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회색 마스터 (8)
지하 마켓 중앙 광장.
“우리의 관계를 밝히기 전에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걸 모르면, 지금 넌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회색 마스터는 모든 걸 털어놓으려는 듯하다가 돌연 말을 바꿨다.
“그게 뭐냐?”
퉤, 혜성은 가래침을 뱉고 놈을 노려봤다.
놈이 무슨 꿍꿍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심경의 변화라고 치부하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성격이 급하군. 내가 질문을 하나 하지. 넌 신을 믿나?”
“뭐?”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 그럼 질문을 바꾸지. 세상에 정말 신이 있다면, 신은 왜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었을까? 같은 인간이라도 외모, 지능, 신체 능력은 차이가 크지. 또 누구는 날 때부터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평생 호의호식하고, 다른 누구는 평생 발버둥 치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지. 어때?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뜬금없이 신이 왜 나오지?”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경 쓰지 마요. 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려는 거짓말이니까.”
“맞습니다. 놈의 술수에 말려들 필요 없습니다.”
막내와 한수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혜성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놈의 꿍꿍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까처럼 최면을 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놈이 이제 와서 그에게 다시 최면을 걸 이유도 없었고.
그사이에도 회색 마스터의 말은 계속됐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야.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목적을 삶이 아니라 죽음에 포커스를 맞추면 얘기가 달라지지. 신은 누구보다 공평한 존재야.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지니까 말이야.”
“어디서 싸구려 개똥철학이라도 주워들은 모양이군. 결국 인간은 죽기 위해 존재한다. 뭐, 이런 뜻이냐?”
퉤, 혜성은 가래침을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놈이 시간을 끌기 위한 말장난일까?’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놈을 공격할 준비했다.
“몬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게 아니야. 이제야 행동을 개시했을 뿐.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였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
“그럼 우린 왜 게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몬스터를 몰랐지? 그리고 몬스터와 네가 말한 신은 무슨 관계냐?”
혜성이 주먹에 에너지를 집중하며 물었다. 놈의 허튼소리는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몬스터들은 지금 신의 섭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거야. 아주 오래 전, 우리들 인간은 몬스터들을 이렇게 불렀다. 신의 대리인, 또는 천사라고.”
놈은 혜성의 주먹을 힐끔 쳐다본 뒤 선언처럼 말했다.
“……!”
혜성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몬스터가 천사라고? 무슨 개소리야?”
막내가 큰 소리로 비웃었지만, 혜성과 마스터는 막내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혜성은 암흑의 수호자에게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죽은 능력자를 몬스터로 부활시킨 정체불명의 그림자.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도 생사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정신병원에서 본 신을 자처하던 사내도 떠올랐다.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보고, 블랙의 능력자들을 가뿐히 제압한 자. 놈이 진짜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을 포함해 정신병원의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우러러보고 있었다.
“혹시 지금 네가 말하려는 게 죽은 능력자를 되살리는 것과 어떤 관련이……”
혜성이 다시 말하려는 찰나였다.
콰쾅, 어디선가 돌연 큰 폭발이 일었다. 지하 마켓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
“뭐야?”
혜성은 어깨를 움츠리고 지하 마켓의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쯤 무너진 통제탑 위, 거대한 몬스터가 기지개를 켜듯 몸을 펴고 있었다. 통제탑도 멀리서 눈에 확 띌 정도로 컸지만, 몬스터에 비하면 전봇대처럼 작아 보였다.
“씨발. 저건 반칙이지.”
막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수호도 멍한 표정으로 몬스터를 쳐다봤다.
현존하는 최강의 몬스터. 언뜻 보면 날개 달린 비만 도마뱀 같지만, 빌딩 하나는 그 숨결만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괴물.
- 끄아아아!
SS급의 드래곤이 길게 포효했다.
***
명동 L 백화점 뒷골목.
“너, 너흰 누구야?”
짙은 선글라스를 낀 블랙이 옆구리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물었다. 옆구리를 감싼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새어나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 나는 왕인데.”
그의 맞은편, 산적 두목처럼 생긴 놈이 주위를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다른 블랙의 능력자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어 있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당한 듯 눈을 크게 부릅뜬 채였다. 쓰러진 능력자들 사이에는 갑옷을 입은 NSA 요원들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블랙과 달리 정신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다 챙겼어?”
왕이 뒤에 있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법사, 절세 미녀, 드래곤 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J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등에 멘 백팩을 툭툭 쳤다. 백팩에는 블랙과 NSA 요원들이 쓰는 각종 장비와 아이템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슬슬 돌아가자.”
골목 어귀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사내가 말했다. 신을 자처하는 자였다. 다만 정신병원에서와 달리 평범한 청바지와 면티를 입고 있었다.
“역시 파티에는 드워프 대장장이가 있어야 한다니까.”
“누가 드워프야? 그리고 난 대장장이가 아니라 장인이라고, 장인.”
닥터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발끈했다.
“누구긴? 당신이지. 여기에 대장장이가 또 있나? 그리고 대장장이나 장인이나. 그게 그거지.”
왕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둘이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려는 찰나.
“어?”
신이 돌연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인사동 방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쪽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어.”
“네? 무슨 몬스터라도 나타났나요?”
왕도 서쪽을 응시하며 괜히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일행들도 신을 따라 같은 곳을 바라봤다.
계엄령이 떨어진 상황. 인적이 끊긴 가운데, 조용하고 화창한 오후였다. 특별히 위험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네 친구가 왔어. 그런데 여기 용은 옛날에 내가 타고 다니던 놈과 다른데? 너무 뚱뚱하네. 좋은 걸 많이 먹었나? 저래서 날아다닐 수 있겠어?”
신은 드래곤을 자처하는 덩치 큰 사내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뀨?”
드래곤은 엄지를 빨며 고개를 갸웃했다.
“드래곤이요? 그럼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닥터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왕과 마법사, 절세미녀도 대번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괜찮아. 강한 인간이 있으니까. 좀 고전하겠지만 알아서 처리할 거야.”
신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신? 너희 정체가 뭐냐?”
블랙 녀석이 쿨럭거리며 물었다.
우리가 저런 덜떨어진 놈들에게 당했다니. 차라리 NSA에 당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놈은 그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뭐 들었어? 이분은 전지전능하신 신. 그리고 우린 신을 따르는 사인방, 아니 오인방이다.”
왕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일행들을 하나씩 가리켰다. 왕, 마법사, 절세미녀, 드래곤, 거기에 드워프까지.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는 다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
블랙은 고통의 와중에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왕이 끝까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만 가자. 더 있으면 괜히 귀찮아진다.”
신은 블랙을 향해 손을 슬쩍 내저었다.
쾅. 그것이 블랙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지하 마켓, 중앙 광장.
- 끄아아아!
드래곤의 포효가 점점 크고 길어졌다. 거대한 몸집 탓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만약 저놈이 밖으로 나간다면?’
혜성은 생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드래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국의 어느 도시였다. 당시 영국 정보국의 피해는 사망한 능력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다. 민간의 사망자와 피해액은 집계가 어려울 정도. 겨우 놈을 잡긴 했지만, 도시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됐다.
“까마귀, 이 새끼. 기어이 일을 저질렀군.”
회색 마스터는 신음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까마귀?”
몬스터를 이용해 공격하는 건 블랙의 수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회색 마스터가 있는데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것도 사상 최강의 몬스터라는 드래곤이.
‘혹시 블랙의 수뇌부는 회색 마스터 외에 다른 놈들도 있는 건가?’
다수의 수뇌부. 내분. 배신. 혜성은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상황이 많이 변한 것 같군. 제안 하나 하지.”
회색 마스터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혀가 길군. 뭐냐? 동맹이라도 맺자는 거냐?”
“잘 아는군. 우리의 싸움은 나중. 일단 저놈을 막는 게 먼저 아닌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혜성은 놈을 매섭게 쏘아보며 되물었다.
“오, 똑똑한데? 이 와중에 그것까지 생각하고.”
회색 마스터는 짐짓 감탄하는 척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투명한 유리병에 녹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몬스터의 힘?”
혜성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몬스터의 기운이 농축된 것처럼 강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래. 이게 유수혁을 단시간에 강하게 만든 비결이지. 그 위력은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
“이 미친놈. 형보고 그걸 복용하라고?”
막내가 대번 악을 쓰듯 욕설을 퍼부었다.
“말이 많군.”
회색 마스터는 막내를 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혜성과 동맹을 맺는 게 먼저. 막내에게 손을 쓰진 않았다.
“너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넌 죽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말이야. 어때? 내 말이 틀렸나?”
회색 마스터는 혜성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혜성은 내심 뜨끔했다.
“그래서 이걸 제안하는 거야. 이건 잘만 쓰면 네가 원하는 목표까지 단숨에 이를 수 있을 테니까. 일종의 지름길이라고 할까?”
혜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지의 상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개인마다 다른 거니까. 유수혁이야 원래 정신 상태가 썩어빠진 놈인 거고. 내 최면을 이겨낼 정도라면, 이 약의 마성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당장 복용하라는 것도 아니야.”
마스터는 약병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를 유혹하는 것처럼.
“그 조건, 받아들이지.”
혜성은 놈을 노려보며 빼앗듯이 약병을 받아들었다. 당장 복용하진 않았다. 그가 몬스터의 힘에 손을 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순간. 솔직히 가급적이면 몬스터의 힘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놈의 말이 맞았다. 당장 중요한 건 드래곤을 여기서 막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혜성에겐 놈과 손을 잡는 것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끄아아아!
잠시 후, 드래곤은 거대한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