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전쟁 (2)
NSA 본부, 임시 지휘센터 후문 주차장.
“송도에서는 아직 연락 없어?”
한진영은 초조하게 서성이며 입구 쪽 도로를 바라봤다. 비상 대피령이 떨어진 상태. 한낮이었지만, 주위엔 차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도착할 때가 됐습니다.”
팀장급 하나가 누군가와 계속 전화하며 대답했다.
“왔다!”
요원 하나가 크게 외쳤다.
잠시 후, 특수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형 트레일러가 등장했다. 이어서 두꺼비를 비롯한 낯익은 연구원들이 내렸다. 밤을 새운 탓에 다들 눈 밑이 시커멓고 초췌했다.
“어떻게 됐어?”
한시가 급했다. 한진영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혜성 씨가 공격을 당했을 때 위성에서 찍은 특수 파장을 분석했습니다. 일반 게이트와 달리 PH가……”
두꺼비 요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말이 길고 어려웠다. 왜 똑똑한 놈은 다들 말을 어렵게 하는 건지.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한진영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이건 놈들이 사용한 변형 게이트의 파장에 반응하는 광역 탐지기입니다. 이거라면 놈들이 변형 게이트를 사용하기 전에 놈들의 위치를 잡을 수 있습니다.”
두꺼비는 트레일러를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좋았어!”
한진영은 대번 주먹을 움켜쥐며 환호했다.
잠시 후, 특수 지게차가 트레일러 뒤로 다가와서 물건을 꺼냈다. 연구원들은 사전에 연습한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조립을 시작했다. TV에 나오는 전파 망원경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뼈대를 맞추고 형태를 갖췄다.
“경보 시스템을 뚫는 아이템, 그리고 다시 그 아이템을 찾는 새로운 레이더라니.”
한진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문득 꼬리잡기가 생각났다. 한쪽에서는 경계시스템을 뚫을 수 있는 신형 아이템을 개발했고, 반대쪽에서는 그 신형 아이템을 잡을 수 있는 신형 탐지기를 개발했다. 아마 놈들은 곧 탐지기를 뚫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할 터. 끝이 없이 돌고 돌았다.
“혜성 씨, 조금만 버텨.”
한진영은 탐지기를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지하 마켓.
아까까지 혜성이 싸운 것은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유수혁과 싸우는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혜성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놈의 공격을 맞고 2차 각성을 유도했다. 둘 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공격에 전부 담겨 있었다.
“크하하하! 그래, 이거야!”
유수혁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혜성의 공격 때문에 여기저기 베이고 피가 묻어 있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놈은 오히려 데미지를 받을수록 더욱 악착같이 공격했다.
둘의 거리는 약 10m. 파팟, 놈의 무형검이 10개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일제히 혜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주위를 얼어붙게 했다.
‘역시 몬스터의 힘을 이용한 건가?’
혜성은 뒤로 폴짝 뛰어 물러나는 한편, 원을 그리듯 양손을 저었다.
채채챙,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번쩍이는 가운데, 그의 무형검은 놈의 공격을 전부 튕겨냈다.
조금 아이러니했다. 유수혁이 강해진 덕분에 2차 각성의 혜성도 강해졌다.
전처럼 물을 이용해 무형검을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놈의 눈동자, 미세한 움직임, 파공음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무형검의 이미지가 혜성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유수혁은 뒤로 물러서며 흩어진 무형검을 거둬들였다.
‘지금이다!’
혜성은 상체를 숙이고 놈에게 돌진했다. 잔상을 남기며 바람처럼.
2차 각성을 통해 기본적인 능력은 그가 위였다. 놈이 무형검을 거둬들이는 것보다 그가 놈의 품을 파고드는 게 더 빨랐다.
‘유수혁은 여느 원거리 딜러와 달리 근접전에도 능숙하다. 근거리에서 치고받으며 데미지를 모은 뒤, 누적 데미지 반사로 단숨에 끝낸다.’
이것에 혜성이 그린 그림이었다.
상대의 스킬을 무효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아직 미완성이었다. 가급적 3차 각성에서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혜성이 어퍼컷으로 놈의 턱을 가격하려는 순간이었다.
“겨우 이거였어?”
그의 귓가에 놈의 비웃음이 들렸다.
‘뭔가 있다!’
혜성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거두고 물러섰다.
늦었다. 놈의 오른손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경황 중인 탓에 뭔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다.
그가 위험을 감지한 것은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후. 그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암흑의 수호자도 놈의 그림자를 막을 수 없었다.
파앗, 그의 가슴에서 핏물이 가로로 길게 튀었다.
“젠장.”
혜성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널 찾아왔겠어?”
유수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죽거린 뒤, 말을 이었다.
“넌 아이템들을 동료로서 받아들였다며? 그럼 실질적으론 2 : 1인 셈이잖아? 그래서 나도 동료를 데려왔지.”
“미친놈.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혜성은 신음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놈의 오른손을 노려봤다.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 이게 바로 진화라는 거다.”
유수혁은 오른손의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놈은 손목 아래가 잘린 상태였다. 어차피 다시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 대신 놈은 손목 아래에 다른 것을 붙이고 있었다. 암흑의 수호자처럼 일정한 형태가 없이 일렁이는 그림자였다.
“설마…… 섀도 나이트의 손을 이식한 거냐?”
혜성은 뒤늦게 놈의 손을 알아보고 경악했다.
섀도 나이트.
일본 서남부에서 최초로 나타난 AAA급 몬스터. 일본 영화에 나오는 닌자처럼 생긴 놈이었는데, 진짜 무서운 건 놈의 양손이었다.
놈의 손은 단검이나 갈고리처럼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가능했고, 그 날카로움은 유니크 아이템도 뚫을 정도였다.
“맞아. 아직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유수혁은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섀도 나이트는 단순히 그의 손을 대신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암흑의 수호자처럼 자의식을 갖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타입 같았다.
‘이걸 믿고 돌아온 건가?’
혜성은 신음을 삼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카피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스킬과 능력이었다. 몬스터의 무기까지 카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카피캣으로 놈의 오른손을 카피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유수혁의 또 다른 시그니처 아이템, 무형검을 상대할 수 없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유수혁은 일렁이는 오른손으로 혜성을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
63 스퀘어 로비.
회색 마스터는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의 따뜻한 햇볕 아래, 강물이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저놈이 경찰을 전부 물린 건가? 잘됐군.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보이는 건 한강 변의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라 시체가 쌓인 참혹한 광경이었을 테니까.”
그는 한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변했다. 그가 기억하는 서울은 게이트와 던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 지금 이렇게 재건된 모습은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굳이 돌아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다 죽어가는 기운. 장진우가 깨어난 것이었다.
“당신, 보통 각성자가 아니군. 어떻게 당신 같은 각성자가 나올 수 있는 거지?”
장진우는 핏물을 뱉어내고 웅얼거리듯 물었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고개만 살짝 움직이는 것 외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걸 왜 묻지? NSA의 다른 요원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거냐?”
회색 마스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장진우는 순간 움찔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뭐 상관없지. 나도 마침 심심했으니까.”
회색 마스터는 그를 힐끔 돌아본 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뒷짐을 지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네 짐작대로다. 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각성자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각성자다. 각성의 시대 초기.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탐욕스럽고 추잡한 프로젝트에서. 너도 소문은 들어봤을 테지. 각국 정부가 앞다퉈서 시행했던 그 빌어먹을 계획을.”
회색 마스터의 목소리는 점점 크고 높아졌다. 격정 탓일까? 그의 어깨가 살짝 떨린 것 같았다.
“제로 프로젝트?”
장진우가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인위적인 각성 유도. 비윤리적 실험. 폐기. 인터넷에 떠돌다가 언제부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정부는 그 소문을 일체 부인한 상황. 현재는 미국의 UFO 설만큼이나 허무맹랑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회색 마스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다시 장진우가 억지로 짜내듯 묻는 도중이었다.
“드디어 왔나?”
회색 마스터는 돌연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큰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언제부턴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회색 마스터처럼 뒷짐을 진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밤안개?’
장진우도 회색 마스터를 따라 사내를 바라봤다가 얼음처럼 굳어졌다. 분위기는 좀 바뀐 것 같았지만, 언젠가 NSA의 기념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까지.
“오랜만이군. 그런데 하나도 안 늙었어. 뭐야? 세월이 비껴가기라도 한 거냐?”
회색 마스터는 사내를 향해 반갑게 웃었다.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 옛 친구나 동료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이었다.
“넌 많이 변했군. 왜 노화가 된 거지?”
박무영도 옛 전우를 대하듯 소리죽여 웃었다.
***
도쿄 L 호텔 VIP룸.
“상황은?”
검은 기모노를 입은 노인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복장은 일본 스타일이었지만, 말은 유창한 한국어였다. 그러고 보니 약간 각진 얼굴도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에 가까웠다.
“……이렇게 됐습니다. 지금 막 마스터가 박무영을 만났다고 합니다.”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63 스퀘어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 정부도 꽤 강하게 나오는군. 하긴, 이번 기회에 회색 마스터와 그 일당을 뿌리 뽑고 싶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신형 게이트 오프너에 대한 대비책도 나왔겠지?”
기모노의 노인은 깍지를 껴서 턱을 받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국 정부의 반응을 눈으로 본 것처럼.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저희 쪽 아이들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을 잘랐다.
“네?”
경호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의 조직에 우두머리가 세 명이라. 셋이 나눠 먹기엔 좀 아쉽지 않나?”
기모노의 노인은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어차피 조직이 너무 비대해졌어. 죽을 놈은 죽고, 남은 자들끼리 조직을 재정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면서 그는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한국 정부와 혜성이 나섰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회색 마스터였다. 게다가 유수혁도 건너간 상태. 회색 마스터를 제거하려면 좀 더 확실한 카드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