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16화 (116/150)

# 116. 전쟁 (4)

DDP 앞 광장.

콰쾅, 마지막 남은 블랙의 능력자가 폭발에 휘말려 사라졌다. 다만 놈의 주위에는 이미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폭발은 놈을 중심으로 반경 1m에만 영향을 미쳤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지독한 놈들이군. 자폭이라니.”

한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광장은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이 돼 있었다. 지독했던 전투의 흔적이었다.

블랙의 다른 능력자 세 명은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시체가 된 지 오래. 특수 갑옷을 입은 요원들이 바쁘게 오가며 주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나마 긴급 계엄령 덕분에 시민이나 기자들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주위에 민간인들이 있었다면 적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게 더 골치 아팠을 테니까.

“신형 게이트 오프너가 역으로 놈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GPS가 된 셈이군. 다른 곳의 상황은 어때?”

그는 팀장급 요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중세 스타일의 검은색 갑옷을 입은 요원이었다.

“잠실, 의정부, 마포, 신림, 명동 등. 놈들의 잔당이 산발적으로 저항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단 놈들을 한쪽에 몰아넣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팀장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각 구역별 잔당은 많아야 다섯 명 남짓이었다. 다만 죽기를 각오하고 악착같이 저항하고 있는 탓에 완전히 제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CIC도 투입됐지?”

“물론입니다. 백호 등 민간 길드까지 총동원됐습니다.”

“잘됐군. 괜히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필요하면 군에도 지원을 요청하고. 이혜성은?”

“조금 전에 막내와 수호가 지하 마켓에 투입됐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혜성 씨를 만나 적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팀장은 지하 마켓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놈들은 지하 마켓의 입구에 이중 결계를 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백도어를 뚫어 막내와 한수호, 태호를 투입하는 게 고작. 더 많은 요원이 투입될 때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블랙 새끼들.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끝장낸다.”

한진영은 죽은 블랙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

지하 마켓.

혜성과 막내, 한수호는 유수혁의 곁을 맴돌며 공격을 퍼부었다. 혜성의 무형검, 막내의 화염구, 한수호의 물 속성 강기.

퍼퍼펑, 유수혁의 주위에서 연신 폭발이 터졌고, 그 여파로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라 퍼져 나갔다. 마치 사우나장에 있는 것처럼.

“이야, 이거 물건인데?”

막내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튕길 때마다 농구공만 한 화염구가 둥실 떠올라 날아갔다.

코드명 이그니스의 장갑.

송도의 연구소에서 막내의 신체에 맞게 만든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효과는 원거리 딜러의 약점인 막대한 에너지 소모와 딜레이의 개선.

거기에 유니크 등급답게 불 속성 데미지의 20% 증가라는 부가적인 기능도 있었다. 덕분에 단순히 화염의 위력만 놓고 보면 현재 막내는 AAA급 이상이었다.

한수호가 낀 아이템도 비슷했다. 코드명 테티스의 가호. 녀석의 물 속성 강기는 전보다 크고 선명해졌다.

혜성은 유수혁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무형검을 날렸다. 동시에 한수호는 유수혁의 왼쪽에서 상체를 낮추고 접근했다.

“흥!”

유수혁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3 : 1이었지만, 유수혁은 유수혁이었다. 그는 일단 혜성의 공격을 같은 무형검의 수법으로 방어했다. 그리곤 오른쪽으로 몸을 빙글 돌리는 한편, 섀도 나이트를 단검 형태로 바꿔 한수호의 가슴을 수평으로 베었다.

“지금이에요!”

한수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공격은 속임수였다. 놈의 단검이 가슴에 닿기 직전, 한수호는 엎드리는 것처럼 상체를 바싹 낮췄다. 유수혁의 섀도 나이트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걸렸다!”

막내가 한수호의 뒤에서 거대한 화염구를 발사했다. 수십 번은 연습한 것 같은 기가 막힌 협공. 손발이 척척 맞았다.

콰쾅, 유수혁은 오른쪽 옆구리에 화염구를 얻어맞고 주춤 물러섰다. 물론 방어구 덕분에 화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공격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크게 분노했다.

“이 쥐새끼들이.”

유수혁은 이를 갈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무형검이 막내를 향해 폭풍처럼 사납게 날아갔다.

주위에는 수증기가 안개처럼 자욱한 상태였다. 무형검이 수증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크!”

막내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 몰라 한수호가 대기 중의 수증기를 모아 방패처럼 만들어 막내의 앞을 보호했다.

‘유수혁답지 않게 흥분했군.’

혜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데미지 반사를 쓸 것처럼 오른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

“또 데미지 반사냐?”

유수혁은 혜성을 힐끔 돌아봤지만 무시했다. 대신 양손을 휘둘러 무형검을 날리며 막내에게 달려들었다.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며 성가시게 하는 막내와 한수호를 먼저 제거하려는 것 같았다.

그사이 혜성은 유수혁의 코앞에 접근했다. 혜성의 오른손이 옆구리에 닿기 직전, 유수혁은 이번에도 가시를 만들어 혜성의 데미지 반사를 차단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혜성은 돌연 오른손을 거둬들였다. 대신 왼손 어퍼컷으로 유수혁의 턱을 강타했다.

보통 펀치가 아니었다. 에너지를 실어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파괴력은 AAA급 이상. 왼쪽 주먹에 확실한 느낌이 왔다.

쾅, 유수혁의 몸이 순간적으로 위로 떠올랐다. 깨진 이빨과 핏물이 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방 더!”

혜성은 몸을 빙글 돌리며 오른발로 유수혁의 턱을 후려쳤다.

연속 두 방.

콰쾅, 유수혁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너야말로 학습능력이 부족하군. 내가 언제 데미지 반사를 쓸 거라고 했나?”

혜성은 아까 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3차 각성은 페이크. 놈의 방심을 유도한 뒤, 근접전으로 타격한다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다.

“이, 이 새끼가. 나를 뭐로 보고.”

유수혁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애썼다. 젠틀하고 말끔한 평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악귀처럼 피투성이가 돼 욕을 퍼부었다.

한참이 지나 겨우 일어났지만, 그는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린 상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른손에 달린 섀도 나이트도 더는 반응하지 않고 축 늘어졌다.

“유수혁.”

혜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유수혁을 내려다봤다.

유수혁은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다. 그의 영상을 돌려보며, 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2차 각성을 한 다음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와 한 팀을 이뤄 던전과 게이트를 휩쓰는 상상도 한 적이 있었다. 유수혁, 이혜성이라는 이인조 파티로.

하지만 지금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몬스터의 신체에까지 손을 뻗친 미치광이일 뿐. 영웅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다가와 혜성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의 얼굴에도 승자의 여유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혜성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이제 그만하자. 추한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다.”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유수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문득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수혁을 죽일 수는 없었다. 놈에게선 아직 알아낼 게 많이 있었으니까. 일단 놈의 단전을 파괴해 능력을 제거한 뒤, 본부로 이송할 생각이었다.

“누구 맘대로 끝이야? 나, 유수혁이야!”

놈이 최후의 힘을 짜내 무형검을 움직였지만, 아까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다. 혜성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놈의 무형검을 튕겨냈다. 채챙, 놈의 무형검은 우측에 있던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그때였다.

“이야, 이혜성. 유수혁마저 제압하다니. 이거 기대 이상인걸?”

뒤에서 돌연 박수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 물론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비아냥이었다.

잠깐 스톱. 혜성을 비롯한 모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누구……?”

혜성은 무심코 말하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 회색 마스터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63 스퀘어 로비.

박무영과 회색 마스터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둘 다 새처럼 움직이며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전투 스타일이었다.

콰쾅, 천장의 구조물들이 박살이 나 우박처럼 떨어졌다. 가뜩이나 엉망이었던 로비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정말 대단하군. 역시 전설은 전설인가?”

장진우는 구석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둘에게서 30m나 떨어져 있었지만, 전투의 충격파나 대기의 떨림 등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박무영은 싸울수록 빠르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 반면 회색 마스터의 속도와 위력은 처음 그대로. 박무영의 공격이 회색 마스터에게 타격을 가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5분쯤 지났을까?

파앗, 마침내 박무영의 검이 회색 마스터의 가슴을 가로로 길게 베고 지나갔다.

“그렇지!”

장진우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환호했다.

쿵, 회색 마스터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피부가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갈라진 가운데, 피가 꾸물거리며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인간의 붉은 피가 아닌, 몬스터의 녹색 피였다.

파지직, 피가 떨어진 바닥이 퀴퀴한 연기를 뿜으며 녹아내렸다.

“이런……”

놈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박무영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과 회색 마스터를 한참 동안 번갈아 바라봤다. 뭔가에 크게 놀란 것처럼.

‘왜 그러지?’

멀리서 지켜보던 장진우도 덩달아 긴장했다.

“너, 누구냐?”

박무영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검 끝으로 놈의 목젖을 겨누며. 흥분 때문인지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 몰라? 나는……”

회색 마스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랄 말고.”

박무영은 놈의 가슴을 걷어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악을 쓰는 것처럼.

“크윽!”

회색 마스터는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벽에 처박혔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넌 누구냐?”

박무영은 놈의 목에 검을 더욱 가까이하며 물었다. 놈의 가느다란 목에 엷은 핏자국이 생겼다.

“크크크.”

회색 마스터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혼자 키득거리는 정도였지만, 이내 로비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졌다.

“천하의 밤안개도 이젠 끝이군.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걸려들고 말이야. 너무 오래 쉬어서 감이 떨어진 건가?”

이윽고 회색 마스터는 웃음을 뚝 그치고 비아냥거렸다. 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목소리도 젊어지고 힘이 넘쳤다.

“이 새끼가!”

박무영의 검이 수평으로 움직였다. 빛이 번쩍거렸다고 느낀 순간, 놈의 머리는 목과 분리돼 바닥에 떨어졌다.

‘저게 뭐야?’

장진우는 눈을 끔뻑거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스르르 변했다. 변장이나 분신 스킬이 풀린 것처럼. 이어서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입가에 긴 상처가 있는 냉혹한 인상의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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