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27화 (127/150)

# 127. 컴백 (2)

오후 1시 20분, 을지로 NSA 본부 공보실.

공식 기자 회견까지 4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공보실에는 벌써 전운이 감돌았다. 카메라와 마이크 등의 장비 체크, 조명 등 기자재 세팅, 예상 질문 정리. 기자회견은 준비과정이 더 길고 복잡했다.

“휘유, 이렇게 많은 기자가 모인 건 처음 아닌가? 이건 대통령 취임식 때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김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만원이었다. 국내 언론사는 물론, 외국 언론사의 기자들도 보였다. 몇몇 기자들은 핸디 캠을 켜고 공보실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었다.

“밖에 들어오지 못한 기자하고 BJ들은 더 많답니다. 광화문에서는 시민 단체들이 합동으로 기념행사를 연다던데요? 그것도 이곳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면서요. 그나저나 이혜성이 정말 은퇴하는 건가요?”

노트북을 점검하던 막내 기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겠지. 이미 사직서를 정식으로 제출했나 봐. 아직 승인은 안 떨어졌는데, 은퇴는 거의 기정사실이지.”

“아쉽네요. 이미지도 좋고, 책임감도 강하고, 인물도 훤칠하고. 언론이 좋아할 만한 건 전부 갖춘 히어로였는데. 나이도 젊고 말입니다. 유수혁도 몰락한 마당에 그런 히어로가 또 나올까요?”

“어쩔 수 없지. 블랙의 마스터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잖아. 우리 입장에서야 혜성 씨가 현장을 떠나도 계속 NSA에 남아주는 게 좋겠지만. 혜성 씨 개인을 생각하면 어디 좋은 곳에서 은퇴생활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김유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혜성이 은퇴함으로써 보장된 특종 거리가 사라지는 건 둘째 문제였다. 그녀도 기자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 국민 영웅의 은퇴를 안타깝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다른 기자들도 김유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회견을 준비하는 틈틈이 혜성의 빛나는 공적들을 되새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2시 정각.

혜성이 그의 시그니처인 검은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다만 오늘은 암흑의 수호자가 아니라 평범한 정장이었다.

“정말 부상이 심했나 본데?”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었나?”

기자들은 혜성의 얼굴을 살피며 작게 수군거렸다.

지하 마켓의 전투 후 일주일이 지났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 것 같았지만, 혜성의 얼굴은 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했다. 눈 밑도 퀭했고, 걸음걸이도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혜성은 격정을 삭이려는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공보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뒤이어 한진영과 NSA 소속의 변호사들이 들어와 혜성의 좌우에 앉았다.

혜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장내를 한번 둘러봤다. 어젯밤 몇 시간이나 연습했는데, 막상 현장에 오니 목이 멨다. 문득 기자들 중앙에 있는 김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얼굴을 보니 떨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202X년 X월 X일. 저 이혜성은……”

혜성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글을 꺼내 낭독했다.

기관의 변호사들과 밤새 준비한 담화문이었다. ‘지금까지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내가 떠나더라도 NSA는 항상 여러분의 곁에 있을 것이다.’ 무난한 내용이었다.

“저는…… 저는……”

혜성은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갑자기 헛구역질했다. 눈앞은 캄캄해졌고, 현기증이 난 듯 어지러웠다. 부상 때문은 아니었다. 외상은 이미 치료된 상태였다.

문득 태호에게서 처음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짙은 어둠 속에 떨어지는 느낌. 말로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준비된 생수로 입술을 축였다. 그제야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심호흡한 뒤 담화문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저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어진 기자들의 질의. 다행히 사전에 국장하고 입을 맞춘 상태였다. 변호사와 국장이 주로 대답했고, 그는 필요할 때만 단답형으로 덧붙였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단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다음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백호 등 다른 길드에서 백지수표를 제시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사실입니까?”

“그것도 아직 결정된 바가 없습니다. 여러 선택지 중 하나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정계진출 계획은 없으십니까?”

“그 또한 가능성을 열어두고만 있습니다.”

한진영은 혜성을 힐끔거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자들이 던진 질문은 전부 사실이었다. 사설 길드는 물론이고 방송계 쪽에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몇몇 대형 기획사들은 물밑에서 계약금만 수십억 원을 걸고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정계에서도 차기 대권 주자를 약속하며 스카우트 전쟁에 뛰어들었다.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 혜성은 능력을 잃었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가 은퇴한다고 국민 영웅이란 타이틀도 같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유로운 삶을 사는 일반 은퇴자와 달리, 그의 앞날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3시 정각.

남은 질문이 많았지만 예정된 회견은 여기까지였다. 혜성은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기자들이 가이드라인을 넘어 마이크를 내밀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달려와 떼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누군가가 혼란을 뚫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혜성은 뒤돌아 회견장을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쪽팔리게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결국 눈물이 핑 돌았다.

마지막 소감.

공보실에도 갑자기 정적이 돌았다.

그는 눈을 크게 깜빡여 눈물을 삭였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혜성은 기자들과 카메라들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그가 DDP에서 처음 언론의 카메라 앞에 섰을 때처럼.

***

같은 시각, 광화문 일대.

아침부터 차량이 전면 통제된 가운데, 태극기를 든 남녀노소 수만 명이 운집해 있었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부 단체의 태극기가 아니었다. 떠나는 영웅을 배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들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구석에는 방송국의 중계차들도 보였다.

- 이 시대의 영웅.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 이젠 대한민국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 당신이 어디서 무얼 하든 대한민국은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혜성을 기리는 대형 현수막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조금 설레발일 수도 있겠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혜성의 동상을 합성한 사진도 있었다.

이 시대의 참된 영웅.

방송 출연료를 전액 기부했다더라, 지금까지 받은 포상금도 대부분 유공 단체에 기부했다더라, 처음 찍은 CF가 공익광고였다더라 등등. 혜성에 대한 미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물질이 만능이 된 시대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혜성이 고고하게 빛났다.

“이혜성이 가면 이제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지?”

“그러게. 미국에는 슈퍼맨, 한국에는 이혜성 아니었어?”

“어쩔 수 없잖아. 개인의 선택과 행복도 존중해 주자고.”

시민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의 고군분투와 빛나는 업적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이 겪은 고초도 풍문으로 다 퍼져 있었다. 큰 별이 지는 것 같아 아쉽지만, 혜성 본인을 위해서는 손뼉 치며 보내줘야 한다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모두는 정면의 대형 스크린을 주목했다. 혜성의 은퇴 기자회견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혜성이 담화문을 낭독하다가 울컥하며 눈물을 삭이는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도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으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스크린에 혜성이 클로즈업됐다.

조용했다. 스크린 안 회견장의 기자들, 광화문의 시민들, 그리고 어디선가 지금 이 장면을 보는 다른 이들까지. 모두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혜성만 바라봤다.

이윽고 혜성은 몸을 돌려 카메라를 응시했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그는 눈물을 삼키며 거수경례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 그는 한참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시민들도 모니터 속 혜성을 향해 일제히 거수경례했다.

스크린의 영상이 바뀌었다. 스크린 옆에 있는 카메라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훑고 지나갔다. 숙연한 분위기. 대부분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눈시울을 적셨고, 몇몇은 아예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이어서 혜성의 전투 영상 하이라이트가 스크린에 나왔다. DDP, 방송국, 명동, 신촌, 인천대교, 63스퀘어, 제주도 등. 혜성은 수많은 적과 사투를 벌였고, 그때마다 아슬아슬한 역전승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 Good bye, Hero.

영상은 혜성이 거수경례하는 모습에 이런 자막을 입혀 마무리했다.

이윽고 혜성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회견장을 나갔다. 하지만 광화문의 행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다음으로 나이 지긋한 노시인이 연단에 올랐다. 장엄한 분위기의 음악을 배경으로 혜성을 위한 시를 낭독하는 순서였다.

“하늘의 별이……”

그런데 노시인이 막 제목을 말하려는 찰나였다.

콰쾅, 어디선가 큰 폭발이 터졌다. 귀가 얼얼한 폭음, 뿌연 연기,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 전형적인 능력자의 테러였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광화문에서 NSA 본부로 가는 방향, 지방에서 사람들을 태워 온 관광버스들이 검은 고물이 돼 주저앉아 있었다.

“뭐? 이혜성이 은퇴한다고? 누구 맘대로? 당장 이혜성 데려와!”

폭연 속에서 사내의 거친 외침이 들렸다.

***

SJ 기획, 소회의실.

- 꺄아아! 사람 살려!

모니터에서는 광화문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아비규환. 좁은 공간에 수만 명이 밀집한 탓에 그만큼 혼란도 컸다.

“이혜성 때문에 꼬리를 내린 놈들은 많았지. 지하 마켓과 블랙마저 그에게 번번이 당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반대로 말하면, 이혜성만 잡으면 단숨에 암흑가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어중간한 위치의 조직에게는 이혜성이 은퇴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박무영은 팔짱을 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광화문의 테러를 예상했다는 투였다.

“혜성 씨에게 빚을 진 놈들도 한둘이 아니고 말입니다.”

옆에 있던 한수은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만 그들은 테러를 예상하고도 막을 수 없었다. 최근 그들의 정보력은 블랙과 지하 마켓에 집중돼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무슨 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 그들로서는 테러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한편, 테러를 최대한 빨리 종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영웅은 되기도 어렵지만, 물러서는 것도 어렵지. 은퇴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은퇴하는 게 아니거든. 영웅의 숙명이랄까?”

박무영은 웃으며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을 들었다. 광화문 사고 현장의 실시간 자료가 도착해 있었다.

“화려한 은퇴식. 언론과 대중의 관심. 판은 제대로 깔린 셈이군. 어디, 영웅의 귀환을 한번 볼까?”

그는 태블릿에 암호를 입력하고 자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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