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17화 (117/150)

# 117. 회색 마스터 (5)

63 스퀘어 로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장진우는 떨어진 머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평소 경험이 풍부하다고 자부했지만, 이번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처음부터 밤안개를 노린 함정이었나?’

밤안개는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자. 블랙의 입장에서 보면 계산이 불가능한 적이었다. 그래서 이번처럼 큰 테러를 자행하고, 밤안개를 유인한 것이다.

이곳 어딘가에는 고성능 몰래 카메라도 있을 터. 지금쯤 밤안개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천하의 밤안개가 한 방 먹었군.’

그는 조금 전까지 밤안개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밤안개는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당황하면서도 화가 단단히 난 눈치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게 가짜라면, 진짜 회색 마스터는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장진우는 지하 마켓의 혜성을 떠올렸다.

자신은 회색 마스터의 분신이나 대리인에게 처참하게 당했다. 그리고 진짜 회색 마스터는 가짜보다 몇 배는 강할 터. 혜성도 강하긴 하지만, 놈은 차원이 다른 능력자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바지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몬스터의 통뼈에 특수 합금을 섞어 만든 물건이었다. 격렬한 전투 탓에 살짝 금이 가긴 했지만, 사용에 지장은 없었다.

가짜 회색 마스터가 죽은 탓인지 전파 교란도 사라진 상황이었다.

“여기는 황금 뻐꾸기. 둥지……”

장진우는 단축 번호 1번을 길게 눌러 본부에 연락했다.

회색 마스터가 정말 지하 마켓에 있다면, NSA의 요원들을 당장 그쪽으로 투입해야 했다.

***

지하 마켓.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반갑네.”

회색 마스터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

외모만 보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깊은 두 눈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절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위엄.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꿰뚫는 것 같았다.

‘저자가 마스터인가?’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놈을 노려봤다.

차성진을 비롯해 최근 서울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의 배후. 동생을 호흡기에 의지하게 만든 원수. 그리고 자신의 최후를 빛내줄 거물급 악당.

게임으로 치면 마침내 끝판왕이 등장한 셈이었다.

“왜 다들 말이 없지?”

회색 마스터는 주위를 둘러보며 재차 빙그레 웃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벽에 기대앉은 유수혁에게 향했다. 유수혁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묘한 표정으로.

“실망이군. 그토록 원하던 힘을 줬는데, 오히려 전보다 퇴보한 느낌이야. 차라리 일본에서 내게 덤볐을 때가 훨씬 좋았어. ‘능력치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잊은 건가? 쯧쯧.”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씨발 누구한테 훈계질을 하……”

유수혁이 뭐라고 말하며 억지로 일어나려는 찰나, 그는 무심하게 오른손을 슬쩍 내저었다.

쾅, 유수혁의 몸이 콘크리트벽 속에 들어갔다.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저건 무슨 수법이지?’

혜성은 눈을 크게 뜨고 유수혁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유수혁이 박힌 콘크리트 주위에는 실금 하나 없었다. 모래로 만든 거푸집에 유수혁이 들어간 것처럼.

물론 혜성도 타격을 가해 상대를 벽에 처박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충격을 주지 않고 원하는 대상만 밀어 넣는 기술은 금시초문이었다.

“근성 없는 놈. 저런 놈을 한때나마 내 후계자라고 생각했다니. 나도 눈이 멀었군. 그래도 들인 돈이 있으니 죽이진 않겠다.”

회색 마스터는 벌레를 보듯 차가운 눈으로 유수혁을 바라봤다.

놈의 실력을 본 탓일까?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이 새……”

막내가 화염구를 날리려다가 회색 마스터와 눈이 마주치곤 움찔했다. 그리곤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회색 마스터는 차원이 다른 강자다. 섣불리 공격했다간 한 방에 간다.’

막내는 이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한수호도 공격 자세를 취했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섰다.

“잘 생각했어. 괜히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회색 마스터는 막내와 한수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마치 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는 혜성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이혜성. 넌 왜 우리를 적대시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싸울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야.”

“이유가 없다고? 무슨 개소리냐?”

혜성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쳤다.

“강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아름다운 논리인가? 이쪽으로 와라.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하찮은 인간들 위에 군림할 자격이 있다.”

회색 마스터는 혜성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점잖게 말했다.

“미친놈.”

혜성은 차성진을 떠올렸다. 결전의 영역에서 차성진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같은 대답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내 가족은 능력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아무리 적이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거든. 이 개자식아.”

그는 그때처럼 가래침을 뱉고 차갑게 대답했다. 흥분한 탓인지 평소보다 입이 거칠었다.

“가족이라. 참 좋은 말이지. 그 일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부하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거든. 그런데 그 가족들도 너하고 같은 생각일까?”

회색 마스터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웃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네 부모님은 너 때문에 여생을 음지에서 보내야 하지. 네 동생이 그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오빠를 잘못 만난 탓도 있고. 그럼 가족들이 너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까?”

“…….”

“그들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단 하나. 네가 사라지는 것뿐이야. 물론 네 몸값으로 20억 원쯤 주면 더 좋겠지. 뭐, 돈이야 원하면 그 이상도 얼마든지 줄 수 있고.”

“미친 새끼. 가족은 당연히……”

혜성은 큰 소리로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왜? 내 말이 틀렸나?”

“그건, 그건…….”

혜성은 말끝을 흐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성적으론 지금 놈의 말이 자신을 흔들기 위한 궤변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엔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가족의 행복. 거금.

회색 마스터는 혜성이 지금까지 악착같이 싸운 이유를 당근으로 내밀었다.

***

“형. 저 새끼가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요. 헛소리는 괜히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요.”

“맞습니다. 선배님의 부모님께서 어떤 분들이신지는 선배님이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막내와 한수호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차례대로 말했다. 하지만 혜성의 눈동자는 여전히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제안하지. 우리 쪽으로 와라. 그럼 네게 누구보다 강한 힘과 부귀영화를 주겠다. 그리고 네 가족에겐 일상의 평화와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을 주지. 너도 좋고, 네 가족도 좋고. 이거야말로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회색 마스터는 혜성을 환영하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헛소리 집어치워.”

누군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막내였다. 녀석은 오른손을 휘둘러 거대한 화염구를 발사했다. 회색 마스터가 혜성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에너지를 모아 만든 회심의 일격이었다.

회색 마스터는 막내를 힐끔 쳐다봤다. 가소롭다는 듯이. 놈은 손을 들어 막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콰쾅, 곧 놈의 머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하지만 잠시 후 연기가 걷힌 뒤,

“저 괴물 같은 놈.”

막내는 질린 표정으로 주춤 물러섰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데미지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흔적은 남을 줄 알았는데, 놈은 작은 그을음 하나 없었던 것이다.

“괜찮군. 잘만 가르치면 제법 쓸만하겠어. 지금 내 제안은 이혜성만 해당하는 게 아니야.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라고. 여기서 죽으면 뭐가 나오지? 기껏해야 순직 보상금 약간에 훈장 하나 아닌가? 그러니 알량한 애국심 때문에 귀한 목숨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

회색 마스터는 오히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의 재롱이 귀엽다는 투였다.

“형. 인제 어쩌지?”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혜성을 바라봤다.

놈은 그들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 게다가 혜성은 2차 각성으로 유수혁의 능력을 카피한 상태. 놈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솔직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혜성은 아까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회색 마스터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도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국민 영웅? 말이야 좋지. 지금은 다들 너를 우러러보고 있지만. 글쎄, 그게 얼마나 갈까? 유수혁의 경우에서도 봤잖아? 대한민국의 차세대 에이스라고 떠받들다가 네가 나타나니까 바로 돌아서는 거. 대중은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바로 식어버리는 존재라고. 중요한 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너 자신. 이혜성이란 개인의 행복이야.”

회색 마스터는 선언처럼 못을 박았다.

이상했다. 놈은 비교적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져 있었다. 마치 상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리고 놈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돼 혜성의 가슴에 꽂혔다.

“내가 없어져야 가족이 행복해진다.”

그는 회색 마스터가 했던 말을 계속 작게 되뇌었다.

***

혜성을 기준으로 1시 방향으로 100m쯤 떨어진 가게 안쪽.

“…… 중요한 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너 자신이야.”

회색 마스터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졌다.

‘벌써 시작한 건가?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강지영은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태블릿 화면에는 회색 마스터가 발산하고 있는 파장의 분석 자료가 나오고 있었다. 정신 계통의 P파가 유독 강했다. 일전에 홀쭉이와 뚱뚱이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최면 스킬의 흔적이었다.

‘밖은 어떻게 됐지?’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통신 상태를 확인했다. 여전히 통화권 이탈. 놈들이 친 결계가 생각보다 단단한 모양이었다. 이러면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혜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없어져야 가족이 행복해진다.”

혜성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놈이 한 말을 되뇌고 있었다.

회색 마스터의 최면 파장에 완벽히 걸려든 상태였다. 막내와 한수호가 어떤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혜성이 멍하게 서 있으니, 옆에 있는 막내와 한수호도 덩달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하나?’

강지영은 심호흡하며 태블릿을 백팩에 넣었다. 그리곤 천면 여우의 가면을 꺼내 얼굴에 고정했다.

유수혁이 등장할 때도 참았건만. 회색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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