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23화 (123/150)

# 123. 그 후 (2)

NSA 본부 분석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막내와 한수호, 조사관, 분석관 등 십여 명이 모여 영상 자료를 분석 중이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혜성. 혜성이 회색 마스터와 연합해 드래곤을 상대하는 장면이었다.

막내는 눈을 크게 뜨고 영상에 집중했다. 그도 혜성의 전투 영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하 마켓에서 직접 본 것과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객관적인 느낌이랄까?

영상 옆에는 혜성의 순간적인 힘, 속도, 에너지, 파장 등 다양한 항목이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됐다. 마치 혜성을 해부하는 것처럼.

혜성이 드래곤의 날갯짓에 휩쓸려 추락하는 장면이 나왔다. 모니터 옆에 서 있던 분석관이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정지시키고 설명했다.

“혜성 씨는 데미지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증폭하는 타입입니다. 상대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 능력치 가변형이죠. 반면 회색 마스터는 스킬을 카피하는 것은 똑같습니다만, 스킬의 위력은 본인의 능력치에 따라 결정됩니다. 일종의 능력치 고정형. 스킬만 카피하고 능력치는 회색 마스터 본래의 것을 따라가는 겁니다.”

가변형이니 고정형이니 하는 것은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 둘 다 워낙 희귀한 케이스. 정부 차원에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했다.

“아무튼 둘의 스타일은 장단점이 극명하게 나뉩니다. 현재 능력은 회색 마스터가 위. 그러나 잠재력은 혜성 씨가 더 풍부하죠.”

“잠깐? 그럼 이론상으로는 이혜성이 회색 마스터보다 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둘의 움직임과 수치를 보면 회색 마스터가 더 높은데? 이건 왜 그렇지?”

수석 조사관이 손을 들고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혜성 씨의 증폭 능력은 본인의 기본 능력치, 당일 컨디션, 데미지, 상대의 능력치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배율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무한정 증폭되는 건 아닙니다. 기본 능력치에 비례해서 일종의 한계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버프는 증폭되는 비율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한계치 자체를 변화시키는 건 아닙니다.”

“어려운 말이네요.”

막내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한수호를 슬쩍 쳐다봤지만, 녀석도 눈만 끔뻑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혜성 씨가 증폭하는 능력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 한계치가 없으면 우선 혜성 씨의 몸이 견디지 못할 테죠.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 한계치를 뛰어넘는 강자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 회색 마스터를 통해 그 한계에 부딪힌 겁니다.”

분석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설명했다.

“아.”

그제야 막내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회색 마스터가 계속 혜성을 시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혜성의 한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을 터. 다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2차 각성의 증폭에도 한계치가 있다는 건 혜성이 형도 몰랐습니다. 이걸 마스터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막내의 질문.

이번엔 분석관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설명을 재개했다.

“아무튼 진짜는 혜성 씨가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다음부터입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혜성 씨는 아마 현재의 능력으로 드래곤을 대적할 수 없음을 느꼈을 겁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

분석관의 말이 길어졌다.

“지금 하는 발언은 사실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분석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해석인가? 말 한마디가 앞으로 이혜성의 조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나?”

수석 조사관이 분석관의 말을 끊고 차갑게 물었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자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다.

“그건……”

분석관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막내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옆에 앉은 다른 분석관이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막내는 수석 조사관을 노려보다가 겨우 화를 삼켰다.

“다음 영상이나 보지. 진짜는 이제부터니까.”

“알겠습니다.”

분석관은 멋쩍은 표정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형.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막내는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주목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

SJ 기획, 소회의실.

“……이상이 이번 블랙 사건의 전말입니다.”

한수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마쳤다. 그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박무영이 앉아서 그녀의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혜성이 등장한 이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블랙이 등장하고 소탕 작전이 펼쳐지기까지 불과 2개월 남짓.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이혜성입니다. 수석 조사관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NSA 내부의 적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건 나한테 맡겨. 국민 영웅인데 그 정도 쉴드는 쳐 줘야지. 강지영은 어때?”

박무영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NSA가 도착하기 직전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CCTV에 걸린 게 문제입니다만, 천면 여우의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NSA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 겁니다.”

한수은은 강지영의 탈출을 간단히 설명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웅이 결계가 풀리자마자 진입해서 강지영을 빼돌렸다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면목 없군. 그런 간단한 유인에 걸려들다니.”

박무영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론은 대한민국 정보국의 승리라며 이번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블랙 입장에서도 몇 가지 소득은 있었다.

첫째, 조직의 재정비였다. 이건 우민창이 잡혔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회색 마스터와 그 부하들은 일종의 버리는 카드. 그들은 정보국이 우민창을 단서로 접근하기 전에 꼬리를 잘라야 했다.

더 큰 소득은 눈엣가시 같던 박무영을 끌어냈다는 점이었다. 박무영이 63 스퀘어에서 싸운 장면은 고스란히 블랙에게 넘어간 상태. 블랙은 지금쯤 해당 영상을 분석하며 박무영의 공략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회색 마스터의 시체는 확인했나?”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혜성 씨의 폭주로 일대가 초토화됐으니까요. 다만 전투 이후의 상황을 보면 살아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어. 나도 서류상으론 완벽하게 죽은 처지였으니까.”

박무영은 쓰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혜성 씨의 영상은 확보했지?”

“NSA의 영상 자료를 카피했습니다. NSA의 내부 자료도 곧 입수하겠습니다.”

“수고했군. 중국이나 일본 쪽 정보국은 어때?”

“아마 지금쯤 그쪽도 혜성 씨의 분석을 시작했을 겁니다. 상대 국가의 기관 깊숙이 정보원을 두고 있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까요.”

한수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중, 일 삼국은 오래전부터 얽힌 애증의 관계였다. 이건 몬스터가 출몰하는 시대에도 변함없었다. 겉으로는 공해상의 몬스터를 잡기 위해 협력했지만, 속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치열한 물밑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국이나 일본의 기관을 탓할 수는 없었다. NSA와 CIC도 양국에 정보원을 두고 있었으니까.

박무영은 정보 노출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돈만 주면 나라도 팔아먹을 놈들은 어디든지 있다. 그리고 그건 국가 기관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아니, 나라가 어려울수록 뒤통수치는 놈들은 국가 기관에 더 많다.

평소 박무영이 자주 한 말이었다. 이런 일에는 면역이 된 것 같았다.

“뒤처리는 잠깐 미루고. 우리도 한번 보자고. 그때 혜성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정면의 스크린을 주목했다.

***

일본 도쿄 L 호텔 VIP 룸.

어둡고 적막한 거실에 두 마스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서는 혜성의 전투가 나오고 있었다. 드래곤의 뜨거운 숨결에 둘러싸인 가운데, 혜성이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직후였다.

“끄아아아!”

혜성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화염 때문에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운 눈치였다. 갑작스러운 에너지 증폭으로 인한 격렬한 통증 때문이었다. 반대쪽에서는 회색 마스터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드래곤의 피부에 작은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 비명이 뚝 그쳤다. 혜성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분위기가 변했다. 무표정한 얼굴, 흰자위로 번뜩이는 눈, 술에 취한 듯 어딘지 어색한 몸놀림. 전형적인 이지 상실의 징후였다.

“좀 이상한데?”

흰 마스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몬스터의 힘을 갑자기 흡수하면 여러 부작용이 따르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작용 중에는 이지 상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유수혁이 보여준 폭주. 다만 영상 속 혜성의 반응은 지금까지 그가 본 폭주와는 좀 다른 양상이었다. 유수혁은 파괴의 본능에 사로잡힌 반면, 혜성의 반응은 내면에 억눌려 있던 진짜 힘이 깨어난 느낌이었다.

“에너지 수치는?”

그는 모니터 왼쪽을 확인했다.

999,999,999. 에너지는 물론이고 모든 항목이 측정의 한계치를 벗어난 상태였다.

“음.”

맞은편에 앉은 검은 마스터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측정 한계치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한두 항목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항목에서 최고를 찍는 건 자신 없었다. 슬쩍 곁눈질해 보니 흰 마스터도 굳은 표정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만약 지금 놈이 보여준 게 우연이 아니라면, 앞으로 상대하기 어려울 거야. 회색 여우는 이걸 알고 놈에게 힘을 준 건가?”

흰 마스터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회색 마스터를 떠올렸다. 참고로 회색 여우는 그들이 부르는 별명인 터. 회색 마스터는 기관에서 멋대로 정한 임시 코드명이었다.

다른 두 마스터가 뒤통수를 쳤다는 배신감. 드래곤을 마주한 위기. 회색 마스터가 혜성에게 몬스터의 힘을 준 것은 자신을 버린 블랙에 대한 보복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사이에도 영상은 계속됐다. 이어서 혜성은 드래곤을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드래곤의 숨결이 그의 손에 닿아 스르르 사라졌다. 혜성이 자랑하는 어빌리티 캔슬링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빌리티 캔슬링은 말 그대로 상대의 능력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 반면 영상 속 혜성의 능력은 손에 닿은 스킬만 무효로 만들었다.

회색 마스터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수치로 측정할 수 없지만, 혜성에게서 뭔가 다른 기운을 감지한 것 같았다. 혜성은 마스터를 잠깐 노려본 뒤 상공의 드래곤을 향해 떠올랐다. 가볍게 발을 살짝 구른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지하 마켓의 천장까지 떠올라 드래곤과 눈을 마주했다.

“꿀꺽.”

두 마스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영상에 빠져들었다.

영상의 각도가 바뀌었다. 천장 쪽에 달린 CCTV로 촬영한 덕분에 혜성과 드래곤이 클로즈업된 것처럼 크게 보였다. 드래곤도 혜성에게서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놈은 재차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는 한편, 크게 날갯짓해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 했다.

혜성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파앗, 손바닥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저거 뭐야?”

두 마스터는 동시에 비명처럼 외쳤다.

혜성이 선보인 것은 새로운 스킬.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인간의 스킬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마스터도 단편적으로만 본 것. 신인지 악마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다른 차원의 괴물이 선보인 능력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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