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21화 (121/150)

# 121. 회색 마스터 (9)

지하 마켓 통제탑 아래.

“휘유. 이 시커먼 영감, 정말 굉장한 걸 만들었군.”

선글라스의 사내는 휘파람을 길게 불며 감탄했다.

통제탑 꼭대기에서는 거대한 드래곤이 날개를 활짝 편 채 길게 포효하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피부, 강철처럼 숭숭 돋은 가시들, 크고 긴 노란색 눈, 그리고 악어처럼 크게 돌출된 입과 섬뜩한 이빨까지. 놈을 보는 것만으로도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이곳이 특수 결계로 이뤄진 아공간의 일종이라서 다행이었다. 바깥세상이었다면 드래곤의 날갯짓만으로도 주위의 빌딩들에 쩍쩍 금이 갔을 테니까.

“괜히 나까지 말려들 필욘 없겠지.”

사내는 잠깐 몸서리치다가 근처에 있는 빈 가게의 3층에 몸을 숨겼다. 각성자 특유의 기운을 감추고.

“그런데 회색 마스터는 스킬의 마스터고, 검은 마스터는 몬스터의 마스터인데. 흰 마스터는 뭐가 특기지?”

그는 세 마스터의 알력 다툼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하나의 조직, 세 개의 머리. 물론 그 머리는 곧 두 개가 될 테지만, 머지않아 하나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어쩌면 이미 하나가 되기 위한 물밑 싸움이 시작됐을 수도.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난 그냥 구경만 하면 될 테니까.”

잠시 후, 그는 눈을 반짝이며 중앙 광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NSA 본부 관측센터.

콜센터를 연상시키는 칸막이 안에서 백여 명의 요원들이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 거기에 분석기 특유의 기계음이 어우러진 탓에 실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관측센터 뒤쪽 중앙.

한 사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관측센터 중앙의 메인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목에 멘 신분증에 부국장이란 직함이 언뜻 보였다.

“오늘 완전히 날 잡았군.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반쯤 풀었다.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는 서울의 지도가 나오고 있었다.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각성자의 에너지를 분석해 덧씌운 자료였다.

지도 곳곳에서 전투를 알리는 붉은 점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까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붉은 점은 아직도 7개나 남은 상황. 물론 인사동의 지하 마켓은 제외한 숫자였다.

“명동에서 미등록된 각성자의 파장이 관측됐습니다. TH파가……”

특수 헤드셋을 쓴 요원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그의 손에는 갓 프린트된 따뜻한 분석자료가 들려 있었다.

“미등록? 거기 있는 우리 요원들은 어떻게 됐지?”

부국장은 분석자료를 살펴보며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식을 잃은 것 같습니다만, 생명 반응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방금 가까운 곳에 대기 중이던 구급 요원들을 파견했습니다.”

“뭐야? 우리 요원들이 다 당한 거야? 몇 놈인데?”

“현장에 있는 건 대여섯 명쯤 되는데, 능력을 사용한 건 한 명입니다.”

분석 요원은 자료의 중간 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등급, 스킬, 속성 전부 측정 불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이코닉 에너지. 그리고 장비만 챙겨 연기처럼 사라진 마무리까지. 수천 명의 능력자와 몬스터를 분석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근처 CCTV 자료는 확보했어?”

“지금 영상 자료를 분석 중입니다만, 육안으로 봤을 때는 CCTV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영상만 보면 우리 요원들이 갑자기 픽 쓰러진 것 같았습니다.”

“이거 뭐야? 귀신이야?”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부국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보고를 한 요원도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비상! S급 경계입니다!”

관측실 중앙, 다른 요원이 숨넘어갈 듯 다급하게 외쳤다.

“또 뭐야?”

부국장의 표정은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걸 좀 보십시오!”

요원은 모니터에 새로운 영상을 띄웠다. 몬스터의 파장을 분석한 자료였다.

“어딘데?”

“인사동, 옛 지하 마켓입니다.”

“거긴 이혜성이 있는 곳이잖아? 또 어떤 몬스터야?”

부국장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NSA의 요원이 전부 혜성에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니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감사관들처럼 혜성에 반감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부국장도 그런 부류의 하나. 국장이 대표적인 혜성파라면, 부국장은 대표적인 안티 혜성파였다.

‘블랙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이혜성 때문이다. 놈이 하급 보조요원 주제에 제멋대로 날뛴 탓에 블랙도 악에 받쳐 계속 테러를 벌이는 것이다.’

이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사이에도 분석 요원의 보고는 계속됐다.

“결계 때문에 정확한 분석은 어렵습니다. 감지된 파장 자체도 워낙 약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분석 요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며 자료를 중앙의 모니터에 띄웠다. 부국장을 포함한 모든 요원은 중앙 모니터를 주목했다.

“씨발, 저거 뭐야?”

부국장의 입에서 대번 욕이 나왔다.

다른 요원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장 국장님께 전화해! 모든 작전 중지. 전 대원은 당장 지하 마켓으로 출동한다.”

부국장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크게 외쳤다.

관측 센터가 다시 바빠졌다. 모니터 중앙, 혜성과 정체불명의 능력자가 한 팀을 이뤄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상대는 SS급의 드래곤. 2 : 1이었지만, 전황은 혜성과 정체불명의 능력자 쪽이 불리했다.

***

지하 마켓 중앙 광장.

혜성은 회색 마스터의 공격을 맞고 시작했다. 회색 마스터는 그 이름처럼 물, 불, 바람, 번개, 땅, 얼음 등 모든 자연계 속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같은 편이 되다니. 역시 세상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야.”

회색 마스터는 혜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드래곤이라. 이거 오랜만에 제대로 싸우겠군. 드래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놈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전의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쪽이나 잘하시지.”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드래곤을 상대하기 어려운 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놈의 위치였다. 놈은 보통 고공에 뜬 상태로 지상의 적들을 공격했다.

둘째, 강력한 내구성이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피부를 간지럽히는 수준밖에 안 됐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셋째, 광역 공격이었다. 드래곤의 특기는 잘 알려진 것처럼 놈의 숨결에 깃든 화염. 놈이 워낙 크다 보니 화염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숨결 한 번에 반경 수십 미터를 초토화할 수 있었다.

혜성은 일단 막내, 한수호, 강지영을 좌우, 등에 짊어지고 피신시켰다. 마침 200미터쯤 떨어진 곳 골목 구석에 폐허가 된 상점이 있었다.

“불타는 금요일.”

혜성은 가게를 보고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폭발물을 다루는 상점은 대개 위험 물질을 보관하기 위한 특수 공간이 있었다. 불타는 금요일도 마찬가지. 카운터를 지나자 안쪽에 밀실 형태의 공간이 있었다. NSA 요원들이 쓸고 간 탓에 남아 있는 물건은 없었지만, 두꺼운 콘크리트 방벽은 그대로였다.

혜성은 막내와 한수호, 강지영을 벽에 기대 앉혔다. 그가 막 나가려는 찰나.

“역시 놈과 손을 잡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막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스러운 표정.

“나도 알아. 하지만 현 시점에서 놈과 손을 잡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있나?”

“그건 …….”

막내는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블랙은 몬스터들을 통제했죠. 그런데 현재 분위기를 보니 회색 마스터는 드래곤을 통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단지 드래곤이 너무 강력해서?”

이번에는 강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블랙 내부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내분이나.”

혜성은 놈의 행동을 떠올렸다. 처음에 놈은 그가 퍼스트 게이트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아까는 순순히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역시 놈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게 확실했다.

‘놈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안 된다. 아니, 놈은 정말 날 해칠 마음이 있었을까?’

혜성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 콰쾅, 밖에서 큰 불기둥이 치솟았다. 회색 마스터와 드래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나만 믿으라고.”

혜성은 셋을 차례로 돌아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지체 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회색 마스터에게서 카피한 바람 속성의 스킬을 응용했다. 파팟,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고 느낀 찰나, 그는 둥실 떠올라 새처럼 날아갔다.

“혜성 씨.”

그의 등 뒤로 강지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5분 후, 불타는 금요일.

“괜찮을까?”

강지영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밖으로 나갔다.

막내와 한수호도 혜성이 걱정됐다. 둘은 시선을 교환한 뒤 그녀를 따라 슬쩍 밖으로 나갔다.

콰쾅, 거대한 불기둥을 신호로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좌우로 흩어져 날아올랐다. 드래곤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혜성이, 우측에는 회색 마스터가 있었다. 드래곤은 지상에서 30미터쯤 높이에 떠 있는 상태. 둘은 바람 속성을 이용해 단숨에 드래곤의 눈높이까지 솟구쳤다.

혜성은 드래곤의 눈을 향해 물의 공격을 퍼부었다. 물론 그의 강기는 드래곤의 눈꺼풀을 맞고 흩어졌다. 하지만 물의 공격은 사전 작업일 뿐. 그는 곧이어 번개의 속성을 뿌렸다. 물과 번개의 결합. 반대쪽에서는 회색 마스터가 물과 얼음 속성을 교대로 사용해 놈을 공격했다.

- 끄아아!

드래곤은 울음을 길게 토해내는 한편, 크게 날갯짓해 솟아올랐다. 약 60미터에 이르는 지하 마켓의 천장에 닿을 정도. 별다른 타격은 없었지만, 생각지 못한 공격을 받고 놀란 것 같았다.

“혜성 씨!”

강지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놈의 거친 날갯짓에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처럼 요동쳤다. 회색 마스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혜성은 바람의 속성에 아직 익숙지 않은 것 같았다. 녀석의 거친 날갯짓에 휘말려 휘청거리며 떨어졌다.

쾅, 혜성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이어서 드래곤의 뜨거운 숨결이 혜성의 정면에 떨어졌다.

“젠장.”

혜성은 급히 몸을 일으켜 물러서는 한편, 물과 바람의 속성으로 이중 보호막을 펼쳤다. 인간의 힘으로 드래곤의 숨결을 막는 건 무리.

“으아아!”

혜성은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보호막 덕분에 직접적인 화상은 면하고 있었지만, 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역시 이대론 무리인가?”

강지영은 고민하다가 백팩에서 액체 형태의 약물을 꺼냈다. 진통제과 각성제의 일종. 몸에 무리가 가겠지만, 혜성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앗!”

“안 돼!”

막내와 한수호가 경악하며 외쳤다. 강지영도 혜성을 보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렁이는 불길 사이, 혜성이 뭔가를 꺼내 단숨에 들이켜는 게 보였다. 그건 회색 마스터가 준 몬스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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