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악귀 (2)
광화문 광장.
“드디어 나타나셨군, 유수혁.”
혜성은 1시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NSA 요원들과 테러범들도 홀린 표정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특히 NSA 요원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역시 이혜성. 싸움은 능력이 아니라 기세지. 능력을 잃었어도 이런 얼빵한 놈들보다 훨씬 낫군.”
한 사내가 손뼉을 치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질긴 놈. 역시 살아있었나?”
혜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춤 물러섰다.
다만 놈의 복장이 좀 이상했다. 춥지 않은 날인데도 두꺼운 목티를 껴입고 있었다. 얼굴은 눈, 코, 입만 뚫린 하얀 가면과 큰 선글라스로 가렸고, 손에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뭐야? 뱀파이어야?’
혜성은 오래된 뱀파이어 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대낮에 외출할 때마다 온몸을 꽁꽁 싸맸는데, 지금 놈의 복장이 딱 그랬다.
“우리 대장을 왜……”
테러범 중 하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여기까지.
“난 악당이잖아. 약속을 지키면 악당이 아니지.”
유수혁은 혜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왼손을 슬쩍 휘둘렀다.
쿵, 따지던 테러범은 심장 부위에 큰 구멍이 뚫려 뒤로 넘어갔다. 무형검의 수법. 놈은 죽기 직전까지도 무형검을 감지하지 못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이 미친 새끼.”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
테러범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놈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틀어진 건 확실했다.
이 상황에서 테러범들의 선택은 하나. 파팟, 놈들은 일제히 산개해 흩어진 뒤, 유수혁의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쯧. 귀찮게 하는군.”
다시 유수혁의 손이 무성의하게 움직였다.
테러범들은 빛의 화살을 날리려는 찰나, 목에 뭔가 화끈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잠시 후, 테러범들의 머리는 목과 분리돼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제자리에서 허우적대다가 뒤늦게 뒤로 쿵하고 넘어갔다.
불과 1초. 놈은 손짓 두 번으로 AA급의 테러범들을 전멸시켰다. 그것도 시선을 혜성에게 고정한 상태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전보다 더 강해진 건가?’
혜성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놈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그만 멈추는 게 좋을 거야.”
혜성은 유수혁을 향해 가슴에 단 폭탄을 보이며 위협했다.
과연 놈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의 위협 때문은 아니었다.
“그깟 폭죽으로 뭘 어쩌려고? 지하 마켓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내가 그런 폭죽에 어떻게 될 거 같아?”
놈은 피식 웃으며 주위에 엉거주춤 서 있는 NSA 요원들을 둘러봤다.
백호와 NSA는 여러 차례 공조한 터. 서로 낯이 익었다.
“유수혁. 지금이라도……”
요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앗, 뭔가 번쩍였다고 느낀 찰나, 그도 머리가 목과 분리돼 떨어졌다.
“시끄럽군. 말은 내가 한다.”
유수혁은 떨어진 머리를 곁눈질한 뒤 다시 혜성을 바라봤다.
광장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자리에 있는 요원들은 모두 일반인과 마찬가지. 놈의 가벼운 손짓 하나면 테러범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게 뻔했다.
“계획을 바꾸겠다. 원래는 귀찮은 날파리들을 먼저 제거하고 너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네 그 무모한 모습을 보니 재미있는 게 생각났어. 우리 게임을 하나 할까?”
놈은 혜성과 요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
NSA 본부 임시 통제센터.
대형 모니터에는 광화문 광장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었다. 특수 위성으로 찍은 영상이었다. 각도가 제한적이었고 대화도 들리지 않았지만, 화질이 제법 선명해서 광장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유수혁? 유수혁이 저기에서 왜 나와?”
“혜성 씨의 폭주에 휘말려 죽은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테러범들을 죽이는 거야? 같은 편 아니었어?”
요원들은 모니터에 클로즈업된 적의 두목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인제 보니 놈은 은신 아이템을 쓰고 계속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다. 기괴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놈의 정체는 다들 쉽게 알아챘다. 기척도 없이 상대를 죽이는 건 유수혁의 전매특허인 무형검의 스킬이었다.
“유수혁 이 새끼. 정말 막 나가기로 한 건가?”
한진영도 이를 부득 갈며 모니터의 유수혁을 노려봤다.
“송도 연구소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소식이 없어?”
그는 옆에 있던 팀장에게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도 지금 비상입니다. 임시로 결계를 뚫는 장비를 급조 중인데, 한두 시간은 걸릴 것 같답니다.”
팀장은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길. 두꺼비 연구원도 사라지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진영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다가 집어던졌다. 실내 금연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의 장비들은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수 아이템들이었다.
그때였다.
“국장님.”
요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른 요원들의 눈치를 살핀 후, 한진영에게 귓속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
“뭐?”
한진영은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멈칫했다. 다른 요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건네받고 몸을 돌렸다.
“…… 네. 네. …… 그렇습니다. …… 하지만 현재 혜성 씨는 …… 아, 알겠습니다.”
말을 하는 건 주로 상대방이었다. 한진영은 평소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가끔 대답만 했다.
“VIP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잠시 후, 그는 경례를 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입니까?”
요원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혜성의 부활이라.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진영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뜻 모를 말을 나직이 반복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 의심, 걱정, 기대, 흥분 등 다양한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명령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현장에 요원들이 몇이나 있지?”
한진영이 옆에 있던 팀장에게 물었다.
“군경이 3,000. 우리 쪽 요원도 100명이 대기 중입니다.”
“그럼 우리 쪽 요원들은 다 철수시켜. 군경도 주위 통제를 위한 최소 인원만 남기고.”
“네? 현장을 포기하는 겁니까?”
팀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다른 요원들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포기는 아니야. 이제부턴 VIP 직속 요원들이 현장을 맡는다. 우리는 그들을 보조하며……”
한진영은 조금 전에 받은 명령을 간단히 설명했다.
통제실이 다시 바빠졌다. 광화문의 병력 배치현황을 재확인하고, 여기저기 무전을 날리고, 언론과 기타 유관 기관에도 협조를 요청하고. 팀장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이혜성 부활 프로젝트라니. 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그리고 일본 놈들은 또 왜 끼어든 거야?”
한진영은 통화 내용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가 전달받은 건 혜성이 부활하는 데 필요한 사전 작업 정도였다. 일단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광화문 광장.
“게임?”
혜성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지금 너희는 전부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싸움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 일반인들의 막싸움이 아니겠어?”
유수혁은 혜성과 다른 요원들을 힐끔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지금과 비슷한 상황의 영화를 봤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잘 반영했더군. 그러니 나도 그 영화처럼 한번 해보겠다.”
“뭐?”
혜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간을 5분 주겠다. 그 안에 누군가를 죽여라. 한 명만 죽이면 살려주마.”
“이 미친 새끼. 우리끼리 서로 죽이라는 거냐?”
“그렇지. 룰은 없다. 무기를 쓰든 이빨로 물어뜯든, 어떻게든 한 명만 죽이면 된다. 그럼 결계 밖으로 나가게 해주지. 이번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테니까 한번 믿어보라고.”
유수혁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킥킥 웃었다.
‘저 새끼가 지금 상황에서 농담이나 했을 리는 없고. 씨발, 어쩌지?’
혜성은 당황하며 다른 요원들을 곁눈질했다. 다들 난감하면서도 격앙된 표정이었다.
“씨팔!”
뒤에 있던 요원 중 하나가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동료 요원이 아니라 유수혁의 뒤통수를 노린 기습이었다. 능력을 잃었어도 고된 훈련을 받은 특수요원이었다. 일반인보다 몸놀림이 훨씬 가볍고 날카로웠다.
“쯧. 말귀를 참 못 알아듣는군.”
유수혁은 가면 뒤의 눈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무형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뭐, 뭐야?”
공격하던 요원은 돌연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거인에게 사지를 붙들린 것처럼.
유수혁은 본래 염동력을 지닌 능력자. 몬스터의 힘을 통해 무형검의 스킬뿐만 아니라, 염동력도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지금 너흰 뭔가를 선택할 입장이 아니야. 내 말을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유수혁은 공중에 뜬 요원을 노려봤다.
뿌득.
“끄아아아!”
요원이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가운데 그의 오른팔이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가 강제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리고 몇 초 후, 그의 오른팔은 잡아 뜯은 것처럼 어깨에서 분리됐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며 비린내가 진동했다.
“씨팔. 저 변태 새끼.”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산 사람의 팔을 뜯어내는 참혹한 광경. 속이 메스꺼워지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다른 요원들도 차마 공중에 붙들린 요원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다들 왜 이렇게 약해졌어? 겨우 이 정도에 눈을 깔다니. 이래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헌터들이라고 할 수 있겠어?”
유수혁은 비아냥거리며 다시 공중에 뜬 요원에게 눈길을 줬다.
요원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먼저 오른팔. 그다음엔 왼팔, 오른 다리, 왼 다리. 놈은 즐기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요원의 사지를 하나씩 뜯어냈다. 끝으로 머리.
“어때? 이제 좀 해볼 만해졌나?”
놈이 다시 혜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원의 머리는 혜성의 발밑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시뻘건 피부, 잔뜩 튀어나온 혈관, 튀어나올 듯 충혈된 눈 등. 죽은 요원의 고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같은 말 또 하게 만들지 마라. 난 인내심이 강한 편이 아니니까. 이제 남은 시간은 4분. 그 안에 누구든 한 명만 죽이면 살려주겠다. 만약 시간이 지나면……”
유수혁은 충혈된 눈으로 혜성과 요원들을 쏘아보며 말을 맺었다.
“그땐 죽는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