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악귀 (4)
광화문 광장.
요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유수혁의 기세에 눌린 눈치였다. 고요한 가운데 단 한 명, 혜성만 눈을 빛내며 유수혁을 노려봤다.
‘누구든 한 명만 죽이면 된다고 했지?’
혜성은 별안간 유수혁을 향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병신.”
유수혁은 피식 비웃었다.
혜성은 몸도 완전치 않은 일반인의 상태. 놈이 무형검이나 염동력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놈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혀 혜성의 펀치를 가볍게 피했다. 동시에 오른발로 혜성의 복부를 걷어찼다. 혜성을 단숨에 죽일 생각은 없는 듯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은 평범한 발길질이었다.
커억, 혜성의 몸이 수직으로 굽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시 놈이 오른발을 날리려는 찰나, 그는 상체를 굽힌 상태에서 그대로 태클을 걸어 놈을 끌어안았다.
“그래. 분명 누구를 죽이라는 말은 안 했지. 그런데 생각한 게 겨우 그거냐? 그 몸으로 뭘 어쩌려고?”
요지부동. 유수혁은 하체에 에너지를 집중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밀려던 혜성이 튕겨나듯 물러났다.
“뭐 해! 빨리 튀어!”
혜성은 놈의 하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어물쩍거리는 요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유수혁의 발을 잡거나 팔을 물어뜯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시간을 끈다. 그리고 자폭해서 결계를 무너뜨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계획이었다.
그제야 몇몇 요원은 혜성의 생각을 눈치챘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머뭇거릴 뿐. 차마 혜성을 버리고 자기들끼리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 참. 겨우 생각한 게……”
유수혁은 비아냥거리며 왼손을 슬쩍 들었다.
그때였다. 콰쾅! 하늘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마치 천상에 사는 신이 지상의 악마를 향해 붉은 검을 내던진 것처럼. 동시에 근처에 있던 빌딩 옥상에서 폭발이 일었다.
“뭐야?”
유수혁은 손을 멈추고 폭발이 난 방향을 바라봤다. 혜성도 멈칫하며 같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으아아!”
테러범들의 비명이 바람을 타고 환청처럼 전해졌다.
다시 혜성이 뭐라고 외치려는 찰나였다.
“지금이다!”
동시에 NSA의 요원들이 유수혁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요원들의 목소리에도 활기가 돌아왔다.
능력을 억압하던 결계가 깨진 것이다.
***
NSA 본부 임시 통제센터.
“그렇지!”
요원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축제 분위기. 중앙의 모니터에는 벼락이 친 것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빌딩의 옥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일본 새끼들. 이런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니. 기가 막히는군.”
한진영은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지금이 전시 상황이었다면? 그리고 놈들의 무기가 아군의 주요 인사들을 노렸다면?’ 솔직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원래 일본 놈들이 항공, 우주 분야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지 않습니까? 쳇, 그때 누가 쓸데없는 토목공사만 안 했어도.”
팀장 중 하나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 대 일본.
각성자의 수준은 별 차이가 없었다. 몬스터의 사체나 이계의 재료를 이용해 아이템을 만드는 수준은 오히려 한국이 조금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첨단 과학을 응용한 분야에서는 일본에 뒤지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유수혁을 처리하는 게 우선 아닙니까?”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렇지.”
한진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결계가 깨진 뒤, 현장의 요원들과 유수혁 간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개인의 능력이야 유수혁이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현장의 요원들은 모두 AA급으로 숫자도 스무 명이나 됐다. 요원들이 빠르게 이동하며 차륜전처럼 치고 빠지자, 유수혁도 잠깐 주춤했다.
“이혜성은?”
한진영의 물음에 통제 요원이 카메라의 방향을 옮겼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
혜성이 쿨럭거리며 기대앉아 있었다. 유수혁에게 복부를 걷어차여 날아온 것 같았다. 그는 배를 움켜잡고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었다.
“지원팀하고 의무팀이 아직 대기 중입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아니, 지원팀하고 의무팀은 계속 대기한다. 현장의 요원들도 기회를 봐서 빠지라고 해.”
한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뜻밖의 명령.
“네?”
팀장들은 순간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럼 유수혁은 누가 맡습니까?”
다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긴. 우리의 영웅, 이혜성과 그 일행들이지. 이번 작전의 목표는 단순히 유수혁을 막는 게 아니야. 국민 영웅의 귀환을 알리는 것. 이것이 최종 목적이다.”
한진영은 웃음을 참고 짐짓 담담하게 대꾸했다. 물론 이건 그의 말이 아닌, 아까 걸려온 전화의 상대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이혜성의 일행들?”
“국민 영웅의 귀환이라고?”
당연히 모두의 의문은 더 커졌다.
“어?”
그때 통제 요원이 비명처럼 외쳤다. 과연 국장의 말대로였다. 유수혁이 특유의 무형검으로 자신을 에워싼 요원들에게 반격하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인물 둘이 난입했다.
***
광화문 광장.
“D-301. 반복한다. D-301. 전 대원은……”
NSA 요원들은 핸즈프리를 통해 아까부터 같은 무전을 받고 있었다. D-301. 무조건적인 철수를 뜻하는 코드명이었다.
“뭐? 미쳤어?”
팀장은 자기도 모르게 반말로 목소리를 높였다. 명령의 주체가 국장이라는 것도 잊었다.
파팟, 날카로운 뭔가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형검. 그는 공중에 떠 있던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물러섰다.
“젠장. 만만치 않습니다.”
“추가 지원팀은 아직입니까?”
다른 팀원들의 난감한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오감을 극대화하는 특수 약물을 복용한 뒤였다. 오감이 평소보다 10배는 예민한 상태. 그런데도 놈의 무형검은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놈의 무형검에 머리와 목이 분리될 것 같았다.
그사이에도 핸즈프리에선 같은 명령이 반복되고 있었다. D-301.
“제길! 본부에서 뭔가 생각이 있겠지. D-301. 전원 철수한다!”
팀장은 1시 방향으로 50미터쯤 떨어진 혜성을 힐끔 돌아본 뒤 팀원들에게 명령했다.
팀원들은 여전히 유수혁의 주위를 맴돌며 차륜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파팟,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물러섰다.
“어딜 도망치……”
유수혁이 비웃으며 양손을 크게 교차하려는 찰나였다.
퍼펑.
12시 방향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의 강기가 대포처럼 쏘아졌다. 유수혁은 요원들을 공격하려던 찰나. 콰쾅, 그는 뒤에서 날아온 기습을 받고 제자리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어떤 새끼들이야?”
유수혁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상체를 돌렸다.
‘누구지?’
NSA의 팀장과 요원들, 멀리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구경하던 혜성도 동시에 12시 방향을 바라봤다.
붉은색은 불, 푸른색은 물의 기운이었다. 두 기운이 충돌하며 만든 수증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잠시 후, 안개처럼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크고 작은 한 쌍의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봐, 이거 봐. 역시 우리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이래서 맘 편히 은퇴할 수 있겠어요?”
“그새를 못 참고 또 사건에 휘말리신 겁니까? 이쯤 되면 악당들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선배님이 악당들을 끌어들이는 거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은 검지를 좌우로 까딱이며 짐짓 타이르듯 말했다.
“저 새끼들이.”
혜성은 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너무 반가우면 그냥 웃음만 나온다던데, 지금 혜성의 심정이 딱 그랬다. 둘은 약방의 감초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녀석들. 자칭 좌 막내, 우 한수호였다.
“흥!”
유수혁이 둘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둘의 앞에는 수증기가 자욱한 상황. 수증기가 갈라지며 무형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없지!”
막내는 재차 불의 기운을 쏘았다. 동시에 한수호도 코웃음 치며 물의 기운을 발사했다.
퍼펑, 물줄기가 폭죽처럼 흩어지는 가운데, 무형검도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놈들 보게?”
유수혁은 다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놈은 손을 슬쩍 휘저어 무형검을 회수했다. 비록 한 걸음이었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그가 물러선 건 처음이었다.
‘쟤들이 저렇게 강했나?’
혜성도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바라봤다.
이윽고 수증기를 뚫고 둘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둘 다 길을 가다가 하루에도 몇 번은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다만 오는 길에 사고나 싸움이 있었는지 트레이닝복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피 같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여기는 이제부터 우리가 맡겠습니다.”
막내는 장갑을 고쳐 끼며 요원들에게 말했다. 한수호도 장갑을 점검하며 녀석과 나란히 섰다.
팀장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국장의 무전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요원들에게 눈짓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막내와 한수호의 협공은 유명한 터였다. 여기에 다른 요원들이 끼면 오히려 둘의 협공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혜성은 둘의 손을 주목했다. 능력을 증폭시키는 특수 장갑이 전보다 더 선명하게 각각 붉은빛과 푸른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사용자와 아이템의 공명? 저건 최소 AAA급 능력자만 가능한 거 아니었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혜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둘은 전과 분위기도 달랐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태도에도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가 세종대왕의 동상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도중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형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라면, 나와 수호의 이야기는 조연의 외전쯤 될 거예요.”
“맞습니다. 밤새 이야기해도 부족할 겁니다. 그러니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여긴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막내와 한수호는 혜성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웃으며 차례대로 말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뭔가 계획이 있는 눈치였다.
“그런가?”
혜성은 재차 피식 웃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유수혁이 변종 게이트를 열거나 다른 행동을 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알았다. 그 외전, 기대하고 있지.”
그는 동상에 기대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NSA의 팀장과 요원들은 전장을 이탈했다. 이제 남은 건 막내와 한수호. 그리고 멀리서 구경하는 혜성뿐이었다.
“자, 그럼 슬슬 2라운드를 시작해볼까?”
“너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예전의 우리가 아니거든.”
막내와 한수호는 유수혁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둘의 양손에 맺힌 불과 물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