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악귀 (3)
일본 내각정보조사실(内閣情報調査室, CIRO).
1952년 미국의 제안으로 창설된 수상 직속의 정보기관으로 대한민국의 국정원, 미국의 중앙정보국에 해당한다. 본래는 일본 국내와 해외의 정보를 수집하여 총리에게 보고하는 기관. 하지만 게이트 시대에 이르러서 조직을 재정비, 현재는 능력자와 관련된 정보 수집 및 테러 대응도 담당하고 있었다.
본청 제1 회의실.
실장 기타무라를 비롯한 국내 1부, 국내 2부, 국제부 등의 주요 인사 1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CIRO의 거물들이 총집결한 셈. 실장 왼쪽 아래에는 일본 NSA의 가노 차장도 보였다.
“……이상이 현재 한국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입니다.”
국제부 한반도반의 책임자가 실장의 맞은편에 서서 브리핑을 마쳤다. NSA로 치면 팀장급에 해당하는 자였다. 그의 뒤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는 혜성이 폭탄으로 테러범을 위협하는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블랙. 이젠 정말 노골적으로 나서는군.”
쾅, 실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이를 갈았다. 하마터면 욕설이 나올 뻔했다. 그는 주위의 이목을 생각해 억지로 화를 삼켰다.
이어서 국내 1부의 부장이 꾸벅 묵례하고 맞은편으로 나왔다. 일본 국내의 정보 수집을 총괄하는 자였다. 그는 일본 헌터계에 이미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블랙의 상황을 전했다.
“……현재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블랙의 능력자는 약 2,000여 명. 코드명 회색 여우, 일명 회색 마스터가 한국 쪽 능력자에게 제거됐습니다만, 아직 두 마스터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지부가 당한 걸 오히려 조직 재정비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진 국내 2부, 국제부의 보고도 비슷했다.
블랙은 돈, 명예, 힘 등 다양한 미끼를 내걸고 능력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 유명한 민간 길드는 물론이고, CIRO나 NSA 등 국가 요원들도 상당히 블랙 쪽으로 전향한 것으로 파악됐다. 좋지 않은 내용뿐이었다.
“MSS(국가안전부, 国家安全部)는 어때?”
실장은 국제부 중국반의 책임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참고로 MSS는 정보 및 보안을 담당하는 중국의 정보기관이었다.
“그들도 블랙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일전에 한국에서 청룡의 비늘이라는 아이템을 빼돌린 조직을 기억하십니까?”
“청룡의 비늘?”
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 쪽 사건은 일본에도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혜성이 인천대교에서 싸웠던 중국계 능력자가 얼핏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당시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의 오인회(五人會)가 사실상 블랙의 하수인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삼합회 등 기존의 범죄조직도 블랙과 협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블랙은 단순히 무정부 테러조직이 아니었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동남아, 미주, 유럽까지 손을 뻗고, 자체적으로 연구시설도 갖춘 다국적 범죄조직이었다.
“블랙을 제거해야 하는 건 당연한데, 문제는 정계란 말이지.”
실장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 정계도 썩은 내가 만만치 않았다. 각종 불법사업으로 끌어모은 풍부한 자금력, 이 자금을 이용한 정계 로비, 그리고 정계의 암묵적인 허가를 통한 불법사업의 확장.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일본의 정보기관이나 검경이 지금까지 블랙을 손대지 못한 것도 툭하면 나오는 정계의 압박 때문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블랙과 손잡은 놈들이란 말이지.’
그는 지하 마켓으로 대표되는 무기와 아이템 거래상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블랙은 자금력이 풍부한 큰손이었다.
“적이 안팎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 결국 한국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건가?”
실장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북아 삼국, 특히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애증의 관계. 공해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양국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질색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외압이 들어올 겁니다.”
“블랙은 너무 비대해졌습니다. 솔직히 우리만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한국과의 공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거국적인 차원에서 보셔야 합니다.”
“중국 쪽도 한국이 빠진 동북아의 공조는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중국 때문에라도 한국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좌우에 앉은 부장들은 목소리를 높여 결단을 재촉했다. 잠시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쪽 요원들은?”
잠시 후, 실장이 모니터에 뜬 혜성의 사진을 응시하며 물었다.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한국 NSA가 철수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반도부의 책임자가 리모컨을 들어 모니터의 영상을 바꿨다.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도가 나왔다. 그리고 일본 쪽 요원을 상징하는 붉은 점 세 개는 5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삼각형 대형으로 떨어져 깜빡이고 있었다.
“밤안개라고 했나? 약은 놈. 공조를 조건으로 ‘천공의 검’과 ‘리제너레이션’을 요구하다니. 그놈들은 우리가 그걸 만든 걸 어떻게 안 거야?”
실장은 다시 이를 갈았다.
천공의 검.
인공위성과 드론기술을 접목한 신기술이었다. 특수위성으로 지상의 타깃을 포착하고, 고공의 드론으로 레이저를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오차는 타깃에서 10cm.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 정밀 기술의 결정체로서,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직 상용화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코드명 리제너레이션.
아직 일본의 기관에도 공개되지 않은 신형 아이템이었다. 개발 기간 5년, 소요된 예산은 무려 500억 엔에 이르렀다. 그런데 박무영이란 뻔뻔한 놈은 같이 블랙을 상대하는 조건으로 리제너레이션을 요구한 것이다.
“이건 완전히 우리가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꼴이잖아.”
쾅, 실장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주위 부장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크게 보셔야 합니다. 한국의 능력자들은 과거 우리보다 몇 수 아래로 취급당하던 레벨이 아닙니다. 이혜성으로 대표되는 젊은 능력자들은 여기에서도 최상위 랭커 수준입니다. 특히 블랙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들과 악연으로 얽힌 이혜성이 꼭 필요합니다.”
이번엔 일본 NSA의 차장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차장 단독으로 이런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 일본 NSA는 한국과 공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젠장. 이혜성. 언젠가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놈을 우리 손으로 살려줘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군.”
실장은 혜성의 사진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주위의 간부들도 굳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 일어났다.
“총리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하지. 이혜성의 부활. 천공의 검과 리제너레이션의 사용을 허락한다.”
실장은 냉기를 풀풀 풍기며 회의실을 나갔다.
“휴우.”
간부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국과의 공조에서 가장 큰 걸림돌을 넘은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리모컨으로 모니터의 화면을 바꿨다. 혜성이 유수혁으로 추정되는 자와 대치하는 모습이 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나왔다.
“지금의 유수혁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 이혜성, 넌 저 괴물을 어떻게 잡을 텐가?”
일본 NSA의 차장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내각정보조사실 제3 벙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 시설은 단순히 비상시에 몸을 피하는 곳이 아니었다. 열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때 사용될 최후의 보루 중 하나인 동시에, 외국에 알려지면 곤란한 각종 첨단 무기들을 통제하는 곳이었다. 그중 제3 벙커는 항공 자위대와 연계한 시설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전략 무기가 바로 천공의 검이었다.
“스탠바이. 코드……”
통제원들은 레이더와 각종 장비를 점검하며 대기했다. 준비 완료. 넓은 벙커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국제 부분을 총괄하는 부장이었다.
“실장님 허가가 떨어졌다. 당장 실행해.”
부장은 넥타이를 반쯤 풀며 벙커로 들어와 소리쳤다. 실장과의 긴급회의는 언제나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오케이.”
벙커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어딘가와 무전을 주고받는 소리, 거기에 각종 장비가 돌아가는 소리가 한데 섞여 작은 메아리처럼 울렸다.
곧 정면의 대형 모니터에 서울 광화문의 광경이 보였다. 각성자의 능력을 제한하는 신형 결계 구역. 모니터 우측에는 결계의 파장을 분석한 수치들이 스타워즈의 오프닝 자막처럼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멍청한 새끼들. 모든 결계에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소스가 있기 마련. 그 소스를 찾아 파괴하면 간단한 걸 갖고 이렇게 소란을 떨다니. 하긴, 다른 분야는 몰라도 첨단 위성 분야에서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니까.”
부장은 한국의 NSA를 떠올리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곧 광화문 근처의 한 빌딩이 포착됐다. 통제 요원이 위성의 줌 기능으로 옥상을 확대했다. 마스크를 쓴 괴한들, 어딘가로 생중계하는 각종 방송장비, 난간에 설치된 핸드폰 형태의 에너지원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통제 요원은 에너지원에 붉은 초점을 맞추고 타격을 준비했다.
“좌표 설정 완료.”
5분 후, 고공의 드론들이 타격 준비를 마쳤다. 고속으로 이동하는 능력자를 암살하는 건 무리였지만, 놈들의 에너지원처럼 좌표가 고정된 타깃은 그야말로 밥이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일본의 드론이 한국 영공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한국도 국가비상 상태였다. 접근 허가는 한국 NSA 국장의 직권으로 진즉 떨어져 있었다.
- 3…… 2…… 1…… 0!
잠시 후, 모니터에는 붉은빛이 번쩍였다.
***
천공의 검 발사 3분 전, 광화문 광장.
“난 한 명만 죽이라고 했지, 인당 한 명을 죽이라는 말은 안 했다고. 그러니 누구든 한 명만 죽여. 그럼 모두가 살 수 있을 거야.”
유수혁은 팔짱을 끼고 놀리듯 말했다. 놈의 눈은 혜성에게 고정된 상태. 즉, NSA 요원들이 직접 혜성을 죽여보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혜성 씨를……”
요원들은 당황해서 물러났다. 복면을 쓴 탓에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다들 목소리가 흐느끼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혜성은 광장 중앙에서 유수혁을 등지고 서 있었다.
“저 미친 새끼.”
혜성은 놈을 슬쩍 곁눈질했다.
‘결계에서 놈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어딘가에 결계의 에너지원이 있을 터. 폭탄으로 그걸 날려버려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시나리오 한 편이 그려졌다. 문제는 폭발에 다른 요원들이 휘말릴 수 있다는 것. 요원들이 피할 때까지 최소 30초 동안은 어떻게든 놈을 물고 늘어져야 했다.
‘할 수 없지. 미친 짓 좀 할 수밖에.’
혜성은 유수혁에게 몸을 돌렸다. 문득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