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컴백 (3)
경기도 광주시 외곽 PC 방.
“이야, 정말 이혜성이 은퇴하나 본데?”
“이제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나?”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졌다. 사람은 많았지만 보고 있는 화면은 하나. 다들 아쉬운 표정으로 혜성의 은퇴식을 보고 있었다.
제일 구석,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둘도 그런 손님 중의 하나였다. 막내와 한수호였다. 둘은 혹시 누가 눈치챌까 틈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명 이혜성 군단.
만난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둘은 혜성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였다. 혜성이 둘과 상의도 없이 은퇴하는 것도 아쉬웠는데, 그 은퇴식에 참석도 못 한다는 사실 때문에 목이 멨다.
“형. 괜찮아요?”
한수호가 막내의 어깨를 짚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막내는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수호가 합류하기 전부터 혜성과 팀을 이뤄 활동했다. 티격태격 다툰 적도 있었지만, 혜성의 은퇴가 누구보다 큰 빈자리로 다가왔다.
“괜찮아.”
막내는 손을 살짝 들었다. 물론 말뿐. 전혀 괜찮은 표정이 아니었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역시 우리가 갔어야 했는데. 꽃다발이라도 전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우리가 가면 형이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정말 윗분들께 보고하지 않아도 될까요?”
“두꺼비도 실종이라잖아. 누군지 모르겠지만, 비밀을 감추려는 자들은 기관 내부에서 넓게 퍼져 있는 거 같아. 단서를 잡을 때까진 장 팀장님 말대로 피해 있자고.”
막내는 재차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성자는 일반인보다 감각이 훨씬 발달했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둘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 으슥한 골목을 걸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다른 이의 발걸음 소리, 때론 몇 번 울렸다가 바로 끊기는 전화. 예민한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 며칠 동안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어? 저게 뭐야?”
“또 테러야?”
PC 방 곳곳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다.
혜성의 은퇴 기념식이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 한복판, 전세버스가 불에 타는 가운데 테러가 벌어진 것이다. 아직 큰 인명 피해는 없는 것 같았지만, 광화문 일대는 도망치는 인파로 큰 혼잡이 벌어지고 있었다.
“씨발!”
막내도 벌떡 일어나며 다급하게 외쳤다.
“어쩌죠?”
한수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막내를 올려다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쩌긴. 제로 프로젝트니 뭐니, 골치 아픈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형한테 가야지.”
막내는 재킷과 백팩을 챙겨 들고 급히 PC 방을 나갔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요금으로 알바한테 던지고. 한수호도 같은 차림으로 허겁지겁 뒤따랐다.
***
NSA 본부, 혜성의 은퇴식 현장.
천장에서 내려온 대형 스크린에는 광화문의 참상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기자들은 은퇴식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랴, NSA 관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랴 정신이 없었다. 혜성은 한진영과 함께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회견장을 빠져나왔다.
“대낮에 어떤 놈이 테러야?”
한진영은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수행원들과 함께 종종걸음으로 회의실로 가는 중이었다.
“아직 파악 중입니다. 다만 놈들이 혜성 씨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아는 내용. 한진영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럴 때 막내하고 수호가 있었으면.’
혜성은 국장과 함께 회의실로 향하며 둘을 떠올렸다.
둘은 며칠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태호를 통해 김연우에게 물어도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고만 할 뿐, 자세히 알지 못했다. NSA의 다른 직원들도 모르긴 마찬가지. 장진우와 함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했는데, 그마저도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10분 후, 본부에 남아 있던 팀장급은 전원 대회의실에 집합됐다. 혜성도 국장의 바로 아래 자리에 앉았다. 은퇴식은 흐지부지되는 분위기. 농담으로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 현 상황을 브리핑했다.
“……마침 근처에 대기하던 경찰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집계된 민간인 피해는 부상자 열 명. 폭발 규모에 비해 큰 피해는 아닙니다만, 대피하는 과정에서 집계되지 않은 부상자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테러 주체는 NG, 일명 Next Generation이라는 신흥 조직입니다만, 이 또한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NG 단독으로 나섰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배후에 다른 조직이……”
팀장의 브리핑은 장황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결국 모든 건 추측일 뿐,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놈들이 이럴 때까지 정보팀은 뭘 한 거야?”
쾅, 한진영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며 고함쳤다.
회의실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브리핑한 팀장은 어깨를 움츠리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놈들의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혜성 씨를 데려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보팀장의 시선은 혜성에게 향했다.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혜성을 바라봤다. 혜성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제가 나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혜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혜성 씨는 지금 현장에 나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잖아? 뭘 어쩌려고?”
국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습니다. 팀장급 요원이 혜성 씨로 위장해서 대신 나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특수팀을 먼저 투입하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팀장들도 난감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현장은 의욕만으로 나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괜한 공명심에 나섰다간 오히려 일을 더 크고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다들 이런 생각이었다.
“첫 폭발은 예고편. 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놈들은 더 큰 폭발을 일으킬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자들이 제 대역에 속아 넘어갈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혜성은 애써 담담하게 웃었다.
갑론을박.
- 일단 범인들의 요구대로 혜성이 나서야 한다.
- 아니다. 지금 혜성 씨는 일반인보다도 약한 상태다. 이건 죽으라고 등 떠미는 셈이다.
혜성의 말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몇몇은 혜성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대부분은 은퇴 선언까지 한 요원에게 테러 진압을 맡길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결국 남은 건 국장의 결단. 몇 분 후, 팀장들은 중앙의 국장만 쳐다봤다.
“하아.”
국장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혜성을 바라봤다. 혜성은 이미 각오가 됐다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았어. 일단 혜성 씨가 나서지. 대신 아이템 단단히 챙겨. 특수팀은 근처에서 대기, 무슨 일이 발생하면 혜성 씨의 신변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이윽고 국장은 팀장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혜성을 미끼로 하고 특수팀에게 맡긴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순직하고 싶을 때는 그렇게 안 되더니. 막상 살아보려고 하니까 순직 기회가 찾아온 건가?’
혜성은 아수라장이 된 광화문을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이 됐다.
***
광화문역 근처 대로변.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엔진을 켠 채 정지해 있었다. 테러가 벌어진 곳에서 200m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탓에 아무도 그쪽을 주목하지 않았다.
- 1단계 완료.
뒷좌석에 실린 특수 무전기를 통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케이. 이혜성이 나타날 때까지 잠시 대기하라.”
검은 마스크를 쓴 사내가 차 안을 힐끔 돌아본 뒤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뒷좌석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검은 마스크를 쓴 사내 셋이 앉아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자들까지 포함하면, 그까지 전부 여섯 명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혜성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부하 중 하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능력을 상실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혜성은 이혜성이었다. 놈의 똘끼 넘치는 과감한 행동은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혜성만 먼저 내보내고, NSA의 다른 요원들이 근처에 매복할 게 뻔했다.
“걱정하지 마. 놈을 상대하는 건 그분이시니까. 우린 그저 그분의 요구대로 놈을 불러와 판만 깔아주면 되는 거야. 그분은 복수를 완성해서 좋고, 우린 이 기회에 국내 최고의 조직으로 우뚝 서서 좋고. 잘하면 블랙의 빈자리도 꿰찰 수 있을 테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사내는 ‘그분’을 강조하며 히죽 웃었다. 그제야 다른 사내들도 두목을 따라 소리 죽여 웃었다.
블랙의 빈자리. 지하 마켓과의 새로운 커넥션.
호랑이가 없어졌다고, 숲이 평온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늑대 같은 다른 맹수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 숲은 언제나 약육강식의 법칙을 유지했다. 블랙이 사라졌다고 암흑가가 붕괴하지 않은 것처럼.
삐빅, 모두의 손목시계가 일제히 짧고 낮게 울었다. 4시 정각. 다음 행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자, 이혜성을 끌어내러.”
그들은 각종 장비가 담긴 백팩을 어깨에 걸쳐 메고 차례대로 승합차에서 내렸다.
***
4시 정각, 광화문 광장.
“어떤 놈들인지 요란하게 터뜨렸군. 차성진을 따라 한 건가? 그나마 대규모 집회라고 경찰이 대기하고 있어서 다행이군.”
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암흑의 수호자를 입고, 그 안에 특수 갑옷을 받쳐 입은 채였다.
도로에는 주인 잃은 차들만 가득했다. 그 많던 사람들은 경찰들의 통제 아래 근처의 비상 대피소에 분산 수용된 상태. 갑자기 인파가 빠진 탓에 을씨년스러웠다.
- 주위 통제 완료. 경찰은……
왼쪽 귀에 찬 핸즈프리에서 정보 요원의 보고가 들렸다.
경찰들은 직접 테러범을 상대할 수 없었다. 능력자들은 경찰이 총칼로 무장했어도 상대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아마 5년 전이었던가? 난폭한 AAA급 능력자를 상대하다가 경찰 사망자가 100명이 넘게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능력자가 관련된 테러가 발생하면 경찰은 주위 통제 및 인명 구조에만 치중하고, 테러범은 NSA나 CIC 소속의 능력자가 처리했다.
- 레드 팀 스탠바이. 블루 팀 스탠바이. 그린 팀……
이어서 다른 팀들의 교신이 차례로 들렸다. 지금까진 이상 무. 다들 순조롭게 근처 빌딩에서 대기했다.
“오케이.”
혜성은 짧게 대답하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은퇴는 반강제로 연기됐다. 그런데 의외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장 특유의 긴장감 때문에 흥분됐다.
‘난 현장이 체질인가?’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광장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다시 국장의 무전이 들렸다.
- 혜성 씨. 지금 상황은……
그때였다. 갑자기 지지직하는 잡음이 섞였다.
‘통신 교란인가?’
혜성은 멈칫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특별한 낌새는 없었다. 다만 NSA의 통신망은 이중으로 암호화된 상태. 내부인이 아니면 뚫을 수 없었다.
- 여어, 이혜성.
잠시 후, 핸즈프리에서 국장 대신 다른 이의 목소리가 나왔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한 어투였다.
“이 목소리. 설마?”
혜성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