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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15화 (115/150)

# 115. 전쟁 (3)

63 스퀘어 로비.

‘역시 밤안개는 죽은 게 아니었나? 게다가 밤안개와 회색 마스터가 잘 아는 사이라고? 그럼 블랙은 얼마 전부터 국내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는 뜻인데. 대체 둘은 무슨 관계지?’

장진우는 머리가 복잡했다.

박무영과 회색 마스터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은밀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언뜻 보면 정말 오랜 친구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의 신형이 장진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

장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1시 방향으로 20m쯤 떨어진 천장이었다.

파팟, 둘은 천장의 구조물들을 밟으며 공중에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장진우가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저게 진짜 박무영의 솜씨인가?’

장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박무영을 주목했다.

명불허전.

박무영은 어느새 권총과 장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본 강지영과는 다른 레벨이었다. 강지영의 공격 또한 빠르고 변화무쌍했지만, 그의 스타일은 빠르면서도 파괴력이 넘쳤다. 마치 자신이 오리지널이라고 자랑하듯이.

콰쾅, 그의 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천장의 구조물들이 박살 났다.

더 놀라운 건 이에 맞서는 회색 마스터의 수법이었다. 놈은 분명 무기가 없이 맨손이었다. 하지만 놈이 오른손을 움직이면 전방의 구조물이 부서졌고, 왼손을 휘두르면 천장에 날카로운 흔적이 생겼다. 마치 검기가 지나간 것처럼.

회색 마스터는 단순히 박무영을 흉내만 낸 게 아니었다. 공격에 실린 기운도 밤안개와 똑같았다.

‘밤안개의 스킬까지 카피한 건가? 아니, 스킬이야 그렇다고 쳐도 무기는 어떻게 카피한 거지?’

장진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떴다.

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보는 것뿐. 다만 괜히 유탄이라도 맞아 개죽음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둘에게서 멀어졌다.

밤안개 대 회색 마스터.

장외 넘버원을 다투는 절대 강자들의 대결이 막을 올렸다.

***

지하 마켓 광장.

“젠장.”

혜성은 급히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파앗,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흘러내렸다. 유수혁의 오른손이 장검 형태로 변형돼 스친 것이다.

그나마 암흑의 수호자가 이중으로 어깨를 감싸 충격을 줄인 게 이 정도였다.

암흑의 수호자가 조금만 늦었으면, 혜성의 오른팔은 몸통과 분리돼 떨어졌을 것이다.

- 섀도 나이트라고 했나? 저 무기가 성가시군. 워낙 자유자재로 변하니 예측이 어려워.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두 명을 상대하는 기분이군.’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형검 하나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유수혁에겐 섀도 나이트의 손이 있었다. 무형검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과 섀도 나이트를 이용한 근거리 공격이 동시에 쏟아지는 상황.

혜성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2차 각성의 단점인 낮은 체력 때문에 슬슬 현기증이 일었다.

“왜? 네가 강탈한 대수영도 내 공격을 예측할 수 없나 보지?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건 내 전투 경험을 베이스로 했다고. 그러니 대수영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유수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얄밉게 이죽거렸다.

여유 넘치는 모습. 혜성을 쉽게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빌리티 캔슬링을 쓸까?’

혜성은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 그는 유수혁의 능력을 카피한 상태였다. 능력을 무효로 하는 파장을 쏘면, 그도 영향을 받아 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놈의 손에 달린 섀도 나이트. 놈의 손은 파장이 전혀 다른 몬스터의 것이기 때문에 아마 무효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어쩔 수 없다. 데미지 반사를 해볼 수밖에.

다시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답지 않게 조금 자신 없는 어투였지만.

‘좋아. 한번 해 보자.’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 수법은 다 알고 있다. 나 같으면 그건 사용하지 않을 거야.”

유수혁이 검지를 좌우로 까딱이며 비웃었다.

그 순간, 혜성은 바람처럼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유수혁의 왼쪽.

파팟, 놈의 무형검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손을 저어 놈의 무형검을 튕겨내는 동시에, 상체를 낮추고 놈의 왼쪽 옆구리에 바싹 붙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놈이 몸을 빙글 돌리며 뒤로 슬쩍 물러서는 게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놈의 오른손은 단검 형태로 변형된 상태. 그대로 그의 단전을 찌르려는 것 같았다.

‘이판사판이다.’

혜성은 피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대신 암흑의 수호자를 단전 쪽에 집중시키고, 놈을 따라가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누적 데미지 반사. 그의 오른손에 엷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혜성의 손바닥이 막 놈의 옆구리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놈의 옆구리에서 돌연 까맣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났다. 길이는 한 뼘 정도.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했다.

- 이건 뭐야? 멈춰!

대수영이 비명처럼 외쳤다.

혜성은 손을 거의 다 뻗은 상황이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콰직, 혜성의 손바닥이 놈의 가시에 꿰뚫리며 검붉은 피가 뿜어졌다.

“크윽!”

혜성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이어서 유수혁은 몸을 돌리던 탄력을 이용해 오른손 등으로 혜성의 관자놀이를 쳤다. 놈의 오른손은 어느새 가시 돋친 너클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혜성은 놈의 백스핀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

콰쾅, 혜성은 광장의 분수대에 처박혔다. 분수대는 물이 마르고 먼지만 잔뜩 쌓여 있었다. 콘크리트 파편들이 우수수 쏟아져 그의 머리와 어깨를 뒤덮었다.

“빨리 일어나라. 이 정도로는 안 죽는 거 아니까.”

유수혁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제길.”

혜성은 바동거리며 분수대 난간을 짚고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빈혈이 일었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분수대 난간에 기대섰다.

“학습 능력이 부족하군. 네가 데미지 반사를 한두 번 써먹은 것도 아닌데, 설마 내가 아무 준비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유수혁은 이죽거리며 셔츠의 단추를 풀어 보였다.

놈은 안에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갑옷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서기를 볼 때 최소 유니크 등급 같았다. 놈의 옆구리에 튀어나와 있던 가시는 갑옷에 흡수되듯 스르르 움직여 사라졌다.

“젠장.”

혜성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그나마 카피캣을 끼고 있어 다행이었다. 카피캣이 없었다면 그의 손은 아예 쓸 수 없게 되어버렸을 터. 근육이나 신경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통증 탓에 주먹을 쥐는 게 어려웠다.

“더는 보여줄 재주도 없는 것 같고. 슬슬 마무리하자.”

유수혁은 손가락을 움직여 무형검을 준비했다.

“누구 맘대로?”

혜성도 양손을 들어 무형검을 주위에 배치했다. 하지만 큰소리만 쳤을 뿐. 말과 달리 출혈 탓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럴 때 녀석들이라도 있었으면.’

그는 문득 막내와 한수호를 떠올렸다.

죽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예정보다 조금 빠를 뿐, 각오는 돼 있었으니까. 다만 녀석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게 조금 아쉬웠다.

‘이렇게 끝인가?’

혜성은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

“잘 가라, 이혜성.”

유수혁은 히죽 웃으며 양손을 높이 들었다.

놈 주위의 무형검이 열 개의 방향으로 천천히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혜성이 같은 무형검의 수법으로 공격을 막는 순간, 놈은 혜성의 품을 파고들어 일격을 날릴 것이다.

그때였다.

“흥! 누구 맘대로!”

퍼펑, 유수혁의 뒤에서 두 개의 폭발이 일었다. 불과 물의 기운. 그의 주위로 수증기가 자욱하게 일어난 가운데,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어떤 새끼야?”

유수혁은 성난 표정으로 뒤를 홱 돌아봤다.

안에 받쳐 입은 갑옷 때문에 데미지를 받진 않았지만, 대결을 방해받은 탓에 잔뜩 화가 난 눈치였다.

‘대체 누가? NSA의 요원인가?’

혜성도 의아한 표정으로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우리는 한 팀. 이혜성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간다.”

“이혜성의 좌청룡, 우백호. 좌 막내, 우 수호가 돌아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유수혁의 좌우에서 막내와 한수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 딴에는 제법 진지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장엄한 배경음악이라도 깔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디오스니 결연한 의지니. 이런 대사는 형만 하라는 법 있나요? 나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대사를 읊고 싶었다고요. 어땠어요? 좀 오글거렸나?”

막내는 혜성을 슬쩍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역시 선배님은 손이 많이 가는 타입입니다. 저희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한수호는 애답지 않게 근엄한 표정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너희들? 너희가 여기서 왜 나와?”

혜성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너무 뜻밖이어서 말까지 더듬었다.

‘저 녀석들은 지금쯤 도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녀석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밖에는 놈들의 폭탄 테러가 있을 텐데,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유수혁도 둘을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가에 혼자 놔둔 애도 아니고. 형을 혼자 두고 떠나려니 영 내키지 않아서요. 비행기에 탔다가 도로 내렸죠. 뭐, 이번 기회에 새로 받은 아이템도 시험해 보고 말이에요.”

막내는 히죽 웃으며 오른손에 붉은 장갑을 꼈다. 에너지를 주입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손 주위에 붉은 기운이 맺혔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일대일 대결이다. 셋은 좀 비겁한 거 아니냐? 이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건 애들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니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장땡입니다.”

한수호도 웃으며 오른손에 파란 장갑을 꼈다. 물처럼 푸른 기운이 맺혀 넘실거렸다.

“이 미친 새끼들.”

혜성은 뭐라고 욕을 퍼부으려다가 피식 허탈하게 웃었다. 녀석들의 뒤쪽, 골목 어귀에서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미쳤는데? 우리 말은 바로 하자고. 미친놈이 미친놈이라고 하니까 이상하잖아.”

악의 없는 거친 목소리. 태호였다. 다만 녀석은 싸움에 휘말릴까 봐 거리를 두고 숨어 있었다.

“넌 또 왜 온 거냐?”

“섭섭하게 왜라니? 내가 아니면 네 걸레 같은 몸뚱이는 누가 치료하냐? 치료는 나한테 맡기라고.”

태호는 짐짓 거만하게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이, 이 새끼들이 사람을…….”

혜성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순간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 터. 그는 눈꺼풀을 크게 깜빡여 눈물을 삭였다.

혜성에겐 역시 이 조합이 최고였다. 막내와 한수호, 그리고 태호까지. 일명 이혜성 군단이 다시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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