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24화 (124/150)

# 124. 그 후 (3)

송도 연구소 지하 주차장.

따르릉, 화재경보기가 길고 긴박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함, 바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잠시 후,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하나가 주위를 살피며 승용차에 올랐다.

“이게 무슨 짓인지 원. 내가 졸지에 스파이라도 된 것 같군.”

사내는 투덜거리며 모자를 벗었다. 안경을 쓴 두꺼비 연구원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백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작은 외장 메모리를 꺼내 연결했다. 전원을 켜자 기관에서 쓰는 보안 프로그램이 떴지만, 외장 메모리의 해킹 프로그램에 곧 뚫렸다.

“제로 프로젝트라. 그게 왜 장 팀장의 입에서 나온 걸까?”

두꺼비는 외장 메모리의 비밀 폴더에서 ‘이름 없음’이라 쓰인 폴더를 열었다.

그사이 화재경보기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이것도 해 보니까 재미있는데?”

두꺼비는 히죽 웃으며 20분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화염계 아이템으로 연구소 서쪽의 화재경보기를 울린 뒤, 보안팀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런 뒤 두꺼비는 연구원들을 불러모아 만약에 대비해 자료를 백업하는 척했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라깽이가 지하 자료실에 잠입했다.

끝으로 사소한 소동이었음이 밝혀졌고, 두꺼비는 말라깽이에게서 자료를 몰래 받아 유유히 퇴근했다.

고전 스파이 영화에서 한두 번쯤 써먹은 수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아무튼 멸치 녀석. 시킨 대로 잘했군.”

그는 히죽 웃으며 폴더를 열고 암호를 입력했다. 화면이 몇 번 깜빡이더니 바뀌었다. 폴더 속에 사진 파일들이 수백 장 나타났다. 보고서를 빼돌리는 게 무리인 탓에 초소형 카메라로 보고서를 한 장씩 촬영한 것이다.

[제로]

첫 번째 사진은 1급비라고 적힌 파란 서류철이었다. 제목 아래에 몇 가지 주의사항이 나왔지만 무시했다. 그는 사진을 넘겨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찍어 초점이 안 맞고 중간에 빠진 것도 있었지만,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도 아는 내용이 나왔다. 퍼스트 게이트의 등장, 한미연합군의 조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파장의 발생, 이어서 파장에 호응하듯 일부 사람에게 나타난 특수한 병, 일명 게이트 병의 등장. 그리고 게이트 병 환자 중 일부의 특수 능력 자각까지.

여기까지는 세상에 알려진 대로였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각성자들의 가능성을 확인한 군과 정보국 관계자들은 위험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 특수 능력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군과 정보국에 배치하면 어떨까?

이건 비단 한국과 미국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어서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 등 다른 나라에도 하나둘씩 게이트가 나타났고, 이를 확인한 다른 나라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 세상이 변했다. 게이트 시대에는 각성자가 곧 군사력이다.

냉전 시대에 버금가는 소리 없는 각축전이 시작됐다. 특히 환태평양에 걸친 강국들은 군사적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긴, 영화에서나 보던 초능력자들이 실제로 나타났으니까. 인권이고 뭐고 일단 저지르고 봐야지. 어라?”

두꺼비는 쓰게 웃으며 읽어 내려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서의 흐름대로라면 다음에는 정부가 각성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을 했느냐가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 부분에는 글자 대신 사인펜으로 시커먼 줄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말라깽이가 실수했을 리는 없는 터. 분명 누군가가 고의로 지운 흔적이었다.

“이 새끼들, 대체 어떤 실험을 자행한 거야?”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사진을 빠르게 넘겼다.

타고난 연구원인 탓에 군의 연구 자료에 관심이 많았다. 입맛을 다시며 한참을 넘기니 다시 일부 대목이 손상된 사진이 나왔다.

“……xx년 x월 x일. …… 실험체 C-320D, F-865E, H-987R의 인위적 융합 성공…… 자연계 속성, 몬스터, ……의 마스터.”

두꺼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드문드문 쓰인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문득 입이 바싹 탔다.

“…… 그들은 정부의 기록에서 사라진 자들 …… 따라서 그들의 새로운 코드명 …… 블랙. 뭐? 블랙?”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어두컴컴한 주차장 구석.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씨발, 이게 뭐야? 정부에서 실험을 통해 블랙을 만들었다는 거야?”

두꺼비는 심호흡해 흥분을 가라앉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는 심장 부위를 쓸어내리며 사진을 넘겼다.

“……VIP 산하 ……기관, 제로 프로젝트 계속 진행…… 실험 대상을 민간인으로 확대 …… 카피와 증폭의 반복을 통한 다차 각성의 진화 …… 목표는 모든 능력의 근본인 이계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정중하게 두드렸다.

“뭐야?”

두꺼비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짙게 선팅된 창문에는 선글라스를 낀 사내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

NSA 본부 분석실.

“이게 폭주한 이혜성의 능력인가?”

수석 조사관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막내와 한수호 등 옆에 있던 사람들도 눈을 크게 뜨고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영상 속의 혜성은 높이 떠올라 드래곤과 마주 보고 있었다. 드래곤이 날갯짓하며 도망치려는 찰나, 혜성은 무표정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쿵, 드래곤은 날개를 움직이다가 그대로 추락했다. 놈의 무게는 어림잡아 수십 톤. 대번 흙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중앙 광장은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였다.

- 끄아아!

뿌연 먼지 사이로 드래곤이 길게 울부짖으며 발버둥 치는 게 보였다. 추락할 때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 같았다. 놈의 긴 입 사이로 녹색 피가 거품처럼 흘러나왔다.

“이혜성의 파장은?”

수석 조사관은 화면 왼쪽을 응시했다. 혜성의 모든 수치는 여전히 999,999,999. 파장의 변화량을 알 수 없었다.

혜성은 하늘에 둥둥 뜬 상태로 아래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파아앗, 드래곤이 겨우 고개를 들고 화염의 숨결을 토해냈다. 그가 손을 슬쩍 내젓자 화염은 이번에도 스르르 사라졌다.

“전에 보여준 어빌리티 캔슬링과 다릅니다. 그건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의 능력까지 없애는 건데, 지금 혜성 씨는 상대의 능력만 없애고 있습니다.”

분석관 중 하나가 경악하며 말했다.

“말도 안 돼. 이혜성이 신이라도 되는 거냐?”

수석 조사관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신의 권능. 혜성이 지금 보여주는 건 인간 능력자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때 혜성의 뒤에서 거대한 빛이 번쩍였다. 뒤쪽 건물의 옥상에 숨어 있던 회색 마스터였다. 놈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속성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혜성은 바닥에 떨어진 드래곤을 보고 있던 상태. 놈의 기습은 성공처럼 보였다.

혜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귀찮다는 듯 조금 염세적인 표정으로. 그의 시선이 닿자 회색 마스터의 공격은 드래곤의 숨결과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회색 마스터는 경악하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혜성을 중심으로 빛이 뿜어졌다. 조금 전 회색 마스터가 펼쳤던 공격을 카피해서 증폭한 기운이었다. 드래곤의 화염 숨결도 섞여 있었다. 빛에 닿은 모든 것은 그대로 녹아내렸다. 드래곤, 회색 마스터, 그리고 CCTV까지도.

이것이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파앗, 모니터는 갑자기 정전된 것처럼 까만 화면만 나왔다.

“그다음은 잘 아실 겁니다.”

분석관은 사진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지하 마켓은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 완전히 폐허가 돼 있었다. 철근만 남은 건물들, 뼈만 남은 드래곤, 바람에 흩날리는 흰 재. 공간 결계도 깨진 탓에 파란 하늘 아래에는 종말 이후의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단 한 곳, 막내 등 동료가 숨어 있던 불타는 금요일만 처음 상태 그대로 무사했다.

“기가 막히는군. 그 와중에 폭발을 조절한 건가?”

“이건 완전히 밸런스 붕괴인데요? 이혜성 혼자만 다른 차원에서 노는 것 같습니다.”

조사관들은 사진을 돌려보며 한마디씩 했다.

“날더러 이런 괴물과 싸우라고? 윗대가리 새끼들, 밥그릇 싸움도 상대를 봐 가면서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니야?”

수석 조사관도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성에 대한 감찰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인가, 악마인가? 대체 혜성은 무슨 힘을 손에 넣은 건가? 우선 혜성의 정체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

도쿄 L 호텔 VIP 룸.

“미쳤군. 상대의 공격을 흡수한 뒤, 몇 배로 증폭해서 돌려준다. 이건 그 악마의 능력 중 하나가 아닌가?”

흰 마스터는 신음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혜성의 능력은 이계의 악마보다 수준이 낮았다. 이계의 악마였다면 지하 마켓이 아니라 서울을 통째로 날려버렸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혜성은 이계의 악마를 본떠서 만든 짝퉁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 악마의 능력은 제로 프로젝트에서 꿈꿨던 이상이 아닙니까? 설마 그 프로젝트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검은 마스터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흰 마스터를 바라봤다.

“제로 프로젝트.”

꽉 다문 흰 마스터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로 프로젝트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그 주체는 누구인가? 이혜성은 제로 프로젝트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혹시 이혜성이 최초에 2차 각성을 한 것도 제로 프로젝트의 일부였는가?’

당장 생각나는 의문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회색 여우도 이런 결과까지 예측하진 못했을 터. 우린 뭔가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군.”

흰 마스터는 침통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혜성의 현재 상태는?”

“방금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아직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이전과 달리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 갑작스러운 강화와 폭주 다음에는 의식불명이 오기도 하니까.”

흰 마스터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의 계획은 회색 여우가 혜성을 제거하고, 다시 검은 마스터의 부하가 회색 여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커졌다. 게다가 제로 프로젝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결국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혜성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태호라는 친구의 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민간 병원입니다만, NSA 놈들이 1급 경계를 펼치고 있습니다.”

“또 거기인가? 자네의 제자 중에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 자가 있나?”

“네. 똘똘한 녀석 하나가 있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지하 마켓에서 드래곤을 소환한 녀석을 떠올렸다. 그처럼 몬스터를 조종하는 스킬을 지닌 능력자였다.

흰 마스터는 모니터 속 혜성을 잠깐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놈이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 그 싹을 없애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 당장 그 녀석에게 연락해서……”

흰 마스터는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검은 마스터도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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