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회색 마스터 (4)
승합차 안.
경호원들은 다들 혜성의 싸움 구경에 몰두하고 있었다. 혜성 대 몬스터, 1 대 5의 싸움이었다.
혜성은 사령과 유사한 몬스터의 힘을 증폭해서 카피한 상태. 그는 먼저 지인들의 환영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그 과정에서 사령과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참아서 데미지를 모았다.
지인들의 환영을 다 없앤 뒤, 혜성은 누적된 데미지를 사령에게 반사했다. 그는 그동안의 레벨업을 통해 체력과 누적 데미지도 증가한 상태였다.
사령은 재생 능력을 뛰어넘는 막대한 데미지를 입고 가루가 돼 흩어졌다.
“저게 3차 각성인가? 재생력을 무시하고 한 방에 보내 버리는데?”
“저걸로 끝이 아니잖아. 강강약약. 게다가 놈에겐 어빌리티 캔슬링도 있다고.”
비록 적이었지만, 경호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몇 명은 영상을 뒤로 돌려 데미지 반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역시 일반적인 몬스터로는 안 됩니다. 만병귀는 없습니까?”
오창수가 맞은편의 마스터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병귀는 안 돼. 만병쌍수가 없거든. 그리고 이제 복습도 끝났다. 생각보다 성장 폭이 커서 데이터를 새로 뽑아야 했지만, 필요한 건 다 알아냈으니까.”
회색 마스터는 웃음기를 머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좀 안 됩니다. 이혜성도 문제지만, 장진우나 다른 NSA 요원들도 걸림돌 아닙니까? 그들은 그냥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그럴 리가. 지금까지는 이혜성을 공략하기 위한 빌드업인 셈. 진짜는 이제부터야.”
회색 마스터는 경호원에게서 태블릿을 건네받았다.
“먼저 장진우라는 놈부터 제거해볼까?”
암호를 입력하고 파일을 열자, 장진우의 사진과 신상명세가 나타났다.
나이 43세. NSA 국장의 오른팔. AA급 순간이동 능력자이지만, 실제로 체감되는 전투력은 AAA급 이상. 블랙의 1급 척결대상. 특기는…….
장진우는 워낙 전투 경험이 많고 유명했기 때문에 그만큼 분석 자료도 많았다.
“그럼 이혜성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나보다 이혜성을 먼저 보고 싶어 하는 놈이 있거든. 그놈에게 잠깐 순서를 양보하기로 했지.”
“다른 자요? 그게 누구입니까?”
“그런 게 있어. 이혜성을 만나기를 누구보다 학수고대하는 사람.”
회색 마스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혜성이 그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으로도 히죽 웃음이 나왔다.
***
안국역 밖.
장진우와 요원들은 초조하게 근처를 서성였다.
“……인근에 배치된 경찰 중 일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주위의 잔존 파장을 감지한 결과, 정신 계통 능력의 흔적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블랙 가운데 최면술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위를 조사하던 요원들이 차례대로 보고했다.
“설마 경찰들에게 최면이라도 걸었나?”
장진우는 턱을 쓰다듬고 곰곰이 생각했다.
혜성도 역 안으로 들어간 뒤 핸드폰 신호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지하 마켓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같이 싸우는 게 낫지. 기다리는 게 더 힘드네.”
“그러게 말입니다. 혜성 씨는 지금 어쩌고 있으려나?”
다른 요원들도 담배를 꺼내 물고 불안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하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블랙은 어디선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터.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놈이 지정한 장소까지 혜성을 호위해서 보내는 게 전부였다.
“긴장 풀지 마라. 놈들이 언제 기습할……”
장진우가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찰나였다.
부웅, 재킷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국장의 전화였다.
“네, 장진우입니다.”
- 장 팀장, 지금……
스피커 너머에서 국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요원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네. 알겠습니다.”
장진우는 무거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입니까?”
“또 사건이 터진 겁니까?”
요원들은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장진우를 바라봤다.
“방금 블랙으로 보이는 테러범에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장진우는 핸드폰을 재킷에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혜성 씨는 아직 안 나왔잖습니까?”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혜성 씨가 아니야. 테러범이 요구한 건 나야. 나 혼자만 지금 당장 놈이 말하는 곳으로 오라더군.”
“그게 어딥니까?”
“63 스퀘어. 범인이 다시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자네들은 여기서 혜성 씨를 기다리며 대기해.”
장진우는 욕을 내뱉으며 근처에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요원들이 뭐라고 말하면서 따라오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요원들의 입을 막았다. 시간이 없었다.
“이젠 나를 노리는 건가? 이 자식. 자꾸 우릴 뺑뺑이 돌려서 뭘 할 생각이지?”
승용차의 시동을 걸며, 장진우는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30분 후, 63 스퀘어.
장진우는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혼자 내렸다.
출입제한 구역. 아직 혜성 대 만병귀의 싸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가운데, 경찰 네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무장 경찰이 대번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난번에 만병귀에게 당한 탓일까? 나머지 경찰들은 총을 뽑은 뒤 장진우에게서 거리를 두고 대기했다.
“NSA 장진우입니다.”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재킷에서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
바로 태도가 달라졌다. 경찰들은 총을 거두고 그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장진우는 지갑을 도로 넣으며 현재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아침부터 서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는 이곳의 경찰들도 알고 있었다.
블랙, 테러, 능력자 간의 결투. 경찰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장진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경찰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이 많은 경찰 하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상대는 보통 능력자가 아닙니다. 최강의 적. 괜한 희생은 필요 없습니다.”
경찰들은 서로의 눈치만 봤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절차상의 문제도 지금쯤 국장님 선에서 처리됐을 겁니다.”
장진우는 다시 책임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제야 경찰들은 거수경례하고 물러났다. 본래 경찰과 NSA는 별개의 조직. 하지만 지금처럼 능력자가 관련된 상황에서는 NSA가 경찰보다 우위에 서는 게 관례였다.
장진우는 그들이 완전히 이탈한 걸 확인하고 정문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부서진 천장과 벽, 봉분처럼 쌓인 잔해, 여기저기 흩어진 핏자국 등이 눈에 띄었다. 아직 감식반의 조사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감식반도 힘들겠군. 이 넓은 63스퀘어를 전부 조사해야 할 테니까.’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로비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자네가 장진우인가? 정말 혼자 오다니. 듣던 대로 간이 크군.”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다만 로비에 아무도 없는 탓에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졌다.
장진우는 1시 방향을 돌아봤다.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동네 복덕방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평범한 인상. 하지만 주름진 눈가 사이로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회색 마스터인가?”
장진우는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노인 외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 날 아는 거야? 영광이군.”
노인은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혜성 씨처럼 시험하려는 건가?”
“아니야. 자네는 시험할 필요도 없어.”
“뭐?”
장진우는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순간 이동해서 노인의 배후를 공격했다.
쾅, 노인은 그의 주먹에 옆구리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뭐지?”
공격한 장진우가 거꾸로 당황했다. 블랙의 마스터라기엔 너무 쉽게 쓰러졌다. 마치 일부러 그의 공격을 맞은 것처럼.
“이번엔 내 차례인가?”
다음 순간, 노인이 장진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
장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이번엔 왼쪽. 장진우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노인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콰쾅, 장진우는 조금 전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벽에 처박혔다. 부서진 파편이 그의 머리와 어깨에 우수수 떨어졌다.
“네가 어떻게 내 스킬을?”
장진우는 아픈 것도 잊고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 놈이 펼친 건 분명 그의 순간 이동 스킬이었다.
“별로 대단한 스킬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
회색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놀리듯 되물었다.
‘역시 놈은 혜성 씨처럼 카피 스킬을 지닌 능력자인가? 그럼 지금 혜성 씨를 상대하는 건 누구지?’
장진우는 옷을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헉헉.”
혜성은 지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까지 그와 싸운 환영들은 검은 재가 돼 바스러지고 있었다.
“젠장. 역시 5 대 1은 무리인가?”
그는 소매로 입가의 피를 훔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암흑의 수호자도 지쳤는지 일렁이는 게 약해져 있었다. 대수영도 평소와 달리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오른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힐링 아이템이 든 백팩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선 2차 각성에서 회복하는 게 급선무.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백팩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1시 방향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뭐야?”
혜성은 아픈 것도 잊고 황당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옆구리에 길게 베인 흔적이 있었단. 단검 같은 게 스친 것 같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암흑의 수호자가 반응할 틈도 없었다.
- 언제? 어디서?
대수영도 뒤늦게 깜짝 놀라 비명처럼 외쳤다.
“크윽.”
혜성은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본 다음에야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이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옆구리를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계속 핏물이 새어 나왔다.
“이 수법. 설마……?”
혜성은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검. 예측할 수 없는 기습. 그가 고전했던 강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어서 누군가가 왼쪽 그늘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오랜만이야. 소문은 계속 들었어. 나 없는 사이에 엄청 잘나갔더군.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차세대 원탑이라며?”
놈은 웃음기를 머금고 비아냥거렸다. 예상대로 귀에 익은 목소리였지만, 예전과 느낌이 달랐다. 강한 힘과 음산한 사기(邪氣)가 동시에 느껴졌다. 몬스터의 힘을 받아들인 블랙의 능력자들처럼.
“유수혁?”
혜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놈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