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30화 (130/150)

# 130. 악귀 (1)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옆.

“젠장. 정신없군.”

혜성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근처에서는 NSA 요원들과 테러범들 간에 전투가 한창이었다.

퍼퍼퍽, 각종 파편이 작은 알갱이가 돼 흩날렸다. 자칫하다간 눈먼 빛의 화살을 맞고 벌집이 될 판이었다.

‘이렇게 숨어 있어야 한다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AA급 능력자는 2차 각성을 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군의 발목을 잡는 짐이 돼 숨어 있었다. 능력을 잃은 게 새삼 실감 나고 안타까웠다.

그때였다. 이질적인 뭔가가 주위를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혜성은 흠칫 놀라며 위를 쳐다봤다.

언제부터인가 엷은 빛 무리가 광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반투명한 돔이 된 것처럼. 광장의 다른 능력자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게 뭐지?”

NSA 요원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했다. 갑자기 에너지가 모이지 않았다.

- 피해!

한 박자 늦게 핸즈프리에서 국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요원들은 가까운 엄폐물로 흩어졌다. 그러나 피하려는 건 마음뿐. 제법 날렵하긴 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하품이 날 정도로 굼뜬 움직임이었다.

“능력 상실?”

혜성은 뭔가를 떠올리며 경악했다.

자신의 어빌리티 캔슬링과 비슷한 수법이었다. 일정 구역 안의 능력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결계. 다만 구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능력을 무효화하는 자신의 능력과 달리, 테러범들은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놈들은 결계의 효과에서 벗어나는 아이템을 가진 건가?”

혜성은 미간을 좁히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크앗!”

NSA의 요원 하나가 비명을 길게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다.

특수 갑옷을 입었어도 몸은 능력이 없는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테러범이 뒤에서 쏜 빛의 화살을 등에 맞고, 트럭에 치인 것처럼 앞으로 몇 바퀴나 뒹굴었다. 갑옷 덕분에 몸이 뚫리는 건 막았지만, 화살이 갑옷을 맞히며 생긴 충격은 고스란히 요원에게 전달됐다.

다른 NSA 요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전투는 싱거울 정도로 순식간에 상황 종료. 10명이 쓰러지고, 남은 NSA 요원 20명은 머리에 손을 올린 채 무릎을 꿇었다.

“NSA도 별거 아니군.”

10여 명의 테러범은 무릎 꿇은 요원들을 걷어차며 낄낄거렸다.

퍽, 넘어진 요원은 이를 악물고 놈을 쏘아봤지만, 저항하거나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솔직히 요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테러범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역시 놈들의 기습은 주위에 매복한 요원들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나?’

놈들의 작전은 간단했다. 먼저 혜성을 공격해서 주위에 숨어 있는 NSA 요원들을 끌어낸다. 그다음 능력을 제거하는 아이템으로 요원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끝으로 ‘놈’이 등장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혜성을 제거한다.

놈들로서는 혜성도 제거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도 과시하는 작전이었다.

“어이, 이혜성. 그만 나오시지? 꼭 험한 꼴을 봐야겠어?”

중간 보스급으로 보이는 테러범 녀석이 세종대왕 동상 쪽을 향해 외쳤다. 부하들은 빛의 화살을 만들어 무릎 꿇은 요원들을 겨냥했다.

혜성은 망설이며 상황을 정리해 봤다. 지원팀은 모두 제압당한 상태. 결계가 있는 한 다른 지원팀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수 있는 대응은 하나.

“옛날 생각나는걸? 오랜만에 미친 척 한번 해볼까?”

혜성은 쓰게 웃으며 천천히 동상 앞으로 나갔다.

의외로 표정과 태도에 여유가 넘쳤다. 테러범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뒤, 은근슬쩍 넓게 퍼져 혜성을 포위했다.

“이야, 영웅을 이렇게 직접 뵈니 영광이군.”

두목은 혜성을 향해 짐짓 과장되게 인사했다.

다른 테러범들도 그를 비웃으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이어서 테러범 중 한 놈이 빈손을 들어 활의 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놈이 막 빛의 화살을 날리려는 찰나였다.

“귀여운 새끼들. 겨우 이런 걸로 기고만장하다니. 설마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지원팀만 믿고 여기에 왔을까?”

혜성은 피식 웃으며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풀었다.

“씨발. 저게 뭐야?”

“저, 저 미친 새끼.”

화살을 쏘려던 놈은 물론, 낄낄거리던 다른 놈들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풀린 셔츠 사이로 혜성의 가슴과 복부가 드러났다. 전투로 단련된 진짜 근육이었지만, 문제는 가슴과 복부에 붙어 있는 검은색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은 특수 케이블을 통해 그의 심장과 연결돼 있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멈추면 아이템이 곧장 반응하는 방식이었다.

“이그니스의 분노.”

두목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게이트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특수 폭탄이었다. 한번 터지면 반경 300미터는 초토화. 개발된 지 오래된 아이템이었지만, 그만큼 많은 전투에서 쓰이며 그 파괴력이 확실하게 증명돼 있었다. 아이템의 기운이나 표면에 작게 새겨진 일련번호 등을 봤을 때, 진짜 이그니스의 분노였다.

“그 미친 새끼라는 말은 여기 오기 전에 국장님한테 실컷 들었다고. 아무튼 아까 내가 안 죽은 게 다행인 줄 알아. 내가 죽었으면 광화문 광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을 테니까.”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이 새끼가 지금 어디서 이빨을 까는 거야? 협박하는 거냐?”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부하들을 둘러본 뒤 큰소리쳤다. 하지만 말과 달리 녀석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많이 연구했을 텐데? 정 못 믿겠으면 시험 삼아 죽여 보든지. 내가 장난으로 이러는 거 같아?”

혜성은 테러범들을 훑어보고 피식 웃었다.

“그거 터지면 너도 죽는 거 몰라?”

테러범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지. 하지만 어차피 난 오늘 은퇴한 몸이잖아? 너희 같은 악당들을 덤으로 잔뜩 데려가면,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거 같은데?”

혜성은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고 두목에게 다가갔다.

“이, 이 미친놈이.”

두목은 이를 갈고 욕을 퍼부으면서도 주춤 물러섰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놈의 이마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오지 마, 이 미친 새끼야!”

테러범은 요원의 목에 화살을 가까이하고 악을 쓰듯 외쳤다. 명령하는 건지, 통사정하는 건지, 녀석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제야 혜성은 걸음을 멈췄다. 물론 놈들의 협박 때문에 멈춘 건 아니었다.

“그놈은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서 구경하고 있겠지? 이런 어설픈 장난은 그만하고. 너희 뒤에 있는 놈 나오라고 해라. 그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아주 확실하게 보내줄 테니까.”

그는 테러범들을 협박하듯 낮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

광화문 광장 옆 B-28 대피소.

체육관처럼 생긴 넓은 공간에 수백 명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게이트 시대 이후, 새롭게 주목받는 산업 가운데 하나가 지하의 대피시설 건축 사업이었다. 좀 사는 부잣집마다 지하 벙커는 기본 옵션.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피소도 이중 콘크리트 구조에 며칠은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 자가 발전기, 긴급 통신망 등의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훌륭해도 대피소 특유의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놈들은 왜 이혜성만 찾는 거지? 오늘 은퇴한다고 했잖아.”

“뻔하지. 오늘이 이혜성에게 복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잖아. 개새끼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NSA가 모든 방송시설을 차단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딩동. 딩동. 사람들의 핸드폰이 일제히 크게 울렸다. 누군가가 단체로 보낸 문자였다.

“뭐지? 긴급 재난 문자도 아니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긴급. 이혜성의 광화문 전투 실황 생중계]

제목부터 평범한 스팸 문자였다. 그 아래에는 어딘가의 URL이 링크돼 있었다. 처음 보는 사이트였다.

“에이, 씨발. 이젠 별 이상한 문자가 다 오는군.”

대부분은 짜증을 내며 문자를 지웠다. 혹시나 하는 호기심에 URL을 누른 사람은 열에 한 명꼴. 문제는 그 한 명이었다.

“어라? 이거 진짠데?”

별생각 없이 URL에 접속했던 이들이 비명처럼 날카롭게 외쳤다.

“어디? 정말이야?”

곧 다른 이들도 URL을 누르거나, 이미 URL을 누른 사람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높은 곳에서 고성능 카메라로 촬영한 것 같았다. 광화문의 상황이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 오지 마, 이 미친 새끼야!

- 그놈은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서 구경하고 있겠지? 이런 어설픈 장난은……

광화문에서는 테러범과 혜성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전형적인 협박의 한 장면. 다만 지금 상황만 보면 혜성이 자폭으로 적을 위협하는 미치광이 악당, 테러범이 자폭을 막기 위해 교섭에 나서고 있는 요원이었다.

“지금 누가 누굴 협박하는 거야?”

사람들은 핸드폰을 통해 중계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광화문 광장.

“왜? 쫄려? 쫄리면 뒤지시든가.”

혜성은 놈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비아냥거렸다.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이 미친놈.”

두목은 아까부터 주춤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한다면 한다는 혜성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 협박이야?”

1시 방향, 테러범 하나가 악을 쓰며 혜성을 향해 빛의 화살을 날렸다.

“협박?”

혜성은 화살을 환영하듯 양팔을 큰 대자로 벌렸다. 피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쾅,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혜성의 가슴에서 일어난 폭발이 아니었다. 놈의 화살이 혜성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찰나, 두목이 급히 화살을 날려 막아낸 것이다.

“병신들. 죽긴 싫은가 보군. 그런 배짱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혜성은 테러범들을 둘러보며 혀를 길게 찼다.

화살을 쏜 놈이나 그걸 막은 놈이나. 다들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혜성은 요원들에게 살짝 눈짓했다. 요원들은 테러범들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일어났다.

“어, 어쩌죠?”

테러범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목만 바라봤다.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두목도 생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요원들이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고 천천히 결계 밖으로 나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퍽, 누군가가 목이 꿰뚫려 앞으로 쓰러졌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두목이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어느 틈에?”

모두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른 명 가까이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방금 두목을 어떻게 죽인 건지.

단 한 명, 혜성만 이런 혼란에서 예외였다.

“끈질긴 놈. 또 너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모든 걸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유수혁.”

혜성은 놈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