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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34화 (134/150)

# 134. 이혜성 리턴즈 (1)

광화문 광장 근처.

“일본 놈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우리 쪽 제안을 받아들였나 보군. 하긴, 블랙은 이미 일본 내부에 깊숙이 잠입한 상황이니까. 일본 스스로 도려낼 단계는 지났지.”

강지영은 빌딩에서 치솟는 붉은 연기를 보며 웃었다.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장의 꼬장과 자존심은 유명했다. 특히 한국과 관련된 일에는 지고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런 자가 눈엣가시 같은 한국과 혜성을 위해 미공개된 아이템을 사용해야 한다니. 속이 쓰려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안 봐도 훤했다.

게다가 일본 쪽의 조공 아닌 조공은 천공의 검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혜성의 부활을 온 세상에 알릴 리제너레이션이었다.

- 일본의 정보국이 혜성을 돕고, 향후 혜성은 일본에 진출해서 일본의 정보국과 함께 블랙을 처리한다.

일종의 거래. 이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한국 입장에서 봐도 블랙은 언제든 다시 국내로 진입할 수 있는 잠재적 적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전적을 보면, 블랙과 상대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민간의 피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한국 입장에서는 블랙을 제거하되 그 전장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예를 들어 일본이 되어야 했다.

결국 한, 일 양국의 공조는 블랙이란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는 혜성 씨가 부활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인데.”

강지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막내와 한수호가 계획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버텨야 했다.

“지금쯤 일본 쪽 애들도 리제너레이션을 위해 혜성 씨 분석을 시작했겠지?”

강지영은 등에 멘 백팩에서 특수 태블릿을 꺼냈다. 부활한 혜성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능력자가 될 터. 따라서 혜성에게 버프를 걸기 위해서는 모든 데이터를 처음부터 다시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암호를 입력하고 비밀 폴더에 접근했다. 과연 리제너레이션의 데이터가 전송돼 있었다.

“어디, 부활한 혜성 씨가 어떤 능력자가 될지 볼까?”

그녀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혜성의 폴더를 열었다.

***

송도 연구소.

연구원들은 대회의실에 모여 모니터를 통해 광화문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이혜성을 부활시킨다고?”

“혜성 씨는 이미 끝나서 은퇴한 거 아니었어?”

“단전이 없는데 무슨 수로?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해?”

그들은 조금 전 NSA 본부에서 내려온 무전을 떠올리며 웅성거렸다.

이럴 때 두꺼비가 있었으면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줄 텐데. 아쉽게도 두꺼비는 지하 주차장에서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며칠째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관계 기관과 협조해 수색에 나섰지만, 진전이 없었다.

“아니. 이론상 가능할 수도 있어.”

안경을 낀 다른 수석 연구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끼어들었다. 두꺼비 연구원이 사라진 이후 사실상 그의 위치를 대신하던 연구원이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배터리가 고장 난 전자기기를 떠올리면 될 거야.”

수석 연구원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연구원들은 전부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단전은 에너지를 담는 그릇이지. 일반적인 전자기기와 달리 교체가 어렵지만 말이야. 만약 배터리가 다 되거나 고장 나면 어떻게 해결하지?”

“그야 보조배터리 등으로 외부 전원을 연결하면 되지요.”

다른 연구원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흠칫 놀랐다. ‘설마?’라는 표정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지금 이혜성에게는 능력이 남아 있지만, 그걸 구동할 에너지가 없지. 따라서 고농축 에너지가 담긴 특별한 아이템을 연결한다면, 능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문제는 동기화에 걸리는 시간이지만.”

수석 연구원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유니크 아이템은 ‘동기화’ 과정이 필요했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구소에서 사전에 수집한 사용자의 데이터를 아이템과 일치시키는 것. 안정적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직접 사용자를 스캔해서 그 정보를 아이템에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건 시간이 비교적 짧지만, 불안정하고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동기화한다고 해도 최소한 10분은 필요한데. 과연 그때까지 유수혁이 그냥 보고만 있을까?”

수석 연구원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모니터를 주목했다.

막내와 한수호가 유수혁 주위를 맴돌며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듯 실력이 일취월장해 있었다.

“혜성의 부활이 먼저냐, 유수혁이 막내와 한수호를 제거하는 게 먼저냐? 지금부턴 시간과의 싸움이군.”

수석 연구원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연구원들도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

광화문 광장.

혜성은 세종대왕 동상에 기대서서 전투를 구경 중이었다. 에너지가 없다는 걸 실감했다. 수증기 사이로 막내와 한수호의 움직임이 희끗희끗한 잔상으로만 보였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멀리서 유수혁의 악다구니 같은 고함이 들렸다.

‘내가 퇴보한 건가, 저 녀석들이 성장한 건가?’

그는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면서도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 같아선 당장 카피캣을 끼고 전투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현실은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들었다.

- 동상 뒤로.

그때 돌연 그의 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다. 일본인이나 재일교포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억양이 어색하고 날카로웠다.

‘누구지?’

혜성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뿌연 수증기와 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광장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작전 코드 A408S. 반복한다. 동상 뒤로 이동하라.

이번엔 남성의 어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A408S.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번 작전의 코드명을 정확히 언급했다. 소속은 모르겠지만, 국장의 승인을 받은 아군이라는 뜻이었다. 혜성은 유수혁이 있는 방향을 힐끔거린 뒤, 동상을 짚고 시키는 대로 이동했다.

유수혁은 막내와 한수호에게 완전히 정신을 팔린 상태였다. 혜성이 당장 전장을 이탈해도 모를 것 같았다.

- 가부좌를 틀고……

곧 다음 지령이 떨어졌다.

가부좌나 단전호흡 등은 일본의 각성자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었다. 같은 각성자라도 한국과 일본은 기(氣)를 중요하게 여기느냐, 형(形)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로 나뉘었다. 일본이 중요시하는 건 수련을 통한 기. 반면 한국은 체술 등의 형을 중요시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런 걸 자세히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일본 쪽이군. 근데 왜 날 도와주는 거지?’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부우웅, 뿌연 빛이 그를 감싸며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전신을 스캔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템과 사용자를 원격으로 동기화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 지금부터 리제너레이션 퍼스트 스텝에 돌입한다. 사용자는……

‘리제너레이션은 또 뭐야?’

혜성은 생소한 목소리의 설명을 들으며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10분 후.

“역시 무리인가? 유니크 아이템을 착용하고 버프까지 받았는데도?”

막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춤 물러섰다.

놈을 꺾는 건 무리라도 어느 정도 타격은 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공격하는 쪽이 제풀에 지쳤다.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죠?”

반대편에서 한수호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광장 중앙에는 둘의 합작품인 고온, 고압의 수증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높이 약 10미터. 쉽게 말해 압력밥솥의 내부처럼 들끓고 있었다. 주위에 흩어진 콘크리트 파편들이 휩쓸리듯 빨려들어 녹아내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유수혁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유수혁의 발을 묶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한 번 더 가자.”

막내는 오른팔을 들며 억지로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한수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흥! 누구 맘대로?”

수증기 안쪽에서 유수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놈의 무형검이 수증기를 뚫고 둘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전보다 빠르고 날카로운 반격.

“피해!”

막내는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화끈한 통증과 함께 왼쪽 어깨와 옆구리에서 핏물이 튀었다.

“크윽!”

반대쪽에서도 한수호의 신음이 들렸다.

그사이에도 놈의 공격은 계속됐다. 무형검은 둘을 스친 뒤, 허공에서 급선회해 재차 날아왔다. 막내는 이미 자세가 무너진 상태. 뒤에서 날아오는 무형검을 피하는 게 어려웠다.

‘이판사판이다!’

그는 혜성의 방식을 떠올리며 수증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볼링공만 한 화염구를 맺고 있었다.

‘원거리 타격은 소용없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공격의 범위를 줄이고 화력을 집중시킨다.’

짧은 순간, 막내는 다음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한수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유수혁을 향해 돌진했다.

“간닷!”

막내는 놈을 향해 뛰어올라 화염이 맺힌 주먹을 뻗었다.

주의력을 끌어올리자 일시적으로 주위가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우선 뒤에서 날아오는 무형검은 몸을 옆으로 비틀어 피해를 최소화했다. 등과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곤 뜨거운 돌개바람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쾅, 돌개바람 내부에서 더욱 강한 폭발이 일었다. 폭발의 충격파로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성공인가?’

그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돌개바람에 시선을 고정했다.

충격파 때문에 수증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유수혁의 모습이 슬쩍 드러났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과 괴상한 가면은 반쯤 녹아내린 상태였다.

“씨발. 저게 뭐야?”

쾅, 막내는 눈을 부릅뜬 채 근처 조형물에 처박혔다. 너무 놀란 탓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개바람 속에 서 있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유수혁이라고 알려진 몬스터가 히죽 웃으며 서 있었다. 뱀을 연상시키는 피부와 길게 찢어진 노란색 눈, 일정한 형태 없이 일렁이는 섀도 나이트의 손, 그리고 은연중에 뿜어지는 시커먼 사기까지. 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몬스터의 잡종이었다.

“성격만이 아니라 외형도 몬스터에게 잠식된 건가?”

막내는 쌍두 살모사 던전에서 싸웠던 사령을 떠올렸다.

사령도 던전에서 몬스터의 외형으로 변신하자 더 강해졌었다. 유수혁도 놈과 비슷한 상태였다. 몬스터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부족했는지, 아예 몸 전체에 몬스터의 일부를 이식했다. 놈이 혜성의 폭주에 죽지 않고 현장에서 도망친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이거,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였군.”

유수혁은 뱀파이어처럼 길게 뻗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목소리 또한 뱀처럼 음산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옛날 일본 만화도 아니고. 설마 사령처럼 크게 변신하는 건 아니겠지?’

막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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