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회색 마스터 (6)
안국역 3번 출구.
반투명한 주황색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입구를 막고 있었다. 외부에서 반쯤 푼 결계의 흔적이었다. 공간이 나뉜 듯 입구 안쪽에서는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네. 지금 대기 중입니다. …… 제가 언제 실수하는 거 보셨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이번 사건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이혜성이 되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있었지만, 다부지고 당당한 체격이 티셔츠 아래에 실루엣으로 비쳤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이윽고 사내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토사구팽이라더니. 이젠 조직이 클 만큼 컸다는 건가? 하긴, 마스터가 셋이나 있는 게 처음부터 이상했지. 한국을 포기하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정리할 건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사내는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갑옷을 입은 능력자 다섯 명이 쓰러져 있었다. 혜성을 돕기 위해 파견된 NSA의 요원들이었다. 호흡은 완전히 정지된 상태. 그들의 곁에는 결계의 백도어를 뚫기 위한 노트북과 각종 아이템이 부서져 있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몇 단계 보안이 걸려 있었지만, 그쯤은 5분도 안 돼 풀었다. 그리곤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려 지금까지 그들이 만든 백도어를 전부 삭제하고, 새로운 암호를 걸었다.
“NSA 놈들. 이걸 뚫으려면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리겠지. 그럼 나도 슬슬 마스터 사냥을 해볼까?”
잠시 후, 그는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뒷짐을 지고 결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지하 마켓.
“형! 뭘 망설이고 있어요?”
“선배님. 저놈 말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막내와 한수호가 좌우에서 혜성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나만 없어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혜성은 아까부터 멍한 표정으로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이대로라면 곧 회색 마스터의 곁으로 걸어갈 것 같았다.
“설마 놈은 최면술사인가?”
막내는 정면의 회색 마스터를 홱 돌아봤다.
혜성은 지하 마켓의 진법을 이겨낸 덕분에 정신력이 크게 강화돼 있었다. 홀쭉이와 뚱뚱이의 최면쯤은 가볍게 이겨낼 수 있는 상태.
문제는 회색 마스터의 최면 능력은 지하 마켓의 진법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이었다.
회색 마스터가 그의 추측대로 최면술사라면 방법은 하나.
막내는 한수호를 쳐다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한수호도 그와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막내는 회색 마스터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콰쾅, 놈의 오른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동시에 한수호도 놈의 왼쪽으로 돌아가며 물의 폭발을 일으켰다.
‘우리의 공격이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의 주의를 잠깐이라도 다른 데로 돌린다면……’
막내는 연달아 화염구를 날리다가 멈칫했다.
폭연 사이, 뒷짐을 지고 태연히 서 있는 회색 마스터가 언뜻 보였다.
“좀 귀찮군.”
놈은 약간 짜증 나는 표정으로 막내를 힐끔 노려봤지만, 그뿐이었다. 놈은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혜성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막내는 혜성을 힐끔 돌아봤다. 혜성도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만으로 마스터를 상대하는 건 무리인가?’
막내는 ‘절망’이란 두 글자를 떠올렸다.
한수호도 잠깐 공격을 멈추고 막내를 바라봤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울상을 하고.
그때였다.
“공격을 멈추지 마.”
탕탕, 짧은 외침과 함께 회색 마스터의 뒤에서 돌연 긴 총성이 두 방 울렸다.
“누구지?”
“뭐야?”
막내와 한수호는 즉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욱하게 낀 수증기를 뚫고 가녀린 그림자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총과 연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능력자. 제주도에서 본 혜성의 숨은 조력자였다.
“밤안개의 제자냐?”
회색 마스터는 강지영을 돌아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보인 표정의 변화였다.
강지영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회색 마스터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탕탕탕, 그녀의 총구가 연신 불을 뿜었다.
쇄애액, 오른손에 들린 연검도 놈을 향해 날카로운 검기를 쏘아댔다.
“쯧. 밤안개가 직접 와도 될까 말까인데 겨우 그 제자라니.”
회색 마스터는 귀찮다는 듯 손을 슬쩍 휘저었다.
지금쯤 박무영은 회색 마스터로 변한 오창수와 한창 싸우고 있을 터. 설사 오창수를 제압했다고 해도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렸다.
강지영의 정면에 반투명한 벽이 생겼다.
콰앙, 그녀의 공격은 벽에 막혀 간단히 소멸했다. 오히려 벽이 그녀를 압박하려는 듯 그녀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걸렸다!”
강지영이 노린 건 바로 그 틈이었다. 회색 마스터가 자신을 향해 스킬을 쓰는 것.
그녀는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회색 마스터의 벽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파앗, 그녀의 어깨에서 날카로운 검에 베인 것처럼 핏물이 튀었다.
“크윽.”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그리곤 권총을 든 왼손을 쭉 뻗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은 회색 마스터가 아니라 혜성. 공격 스킬이 아니라 각성과 버프의 스킬이 담긴 탄환이었다.
***
성진 순대.
특유의 노린내가 섞인 순댓국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내가 왜 여기에……?”
혜성은 멍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테이블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댓국이 놓여 있었다. 알맞게 쉰 김치와 깍두기, 새우젓과 함께.
그는 무의식적으로 수저를 들어 들깻가루와 새우젓을 넣었다. 문득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였다. 늦은 점심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붐볐다.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느라 홀을 내다볼 틈이 없었다.
이상했다. 할 말은 많았는데, 목이 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릇을 비스듬히 세우고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말끔히 비웠다. 그리곤 재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놓고 나왔다.
그가 막 문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아이고 손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목소리였다.
그는 울먹이며 뒤를 돌아봤다. 파마머리 아줌마가 거스름돈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싸구려 사탕 두 개와 함께.
혜성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서도 안 됐다.
파마머리 아줌마가 웃으며 뭐라고 말했다. 그는 멍하게 아줌마를 바라봤다. 아줌마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확실히 들렸다.
“……그게 가족이니까요.”
“그게 가족이다.”
혜성은 아줌마의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혜성은 웃었다. 파마머리 아줌마도 그를 따라 웃었다.
***
“형! 정신 차려요!”
“선배님!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혜성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한바탕 긴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파마머리 아줌마가 쥐여 준 사탕 두 개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전투로 단련된 굳은살뿐이었다. 다만 외부에서 버프라도 받았는지 은은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광장 중앙에 당당하게 서 있는 회색 마스터가 제일 먼저 보였다. 막내와 한수호는 피투성이가 돼 놈의 좌우에 쓰러진 상태였다.
“혜성 씨.”
왼쪽 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면을 쓴 강지영이었다. 그녀도 핏물이 배어나오는 오른손을 감싸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상이 심한 듯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목소리는 밝았다.
“괜히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혜성 씨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신지는 혜성 씨가 제일 잘 알잖아요.”
강지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하마터면 호적 파이고 쫓겨날 뻔했습니다. 블랙에게 몸을 팔고 받았다고 하면, 아마 돈을 집어 던지시며 당장 나가라고 하셨을 겁니다.”
혜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 넌 내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자랑스러운 요원이다.
그의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격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 때문에 불만도 많았고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이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결심이 선 건가?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회색 마스터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쓰게 웃었다. 그리곤 막내와 한수호, 강지영을 차례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난 다 할 수 있단 말이지.”
회색 마스터의 표정과 말투에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났다.
놈은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덩이들이 놈을 중심으로 둥실 떠올랐다. 무형검이 없어 형태는 달랐지만, 유수혁의 염동력이었다.
놈은 다시 양손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각각 바람과 물의 기운이 맺혔다. 이번엔 우민창의 능력.
그 외에도 발을 슬쩍 내밀자 퍼스트 게이트에서 김 대위가 사용했던 빛의 속성이 나타났다.
“방금 몇 개를 사용한 거야? 어떻게 저런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조금 전의 최면술도 그렇고. 설마…… 지금까지 선배님이 상대했던 적들의 스킬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막내와 한수호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그 이름처럼 모든 스킬의 마스터. 너무 황당해서 욕도 나오지 않았다.
- 모든 각성자는 하나의 능력만 지닌다. 물론 우민창 같은 듀얼 각성자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방금 놈이 보여준 능력들은 각성자에 대한 현대의 이론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전처럼 동료들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너 혼자 뭘 어쩔 생각이지?”
회색 마스터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객관적으로는 놈의 말이 맞았다. 지금 혜성은 유수혁의 능력을 카피하고 부상까지 당한 상태. 그가 자랑하는 2차 각성으로 놈의 능력을 카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회색 마스터가 보여준 다양한 스킬을 고려할 때, 설사 놈의 능력을 카피한다 해도 그가 이길 확률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은은하게 빛나는 자신의 손을 다시 슬쩍 내려다본 뒤,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늘 미친 듯이 구른 덕분에 뭔가 새로운 힘을 얻은 것 같거든. 특급 버퍼의 도움도 받고 말이야.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