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컴백 (4)
광화문 광장 옆 H 빌딩 옥상.
검은 복면을 쓴 요원 4명이 눈을 빛내며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경찰 특공대와 비슷했지만, 중세 스타일의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게 달랐다. 그들은 난간 옆에 숨어 고성능 망원경과 카메라로 아래를 살폈다.
중앙 광장.
사람들이 모두 대피해서 을씨년스러운 가운데, 정장을 입은 혜성이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건이 터질 듯 긴박한 분위기였다. 다른 빌딩에 매복한 요원들도 모든 탐지 장비를 혜성 쪽으로 돌리고 주의를 집중했다.
- 혜성 씨. 혜성 씨. 야, 인마. 이혜성!
아까부터 국장의 낮고 긴장된 목소리가 귀에 찬 핸즈프리를 통해 들렸다. 워낙 크게 외친 탓에 귀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 혜성의 대답은 없었다.
“이상한데요? 우리 쪽 통신은 멀쩡한데, 혜성 씨의 통신만 끊기다니.”
통신 담당 요원 하나가 백팩에서 장비를 꺼내 확인했다. 그들의 장비는 이상 무. 다만 핸드폰 등 일반적인 통신장비는 모두 신호가 끊겨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전파교란이 아닙니다. 우리 쪽 통신을 잘 아는 누군가가 혜성 씨의 통신만 차단한 것 같습니다.”
다른 요원이 불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이번 사건의 배후에 우리 쪽 요원이 있다는 거야?”
팀장은 옆에 있던 요원을 힐끔 돌아보며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정부와 공조하는 길드 소속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호 같은.”
통신 요원은 긴장 탓에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호?”
복면 너머 팀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호 출신이자 정부 소속으로 숱한 임무를 수행했던 능력자. 하지만 너무도 강한 힘을 추구한 탓에 스스로 타락하고, 결국 혜성에게 맞서다가 쓰러진 자. 유수혁의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하긴. 그놈이라면 이런 일을 꾸미고도 남지.”
“하지만 놈은 죽었잖습니까? 혜성 씨의 폭주에 휘말려 시체도 못 찾고……”
다른 요원이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파팟, 뒤에서 돌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그들은 모두 혜성만 주목하던 상황이었다. 배후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반응할 수 없었다. 몸을 반쯤 돌리기도 전, 뭔가 번쩍하더니 그대로 시야가 아득해졌다.
쿵, 그들은 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잠시 후, 마스크를 쓴 사내들이 광장의 반대 방향에서 하나둘씩 나타났다. 숫자는 여섯. 광화문 근처의 승합차에 타고 있던 자들이었다.
“멍청한 새끼들. 이혜성만 신경 쓰면 뭐 해? 뒤쪽은 뻥 뚫렸는데.”
사내 중 누군가가 마스크를 벗고 죽은 요원들에게 가래침을 뱉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인데요?”
“아니면 첫 번째 폭발 때문에 머리가 굳었거나.”
다른 사내들도 죽은 요원들을 비웃었다.
부하들은 가져온 백팩을 열고 장비를 꺼냈다. 강력한 줌 기능을 가진 카메라와 삼각대 3대, 고성능 마이크, 전파 송출 장비 등. 방송국에서 쓰는 장비였다.
그들은 사전에 연습한 대로 NSA의 장비를 치우고 자신들의 장비를 재설치했다. 무대는 광화문 광장, 주인공은 혜성이었다. 워낙 고성능 장비인 탓에 수백 미터 떨어진 혜성의 표정이 선명하게 잡혔다.
그사이 두목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했다. NSA가 일대의 통신망을 전부 통제한 상태. 그는 특수 위성망을 통해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웹에 접속했다.
“1팀, 준비 완료. 2팀, 시작하라.”
이윽고 두목은 핸즈프리를 통해 ‘그분’에게 짧게 무전을 보냈다.
‘그분’이 원하는 건 단지 복수가 아니었다. 혜성을 죽이는 것만으론 ‘그분’의 성에 차지 않았다. 최종 목표는 혜성을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건재함과 위상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 화려한 복수와 귀환이었다.
두목은 백팩에서 아이템이 든 케이스를 꺼냈다.
혜성의 어빌리티 캔슬링에 영감을 받아 지하 마켓에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신형 아이템. 오늘을 위해 거금을 들여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다. 원래는 외부인에게 파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이혜성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인지 지하 마켓도 순순히 협조했다.
“자, 화려한 복수를 시작해볼까?”
두목은 히죽 웃으며 케이스를 열었다.
***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본부. 국장님. 레드 팀. 내 말 들립니까?”
혜성은 핸즈프리를 만지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통신망이 끊겼다. 놈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젠장.”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즈프리를 벗어 던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계획된 테러. 반면 자신은 은퇴식을 하다가 부랴부랴 현장에 투입된 상태였다. 이건 싸우기도 전에 주도권이 적에게 넘어간 셈이었다.
‘이 새끼들. 어딘가의 빌딩에 숨어 날 지켜보고 있겠지?’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훑어봤다.
도심 한복판. 사방에 고층 빌딩이 있었다. 아무리 NSA라도 급조된 지원팀으로 주위를 전부 감시하는 건 무리였다. 고요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콰쾅, 우측 대로변에서 다시 높은 불기둥이 솟았다. 아까보다 훨씬 큰 폭발.
“씨발!”
혜성은 깜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쾅, 불길에 휩싸인 승용차 두 대가 10미터 정도 솟아올랐다가 떨어져 박살 났다.
놈들의 2차 공격.
파팟, 동시에 어디선가 빛의 화살이 날아와 그의 어깻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실수로 심장 대신 어깨를 맞힌 게 아니었다. 의도된 위협이었다.
“젠장!”
혜성은 급히 세종대왕 동상 근처로 달려갔다. 자신의 은퇴식이 열리던 무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침 주최 측에서 가져온 각종 장비가 엄폐물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져 그 뒤에 숨었다.
콰콰쾅, 사방에서 빛의 화살들이 쏘아지는 가운데, 화살을 맞고 부서진 조각들이 우박처럼 흩어졌다.
‘이 새끼들. 내가 목표라면서 왜 날 단번에 죽이지 않는 거지? 혹시 뭔가 다른 목적이 있나?’
혜성은 동상과 엄폐물 사이에 몸을 바싹 기댔다.
그를 중심으로 광장 주위의 자동차들, 건물들, 각종 엄폐물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검은 그림자들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숫자는 최소 열둘 이상. 움직임을 보니 정면 공격보단 기습을 장기로 하는 암살자들 같았다.
‘국내에 이런 조직이 있었나?’
혜성은 언젠가 본부에서 봤던 국내 능력자 조직의 자료를 떠올렸다.
게이트 시대가 됐다고 조직범죄가 사라지진 않았다. 범죄자들이 일반적인 폭력배에서 능력자로 대체됐을 뿐, 마약, 밀수, 장기매매 등 영화에 나오는 범죄는 암흑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명한 건 혈의 누, 레드 오션, 광천하 등. 하지만 그들은 최근 혜성의 활약과 명성에 위축돼 활동이 뜸해진 상태였다.
그가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공격은 계속됐다. 놈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혔다.
퍼퍼퍽, 흩날리는 파편들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그의 주위를 감쌌다. 전쟁 영화에서 무차별 사격 때문에 주위의 기물들이 부서지는 장면이 연상됐다.
‘이대로라면 놈들의 공격에 당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능력을 잃은 마당에 갑옷 하나만 믿고 놈들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지?’
혜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한창 망설이던 때였다.
콰쾅, 어디선가 다른 폭발이 일었다. 그를 공격한 게 아니었다. 타깃은 혜성을 공격하는 정체불명의 테러범들. 매복해 있던 NSA 요원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
광화문 광장 동쪽 빌딩가.
평범하게 생긴 여자 한 명이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천면 여우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강지영이었다. 약 200미터 전방, 세종대왕 근처에서는 능력자들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탓에 일반인이 보면 검은 그림자들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휘유, 정말 요란하네. 일대를 아예 벌집으로 만들 작정인가?”
그녀는 휘파람을 나직이 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NSA 소속의 요원 하나가 기절해 쓰러져 있었다. 일대는 NSA와 경찰이 몇 겹으로 에워싼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SJ 기획에서 밤안개 다음으로 빠르고 은밀한 능력자. 포위를 뚫고 접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강지영은 쓰러진 요원의 핸즈프리를 뺏어 귀에 찼다. NSA의 통신이 나왔다.
NSA의 내부 통신망이 적에게 노출된 상황이었지만, 인제 와서 갑자기 통신망을 바꿀 수도 없었다. NSA는 울며 겨자 먹기로 채널만 변경해 기존의 통신망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 레드 팀, 1시 방향으로 이동. 블루 팀……
핸즈프리에서는 한진영의 목소리가 숨 가쁘게 흘러나왔다.
혜성을 지키려는 자들과 혜성을 죽이려는 자들의 전투.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한진영도 괜히 국장이 된 건 아니었다. 그는 본부에서 카메라로 현장을 보며 직접 지시를 내렸다. 현장의 지원팀도 NSA의 정예들답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혜성 씨가 관계된 일이라 국장도 초조해진 건가? 지원팀을 전부 내보내다니. 하긴, 그 양반이야 혜성 씨의 열렬한 팬이니까.”
강지영은 쓰게 웃다가 11시 방향의 고층 빌딩 옥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불쾌한 기운 여섯 개가 느껴지고 있었다. 등급은 A에서 AA 사이. 현장의 NSA 요원들과 비슷한 등급이었지만, 잠행과 암습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놈들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NSA 지원팀을 제거한 뒤,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단순히 방송 중계나 하자고 여섯 명이 투입된 건 아닐 테고. 또 뭘 하려는 거지?”
강지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과연 그녀의 짐작대로였다. 잠시 후, 혜성을 둘러싼 광화문의 전투는 뜻밖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
광화문 광장 옆 H 빌딩 옥상.
“NSA 놈들. 예상대로 미끼를 물었습니다. 역시 이혜성이 관련된 일이니 앞뒤 안 가리는데요?”
현장을 촬영하던 부하 녀석 하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른 녀석들도 낄낄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쉿, 두목은 녀석을 바라보며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방송에 잡음이 섞이면 안 됐다. 아차, 부하 녀석은 뒤늦게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슬슬 마무리해볼까?’
두목은 손에 든 아이템들을 내려다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 네 개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난간에 아이템들을 일렬로 배열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으로 방향을 맞추고, 사전에 숙지한 매뉴얼대로 팀원들에게 신호해 에너지를 주입했다.
부웅, 곧 아이템이 작게 진동하며 엷은 빛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빛은 아이템 위로 살짝 떠오른 뒤, 넓게 퍼지며 타깃이 되는 지점을 뒤덮었다. 지금까지는 이혜성을 끌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 사냥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