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회색 마스터 (7)
송도 연구소 입구.
두꺼비는 강화된 3중 게이트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근처를 지나가던 연구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래. 별일 없었지?”
두꺼비는 건성으로 되묻고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는 NSA로 치면 팀장급인 책임 연구원이었다. 연구소를 오래 비울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 우민창의 사건 때 NSA에 파견을 나가는 바람에 일이 많이 밀린 상태였다.
다른 연구원들을 NSA에 남겨서 광역 탐색기를 작동시킨 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왔다.
“씨발, 진짜 때려치우고 민간 연구소로 옮겨야 하나? 월급은 X같이 주면서 시키는 건 더럽게 많아요. 연금도 많이 줄였다던데, 정말……”
그가 한창 투덜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는 도중이었다.
“저어,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깽이 연구원이 슬쩍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똘똘하고 입이 무거워 두꺼비가 조수처럼 부리는 녀석이었다. 다만 녀석은 평소와 달리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또 뭔데?”
두꺼비는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NSA 장진우 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깽이 연구원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대답했다. 다른 연구원들은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블랙 소탕 작전을 원격으로 지원하느라 정신없었다. 아무도 둘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두꺼비는 그제야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가 10통이나 찍혀 있었다. 오는 동안 헬리콥터의 소음과 진동 때문에 전화가 온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제로 프로젝트가 뭡니까?”
말라깽이는 두꺼비의 귀에 대고 더욱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갑자기 왜 물어?”
두꺼비는 표정이 굳어져 되물었다.
“장진우 팀장님이 그 프로젝트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그거 인터넷에 떠도는 헛소문 아니었습니까? 각국 정부가 게이트 시대 초기에 각성자를 대상으로 각종 생체실험을 했다는 둥. 인위적으로 각성자를 만들었다는 둥.”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무슨 말인지 알지?”
“설마 그게 사실입니까?”
말라깽이의 눈이 커졌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좌우로 굴렸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어허! 목소리 줄여.”
두꺼비도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냥 헛소문만은 아니야. 물론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혹시 다른 연구원들에게 말했나?”
“아이고,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라깽이도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래. 잘했어. 일단 우리 둘만 알고 있자고.”
두꺼비는 말라깽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뭡니까? 워낙 소문이 많았잖습니까?”
말라깽이는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능력의 진화론이라고 할까?”
“네?”
두꺼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용불용설이니 진화론은 생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각성자의 스킬도 사용자의 성향, 환경이나 상황 등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는 게 최근의 이론이었다.
예를 들어, 막내는 비슷한 유형의 다른 능력자보다 원거리 딜의 위력이 강했다. 녀석이 근접전보다 원거리 대전을 선호하기도 했고, 실제로도 원거리 공격을 자주 사용한 탓이었다.
“실은 나도 잘 몰라. 그때 난 갓 수습 딱지를 뗀 막내였거든. 각성자의 진화를 인위적으로 촉진시키는 비밀 실험이 있었다. 특히 특정 스킬을 지닌 능력자가 특정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진화가 급속도로 이뤄진다더라. 내가 아는 건 딱 여기까지야.”
두꺼비는 평소답지 않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할 말은 많지만 아끼는 눈치였다.
“이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그리고 이따……”
그는 말라깽이의 귀에 뭐라고 길게 속삭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말라깽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실험에 쓰였던 각성자들은 전부 죽었을 텐데? 장진우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두꺼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블랙은 끝이 아니라 시작.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지하 마켓 중앙 광장.
“죽다 살아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회색 마스터는 코웃음 치며 오른손을 슬쩍 내저었다. 유수혁의 염동력이었다.
파팟, 그의 주위에 떠 있던 콘크리트 파편들이 총알처럼 날아갔다. 날아오는 게 뻔히 보였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알면서도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젠장.”
혜성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는 한편, 무형검의 수법으로 튕겨냈다.
콰쾅, 허공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인데 대번 손이 시큰하게 저렸다. 그런데 그가 반격하려는 찰나였다.
“너무 뻔해.”
쾅, 회색 마스터의 녹색 강기가 혜성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결국 혜성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벽에 처박혀야 했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보니 회색 마스터의 첫 공격은 속임수. 진짜는 혜성을 물러나게 한 뒤, 그의 예상 위치에 날린 바람 속성의 기습 공격이었다.
혜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찰나, 회색 마스터가 다시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놈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
패앵, 콘크리트 파편들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아!”
강지영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무형검을 회수해 날리기엔 늦었다. 게다가 공격이 더 빨라진 탓에 피할 수도 없었다.
“제길!”
혜성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휘둘렀다. 뭔가를 노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파편들이 막 혜성을 덮치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돌풍이 불어와 혜성의 주위를 감쌌다.
콰쾅, 파편들은 바람의 영향으로 혜성 대신 뒤에 있는 벽에 박혔다.
“뭐야?”
막내와 한수호, 강지영은 다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바람을 이용해 날아오는 파편의 각도를 바꾼다. 조금 전 혜성이 선보인 건 회색 마스터가 썼던 바람 속성의 스킬이었다.
회색 마스터가 공격을 거둘 리는 없는 터. 그렇다고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혜성이 바람의 스킬을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뭘 한 거지?”
혜성도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버프의 영향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놈과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의 몸이 전과 다르다는 건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힘을 얻은 것 같다고 큰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2차 각성 상태에서 다른 스킬을 카피한 건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응시하며 에너지를 집중시켜 봤다. 과연 작은 소용돌이가 손바닥 위에 생겨났다.
“설마 중첩 카피라도 한 건가?”
혜성은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 경악했다.
***
사실 상대의 스킬을 카피하는 능력자는 혜성이 최초가 아니었다. 형태는 다르긴 하지만, 복제나 반사 등 비슷한 유형의 능력이 있었다.
다만 혜성은 그중에서도 증폭이 가미된 독특한 케이스. 아무튼 이런 카피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상대의 여러 스킬을 카피하는 중첩 카피였다.
“하지만 중첩 카피는 보통 일회성일 텐데?”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능력은 일단 카피만 하면 횟수에 상관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킬을 응용할 수 있었다. 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첩 카피는 상대의 능력을 카피했다가 그대로 돌려주는 것. 반사 능력과 비슷했기 때문에 한번 써먹고 나면 그 스킬은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축하하네. 이제 겨우 껍질을 깼군.”
회색 마스터는 당황하지 않고 히죽 웃었다. 혜성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처럼.
“그게 무슨 뜻이지?”
“네가 지금까지 2차 각성에서 회복하고 곧장 다른 스킬을 카피한 게 몇 번이나 됐지?”
“그야……”
혜성은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억이 안 날 정도.
“넌 언제나 네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지. 그러다 보니 네 몸도 네게 적응한 거야. 마침 버프도 제대로 받았고 말이지.”
“하지만 단전이 하나인 탓에 능력도……”
“라는 이론이 있지. 그런데 우리가 각성자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현재 인류가 알아낸 건 각성자의 10% 남짓이나 되려나? 나머지 90%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라고.”
회색 마스터는 혜성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나중에 따져요.”
“맞습니다. 어쨌든 잘 된 거 아닙니까?”
막내와 한수호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혜성의 스텝업이 자신의 일처럼 기쁜 눈치였다.
하지만 혜성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뒤, 회색 마스터를 노려보며 물었다.
“말을 들어보니 넌 내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군. 전에 누군가가 내게 말했지. 나와 넌 인연이 있다고. 넌 정확히 누구냐? 어째서 나에 대해 이렇게 잘 아는 거지?”
이게 단순히 버프를 받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리고 퍼스트 게이트에는 뭐가 있었나? 왜 내가 퍼스트 게이트에 접근하는 걸 막은 건가?
혜성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회색 마스터는 잠깐 말없이 혜성을 바라봤다.
‘뭐지?’
혜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놈은 적을 대하듯 살기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회한, 씁쓸함, 고독 등이 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기억이 없을 테지만, 너와 난……”
***
지하 마켓 통제탑.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혜성이 지하 마켓에서 날뛰고 모든 게 엉망이 됐지만, 일부 설비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금이 간 대형 모니터에서는 혜성과 회색 마스터의 대화가 한창 나오고 있었다. 혜성이 무의식적으로 회색 마스터의 바람 스킬을 사용해 콘크리트 파편을 막아낸 직후였다.
“내가 방금 뭘……”
혜성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표정. 그의 정면에는 회색 마스터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쯧쯧. 마스터나 되는 양반이 실수로 한 번에 못 죽였을 리는 없고. 역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가? 하긴, 그와 이혜성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사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색 마스터가 오늘 혜성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싸우게 한 건 단순히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시험보다는 진화를 끌어내기 위한 과정.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꼴을 봤을 때, 회색 마스터는 혜성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이혜성. 퍼스트 게이트의 일도 그랬지만, 넌 아직 진실을 알 준비가 안 됐어. 네가 진실에 접근하는 건 조금 미래의 일.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 뒤다.”
사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