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그 후 (4)
늦은 오후, 을지로 근처 커피숍.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셋이 구석에 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장진우와 막내, 한수호였다. 그들은 미행이나 잠복을 의식한 듯 대화 틈틈이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커피숍에는 그들 외에 다른 손님이 없었다.
“시텐노라고 했나? 일본 쪽 길드 말이야. 어떻게 됐어? 물론 우리야 두 사람의 귀환이 대환영이지만, 그쪽도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을 것 같은데.”
장진우는 막내와 한수호의 계약을 떠올리며 물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픕니다. 일단 아는 기자 누나를 통해 변호사를 소개받았는데. 어쩌면 국제 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시텐노가 블랙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심증은 있는데, 일단 서류상으론 완벽하지 않습니까? 태호 형님도 비슷한 상황으로 곤란한 것 같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위약금과 아버지의 치료비야 국민 성금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만, 계약은 계약이었다. 법에 무지한 그가 생각해도 뒤처리가 상당히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았다.
“NSA에서도 법률 전문가들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국민 영웅의 왼팔과 오른팔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장진우는 둘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제로 모 신문사에서 주관한 그들의 후원에 거금이 몰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장진우는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들이 이렇게 몰래 만난 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송도의 두꺼비 연구원은 이틀째 연락이 두절됐고. 국장님한테도 이번 사건과 제로 프로젝트에 대해 보고했는데, 그다음엔 감감무소식이야. 내가 국장님께 두 번이나 면담을 요청했는데도 다 거절당했고 말이야.”
장진우는 NSA 상부의 분위기를 간단히 전했다. 뭔가 은폐하려는 것 같았다.
“감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수석 조사관이 와서 형을 다시 청문회에 세울 것처럼 하더니, 형의 영상을 보고 당황한 것 같더라고요.”
“맞습니다. 이건 자기들 선에서 처리할 수 없다나? 조사관들끼리 한참 쑥덕거리더니 슬그머니 얘기가 사라졌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도 낮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찰 쪽뿐만이 아니었다. 막내는 다른 부서에 있는 동기와 선후배에게 전부 연락해 봤지만, 하나같이 모르겠다는 대답만 하며 그를 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엄청난 거물급 인사가 위에서 우리를 막고 있는 것 같아. 국장의 입도 막을 정도니까, 최소한 국장급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NSA 국장급은 공무원으로 치면 차관급 아닌가요? 그 윗선이라니. 그럼 장관, 총리, 대통령밖에 없지 않습니까?”
막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상황엔 항상 정부 차원에서 엄청난 음모가 끼어 있던데. 혹시 우리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몇 달 뒤에 이름도 모르는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든지.”
한수호는 불안한 표정으로 어깨를 살짝 떨었다.
음모론. 정부의 비밀 조직. 비밀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행방불명과 죽음. 스파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였다.
“그건 영화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사람을 함부로 죽여 입을 막겠나?”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마냥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의 입을 막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그의 예상대로 엄청난 윗선이 개입돼 있다면 더더욱.
‘혹시 밤안개가?’
장진우는 잠깐 박무영을 떠올렸다.
천하의 밤안개도 죽은 것으로 위장해 속한 조직. 그들이라면 국장의 입을 막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 우리도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은퇴한 선배들을 만나보지. 혹시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거든.”
장진우는 불안을 떨치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럼 저흰 인터넷을 뒤져 보겠습니다. 물론 놈들이 자료를 다 삭제했을 테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단서라도 조금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블러디 클로버라고 했나요? 듣자 하니 요즘엔 무정부 자유주의 해커 그룹이 있다던데. 운이 좋으면 그들과 연이 닿아 뭔가 알 수도 있고요.”
“앞으론 이걸 사용하자고. 무슨 일이 없어도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단축 번호 1이야.”
장진우는 옆에 놓인 백팩에서 구형 스마트폰을 꺼냈다. 추적 방지 프로그램이 설치된 대포폰이었다.
“알겠습니다.”
막내는 재차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나저나 혜성 씨는 어때?”
장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화제를 돌렸다.
“태호 형 실력 아시잖습니까?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과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태호 형 말로는 부작용이 영구적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
“심각한 부작용? 그게 뭔데?”
장진우는 대번 표정이 어두워져서 되물었다.
“그게……”
막내는 옆에 앉은 한수호를 쳐다보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한수호는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 돼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형은 능력자로서……”
막내는 재차 한숨을 내쉰 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태호네 병원 옥상.
혜성은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봤다. 맑은 하늘 아래 우뚝 솟은 고층 빌딩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매연을 뿜으며 느릿하게 움직이는 자동차들. 오늘도 세상은 평화로웠다. 혜성 본인만 빼고.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전투로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이 보였다, 폭주한 유수혁, 회색 마스터, 드래곤 등 지하 마켓에서 연달아 치렀던 전투들이 꿈만 같았다.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던 탓에 아직도 머리가 좀 멍했다. 회색 마스터의 마지막은 혜성의 기억에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드래곤에게 허무하게 당하고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것까지. 그다음부터는 내면의 다른 인격이 나서 싸운 것처럼 몽롱했다.
그는 회색 마스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처음에 놈은 퍼스트 게이트의 비밀을 감추려고 했었지. 그런데 지하 마켓에선 갑자기 태도를 바꿔 순순히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했고. 놈은 왜 생각을 바꿨을까? 혹시 놈이 블랙에서 버림받은 것과 관련이 있을까? 그리고 놈은 내 능력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눈치였는데. 어째서였을까?’
역시 생각할수록 의문만 커졌다. 회색 마스터의 죽음은 시작. 곧 더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아 불안했다.
‘놈이 정말 죽었을까?’
그는 폭주가 끝난 후의 지하 마켓을 떠올렸다.
공간 결계가 무너질 정도로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 드래곤마저 소멸했으니 이론상으로는 회색 마스터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회색 마스터가 어딘가에 살아서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은 블랙은 어떻게 됐을까? 블랙의 주력은 일본에 있다던데……’
그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또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뭘 그렇게 보고 있냐? 넌 아직 환자라는 거 잊었어? 하여튼 의사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니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악의 없는 욕설. 태호였다.
“왔냐?”
혜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성으로 물었다.
“혼자 세상 고민 다 짊어졌냐? 아직 몸도 성치 않은 놈이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녀석은 옆으로 다가와 혜성의 어깨를 툭 치며 컵을 내밀었다.
혜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컵을 받아 단모금에 비웠다. 아이스커피라면 좋겠지만, 각종 영약을 조합해 만든 치료약이었다. 속에서 대번 구역질이 올라왔다.
“NSA에는 보고했냐? 네 상태 말이야.”
“아니. 막내하고 수호한테만 귀띔했어. 나중에 본부에 가서 내가 직접 보고하려고. 아직 내 상태가 확실해진 것도 아니니까.”
혜성은 착잡한 눈으로 빈 컵을 내려다봤다. 홀가분, 아쉬움, 미련, 분노 등 만감이 교차했다.
“원래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이잖아. 좋게 생각하자. 각성 능력 대신 생명을 얻었다고. 덕분에 너도 이번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게 됐잖아.”
태호는 그를 향해 과장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네 말대로 정말 제주도에서 개나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야 하나?”
“그거 좋지, 외로우면 말해. 나도 연우 씨랑 제주도에 내려가서 작은 병원이나 개업할 테니까.”
“징그러운 새끼. 제주도까지 따라와서 잔소리하려고?”
혜성은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게이트, 던전, 몬스터, 블랙. 조금 전까지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것들이 문득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내려가자. 또 운동해야지?”
태호는 그의 등을 툭 친 뒤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또 시작이냐?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지겹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따라 옥상을 내려갔다. 능력자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힘 있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힘없이 걷는 게 완연한 일반인 병자의 걸음걸이였다.
***
병원 밖.
“전문가들은 능력자의 몸을 이렇게 비유하더군. 단전은 흙으로 빚은 커다란 항아리요, EF로 대표되는 에너지는 그 항아리에 담긴 물이다. 보통 사람의 에너지는 항아리의 10%도 채우지 못한 상태. AAA급 능력자라도 항아리에 담긴 용량은 50% 남짓이라는 게 정설이지. 그런데 갑자기 항아리의 용량보다 몇 배나 많은 물이 채워지면 어떻게 되겠어? 당연히 항아리가 깨지지 않겠어? 게다가 그 항아리는 접착제로 대충 붙이거나 다시 만들 수도 없지.”
선글라스를 낀 사내는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혜성의 동향을 정기적으로 브리핑하는 보고서였다. 언뜻 들으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의 혼잣말이었다.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혜성도 마찬가지야. 깨진 항아리. 몬스터의 힘은 한꺼번에 대량으로 흡수해선 안 되거든. 특히 놈이 흡수한 건 드래곤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최강의 힘. 항아리의 용량을 키우며 점진적으로 흡수해야 했지. 쯧쯧.”
그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봤다.
검은 정장을 입은 요원이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 쓰러져 있었다. 그는 피 묻은 보고서를 요원에게 툭 던졌다. 그리곤 재킷 안주머니에서 붉은 금속으로 만든 네잎 클로버를 꺼내 보고서 옆에 던졌다. 블러디 클로버라고 했나? 최근 블랙의 뒤를 캐고 다니는 신흥 해커 그룹의 표식이었다.
“NSA 새끼들. 엉뚱한 놈들을 쫓느라 바빠지겠군. 크크크.”
그는 죽은 요원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능력을 상실했어도 이혜성은 이혜성. 다른 조직의 소행처럼 위장하는 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마무리를 해야지. 덤으로 그 찰거머리 같은 클로버 놈들도 제거하고 말이야.”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