차 각성 유도나 속성 간 상성 이용으로 혜성 씨를 위협할 수 없단 말이지.”

박무영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이 ‘버전 2.0’이라고 반 농담으로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차 각성이었지만, 카피할 수 있는 대상이 8배가 됐으니까.

“유수혁이 불쌍해서 못 봐주겠군. 유수혁이 몬스터와 융합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놈이 무슨 스킬을 쓰든 이혜성은 전부 증폭해서 카피할 수 있지. 더는 볼 것도 없어.”

박무영은 선언처럼 말하고 리모컨으로 모니터를 껐다. 대신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밤안개입니다. 예정대로 이혜성……”

조용한 회의실에는 그의 통화 소리만 낮게 울렸다.

혜성에게 국내는 좁았다. 블랙의 근거지는 일본과 중국. 이젠 혜성이 일본과 중국에 진출해 블랙에게 반격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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