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컴백 (1)
태호의 병원 검사실.
혜성은 전신에 특수 센서들을 주렁주렁 달고 MRI 같은 기계에 들어갔다. 윙,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유리창 너머에는 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외상은 완치됐어.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을 거야. 물론 근손실이나 현기증 등 몇 가지 후유증이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며칠만 푹 쉬면 없어질 거야.”
태호는 작은 마이크에 대고 혜성의 상태를 설명했다.
문제는 외상이 아니라 에너지였다. 혜성은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한계치를 넘는 힘을 한꺼번에 받아들인 상태였다. 가짜 우민창과 좀 다르긴 했지만, 수용량을 넘는 에너지로 인해 단전이 깨져 있었다.
다만 원래 그의 병은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활동으로 생긴 것이었다. 단전의 에너지가 사라진 덕분에 시한폭탄 같은 불치병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힘을 얻으니 병도 얻었고, 힘을 잃으니 병도 잃었다. 정말 병 주고 약 주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혜성은 기계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쓰게 웃었다.
능력상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분노, 자기 부정, 좌절과 절망. 혜성은 처음 불치병의 진단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혼자 불 꺼진 병실에 앉아 눈물을 흘리기를 몇 시간. 능력을 잃고 은퇴한 전직 헌터들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이해가 됐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혜성은 재활치료실로 향했다. 태호가 부축하려 했다.
“아니야. 나 혼자 갈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능력을 상실하고 일반인으로 돌아온 탓일까? 몸이 무겁고 힘이 없었다. 마치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하지만 앞으로는 이 감각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데 혜성이 한창 치료실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반대편에서 빛을 등지고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네 명이 멀찌감치 떨어져 뒤에서 대기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혜성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둘을 바라봤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혜성아.”
두 사람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둘 중 작은 그림자의 몸이 충격 때문에 휘청거렸다. 우측에 있던 남자의 그림자가 작은 그림자를 황급히 부축했다.
“미안하다. 내가 연락드렸다. 또 너 혼자 전부 안고 갈 생각은 하지 마라. 너도 가끔은 다른 사람한테 기대고 위로도 받아.”
옆에 있던 태호가 그의 어깨를 치며 억지로 웃었다.
혜성은 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격정을 삭이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파마머리 아줌마와 고지식하게 생긴 아저씨. 혜성과 비슷하게 생긴 분들의 얼굴이 점점 뚜렷해졌다.
***
A 신문사 사회 1부.
“팀장님. 그 소식 들으셨어요?”
막내 기자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김유진은 창가의 자리에 앉아 오후에 내보낼 기사를 검토 중이었다.
“무슨 소식?”
그녀는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막내 기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막내 기자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이혜성이 은퇴한다는 소식이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김유진이 아니라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기자가 소리쳤다.
‘어디서 카더라라도 들었나?’라고 여기는 표정이었다. 김유진도 황당한 표정으로 막내 기자만 바라봤다.
“제 여자친구의 남동생이 태호 씨 병원에서 일하거든요. 그런데 이혜성의 부상이 심상치 않나 봐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요즘 재활치료를 집중적으로 받는대요. 어쩌면 은퇴할 수도 있고요. 이미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는 소문이 파다해요.”
막내 기자는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의료 종사자는 환자의 개인정보를 철저히 지켜야 했다. 하지만 루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국민 영웅 이혜성. 태호나 NSA가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고 해도 어디선가 새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혜성과 관련된 일급 정보를 일부 언론사에 팔면, 그깟 벌금의 수십 배는 벌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신문사는 대번 난리가 났다.
“정말 은퇴하는 건가?”
“일단 사실관계 먼저 확인해봐.”
“지금 그거 따질 때야? 특집기사 먼저 내보내자고.”
각자의 정보원이나 지인에게 연락하는 기자, 인터넷 익명 게시판을 뒤지는 기자, 태호의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외출을 준비하는 기자 등 반응도 다양했다.
“안 되겠다. 나도 직접 병원에 가 봐야겠어.”
김유진도 급히 재킷과 가방을 챙기고 나섰다.
“연우나 막내 요원은 연락도 안 되고. NSA의 브리핑도 계속 연기되고 있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녀는 답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SJ 기획, 소회의실.
“이혜성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니? 그게 어떻게 된 거야? 언론은 우리가 확실하게 막고 있었던 거 아닌가? ……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어떻게든 막아!”
박무영은 전화를 거칠게 끊고 옆을 바라봤다. 그가 이런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초 유포는 언론사 쪽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혜성의 정보를 캐내 언론사에 흘린 것 같습니다. 어젯밤에 발견된 겁니다.”
한수은은 난감한 표정으로 사진들을 내밀었다.
사진에는 NSA의 요원이 가슴이 뚫려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혜성의 정기 동향 보고서가 피 묻은 채 보란 듯이 버려져 있었다.
“아무리 태호의 병원이 외부에 노출됐다지만, 이런 짓을 개인이 했을 리는 없고. 어떤 조직이야?”
박무영은 사진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혹시 블러디 클로버라고 아십니까? 과거 국제 자유주의 해커 연합에서 출발한 단체인데, 몇 달 전부터 갑자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한수은은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붉은 금속으로 만든 클로버 조각이 죽은 요원의 옆에 버려져 있었다.
“블러디 클로버?”
“네. ‘게이트 시대 이후 각국의 정보국에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에게 밝혀져야 하며, 그 진실을 판단하고 감당하는 것은 온전히 대중의 몫이다.’라고 주장하는 조직입니다. 얼마 전 미국 국방부와 CIA를 털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미친놈들이군. 때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야. 국제적인 조직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가만 놔뒀어?”
“놈들은 한두 명이 아니고, 해외 곳곳에 근거지를 두고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외국 정보국들도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엔 인터넷뿐만이 아니라, 이런 상징을 남기며 외부 활동도 개시했다고 합니다.”
한수은은 블러디 클로버에 대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젠장. 블랙을 상대로 겨우 우위를 점했다 싶었더니. 여기저기서 터지는군.”
박무영은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훑어봤다.
그녀의 설명대로였다. 조직 형태, 구성원, 위치 등은 전부 극비. 러시아와 미국의 대부호가 후원하고 있다는데, 그마저도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다만 블러디 클로버의 소행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상징은 그들의 것이 맞는데, 행동 스타일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좀 다릅니다.”
한수은은 보고서를 힐끔 쳐다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다른데?”
“블러디 클로버는 정보를 빼가는 데 집중할 뿐, 이번처럼 불필요한 살인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징을 남기는 것도 드물고 말입니다. 정말 블러디 클로버의 소행이 맞는지, 아니면 그들로 위장한 다른 자의 소행인지는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덧붙였다.
“혹시 블랙의 잔당이 놈들을 내세워서 이번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또는 블랙의 잔당이 일을 꾸미고 놈들에게 덮어씌우거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블랙과 블러디 클로버의 연합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습니다.”
“아무튼 난감하게 됐군.”
박무영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혜성이 능력을 되찾게 할 방법은 있었다. 다만 그걸 준비하는 와중에 블랙인지 블러디 클로버인지 불분명한 놈들이 혜성의 소문을 터뜨린 것이다.
“이혜성은 능력자로서도 훌륭했지만, 국민 영웅이란 상징성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어.”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 미국에 슈퍼맨과 배트맨이 있다면, 한국에는 국민 영웅 이혜성이 있다.
인터넷에 유행처럼 떠도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마냥 농담만은 아니었다.
혜성의 등장 전후, 능력자가 관련된 범죄의 발생률을 비교하니 무려 60%나 감소했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잠재적 범죄자들이 국민 영웅이라는 이름값에 주눅 든 덕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영웅이 갑자기 부상으로 은퇴한다? 능력자가 관련된 범죄들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게 뻔했다. 배트맨이 나오는 영화에서 배트맨이 은퇴한 이후 엉망이 된 도시가 떠올랐다.
“능력자들의 범죄가 여기저기서 터진다면, 우리와 NSA, CIC는 한동안 블랙에 집중할 수 없게 되겠지. 블랙의 노림수도 바로 그것이고. 국내를 어수선하게 만든 뒤, 일본이나 중국에서 조직을 재정비한다. 아주 약은 놈들이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은퇴한 혜성 씨를 기습해 죽이는 것으로 확실히 마무리할 겁니다.”
한수은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놈들의 속셈이 뻔히 보여. 문제는 이미 혜성의 은퇴 소식이 사방에 퍼진 상황이라는 것. 알면서도 대응하기 애매하군.”
박무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계속 생각했다.
일부 신문사는 벌써 혜성의 은퇴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기사화하고 있었다.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서는 99% 확정이라는 말이 있었고, 태호의 병원에서 혜성과 혜성의 부모님이 얼싸안고 울었다는 증언도 터졌다. 아무리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정보기관이라도 이걸 막는 건 무리였다.
그때였다. 뭔가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도 영화 한번 찍어볼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수은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한동안 혜성 씨의 활약이 심심했잖아? 그러니 오랜만에 영화처럼 멋진 활약상을 만들어보자는 거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되는 국민 영웅의 눈물겨운 은퇴식. 그런데 그곳에서 터진 예상치 못한 사건. 국민 영웅의 부활과 대활약. 히어로 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거잖아? 뭐, 여기에 미녀의 키스라도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지. 주연 이혜성, 각본 밤안개, 연출 한수은.”
박무영은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아. 요즘 영화 리부트가 유행이던데. 우리도 이혜성 프로젝트를 리부트하자는 겁니까? 덤으로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여러 의혹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입니다.”
그제야 한수은도 뭔가를 깨닫고 가볍게 웃었다.
문득 혜성이 처음 2차 각성했을 때가 떠올랐다.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악당들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던 모습.
“이혜성 부활 프로젝트,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박무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