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전쟁 (1)
지하 마켓 광장.
회색 정장을 입은 유수혁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0m. 둘은 우뚝 서서 서로를 노려봤다.
“아까 공격은 인사 대신이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어? 치료 안 해?”
돌연 유수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
혜성은 놈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혹시 같은 편인가?’라는 생각도 잠시. 그러나 곧 오해임이 밝혀졌다.
“지금 너를 쓰러뜨려 봤자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 빨리 회복해서 전력으로 덤비라고.”
유수혁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혜성을 꺾는다. 놈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만 있었다.
‘내 2차 각성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가?’
혜성은 경계의 눈초리로 놈을 바라봤다. 놈이 언제 무형검을 날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유수혁은 전과 많이 변해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전처럼 말쑥했지만, 뭔가 냉소적인 미소가 깃들어져 있었다.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건가?’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수혁의 오른손을 주목했다.
그때 놈은 오른손을 크게 다쳤다. 지금은 양손에 카피캣과 유사한 검은색 장갑을 낀 상태.
일단 겉으로 보기엔 부상이 다 나은 것 같았지만, 장갑으로 가린 손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몬스터와 흡사한 기분 나쁜 무언가가.
‘일단 놈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 생각은 나중에 하자.’
혜성은 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비틀거리며 가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꼴이 말이 아니군. 도와줘?”
유수혁은 웃으며 왼손을 슬쩍 휘둘렀다. 백팩이 둥실 떠올라 혜성의 발밑에 떨어졌다.
혜성은 걸음을 멈추고 놈을 노려보다가 백팩을 주워들었다. 그는 보조 주머니에서 드링크제 형태의 약물을 꺼내 세 개를 연달아 들이켰다.
본래 모든 힐링 아이템은 사용할 수 있는 양과 방법에 제한이 있었지만, 그는 약병에 적힌 경고를 무시했다.
“크윽.”
혜성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대번 부작용이 나타났다. 눈이 충혈되고 전신의 혈관이 굵게 돋아난 가운데,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과도한 힐링 약물 복용에 따른 쇼크의 위험.
옆에 태호가 있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퍼부었겠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혜성은 의식이 가물거렸다.
- 이 미친 새끼야!
태호 대신 대수영이 머릿속에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암흑의 수호자도 일렁거리는 게 눈에 띄게 커졌다. 그의 주요 급소를 마사지하는 것처럼.
‘제길! 버텨야 한다!’
혜성은 벽에 기대서서 이를 악물고 의식을 집중했다.
다행히 놈은 정말 그를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블랙과 손잡은 거냐?”
혜성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시간 끌기. 아직 2차 각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약물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완전히 같은 편은 아니야. 그냥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잠깐 동맹을 맺었다고 할까?”
유수혁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놈이 말한 공동의 목적이란 혜성일 터. 놈은 옛 친구에게 말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지? 난 지난 몇 주간 한시도 널 잊은 적이 없거든. 어떻게 하면 널 찢어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수모를 갚을 수 있을까, 틈날 때마다 생각했지.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만나게 되니, 분노보다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고 고맙다.”
“뜬금없이 뭐가 고맙다는 거냐?”
“지금까지 다른 놈의 손에 죽지 않은 거 말이야. 널 죽이는 건 바로 나. 이혜성이란 먹잇감을 다른 놈에게 뺏기는 건 말이 안 되지.”
“미친 새끼.”
퉤, 혜성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었다.
그사이 혜성의 2차 각성이 서서히 옅어졌다. 안 그래도 오전부터 계속 싸운 탓에 체력과 EF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한꺼번에 약물을 과용해서 후유증이 있겠지만, 당장은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너야말로 죽지 못해 안달이 난 미친놈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놈은 빙글거리며 놀리듯 말을 이었다.
“나하고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지금쯤 네가 찾는 마스터도 행동을 개시했을 테니까.”
“뭐?”
“이런. 설마 회색 마스터가 너만 노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유수혁은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혜성은 장진우를 포함한 다른 요원들을 떠올렸다. 아까부터 연락이 끊긴 상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회색 마스터는……”
다시 혜성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어차피 우린 말로 해결할 상대가 아니잖아?”
그 순간, 유수혁의 신형이 혜성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혜성의 2차 각성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씨발, 덤벼.”
동시에 혜성도 놈이 서 있던 위치로 돌진했다.
***
63 스퀘어 로비.
“끄으으.”
장진우는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꿈틀거렸다.
회색 마스터와 싸움을 시작한 지 고작 2분. 처음엔 서로 비슷하게 타격을 줬다. 공격 방법도 순간 이동을 베이스로 한 직접 타격으로 똑같았다. 그러나 장진우는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반면, 회색 마스터는 멀쩡한 몸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있었다. 한마디로 마스터는 차원이 달랐다.
“더 보여줄 게 없나? 실망이군. 명색이 NSA 국장의 오른팔인데 이 정도라니. 쯧쯧.”
회색 마스터는 쓰러진 장진우의 복부를 밟고 비볐다. 혀를 길게 차면서.
“끄아아아!”
장진우의 고통에 찬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조금 전 놈의 주먹에 실린 강기에 복부를 맞았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단전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단전은 각성자의 에너지가 담긴 그릇. 그는 마른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아직 죽이지는 않을 거야. 국민 영웅 이혜성, 나아가 너희의 전설이라는 밤안개까지 곧 최후를 맞이할 텐데. 관객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회색 마스터는 히죽 웃으며 오른발로 장진우를 걷어찼다.
쾅, 장진우는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하필 머리를 부딪친 탓에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자는 혜성 씨와 다르다. 놈의 특기는 단순히 스킬을 카피하는 정도가 아니야. 이대로라면 혜성 씨도 위험하다. 어떻게든 혜성 씨에게 연락을……’
시야가 가물거렸다. 장진우는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치다가 이내 의식을 잃었다.
***
SJ 기획, 소회의실.
“상황은?”
박무영은 TV의 볼륨을 줄이며 물었다.
긴급 뉴스. 혜성이 테러범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며 고군분투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언제 다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니, 시민 여러분은 될 수 있으면 가까운 대피소에 머물라는 경고도 곁들였다.
“최악입니다.”
한수은은 멀리서 망원렌즈로 촬영한 사진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63스퀘어 로비, 장진우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돼 있었는데, 특히 단전을 다친 게 치명적이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안국역 근처에서 대기하던 다른 요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블랙으로 추정되는 능력자들의 기습을 받고 전부 전투불능 상태가 돼 있었다.
“이혜성은?”
“특수 결계 때문에 접근해서 직접 확인하진 못했습니다만, 옛 지하 마켓에서 지금 막 전투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 또 어떤 몬스터인가?”
“몬스터가 아닙니다. 파장이나 여러 증거로 봤을 때, 유수혁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한수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유수혁이란 이름을 강조했다.
“유수혁이? 하긴, 유수혁이 졌다고 물러설 성격이 아니지. 다만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
박무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수혁과 블랙의 다른 테러범들까지 가세했다. 판이 너무 커졌다.
“NSA는?”
“블랙의 연쇄 테러 때문에 정신없는 상황입니다. 처음 터졌던 테러도 아직 수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요 거점 경계 강화, 요인 보호, 변종 게이트의 출현에 대비한 비상 대기 등등. 현 상황은 NSA와 CIC가 전부 투입돼도 역부족이었다.
“회색 마스터가 아주 제대로 이를 갈고 나섰군.”
박무영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회색 마스터의 목적은 단순히 혜성을 제거하려는 게 아니었다. 혜성과 관련된 자들은 전부 제거하고, 동시에 차성진이나 다른 블랙이 못한 테러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봤느냐? 이게 바로 우리 블랙의 힘이다.’라고 온 세상에 알리려는 것처럼.
“언론 쪽은 어떻게 됐지?”
“일단 주요 언론매체들은 NSA가 막고 있습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적당한 선에서 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BJ들 때문에 통제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장 주위에 벌떼처럼 달려와 숨어서 보고 있습니다. 미친 새끼들.”
한수은은 그녀답지 않게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언론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미명하에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짜 언론들. 진실, 혹은 사회의 안정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그럴싸했지만, 어차피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건 돈이었다.
“사회적 혼란이야말로 블랙이 원하는 거야. 법은 나중에 따지고,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BJ들을 막아야 해.”
박무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수은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쇄 테러. 회색 마스터. 사회적 혼란.”
박무영은 눈을 감은 채 현 상황을 되뇌었다.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혼란과 광기에 빠진 대한민국. 그리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반사회적인 집단들. 그가 미리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은 하나.
“아무래도 내가 나설 때가 된 것 같군.”
그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났다.
“네? 직접 가시는 겁니까?”
한수은은 눈을 크게 뜨고 말끝을 높였다.
박무영은 그들 조직의 중심. 블랙이 지금까지 전면에 나서지 못한 것도 박무영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쪽에서도 마침내 마스터가 나섰잖아. 그러니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카드를 내놔야지. 회색 마스터가 판을 이렇게 키운 것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끌어내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몸도……”
한수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려는 찰나, 박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괜찮아. 밤안개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는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한수은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VIP께 요청해서 긴급 계엄령을 선포한다. 지금부터는 전쟁. 이번 기회에 국내의 블랙을 뿌리 뽑겠다.”
박무영은 주먹을 움켜쥐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