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11화 (111/150)

# 111. 회색 마스터 (3)

지하 통로.

혜성은 5분쯤 천천히 걸어갔다. 폭격을 맞은 듯한 역이 나왔다.

개찰구를 넘어서 계속 내려가니, 곧 음습한 계단식 통로가 나타났다. 깜빡이는 조명, 작게 물웅덩이가 고여 있는 바닥, 그리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발걸음 소리까지. 공포영화에서 흔히 본 배경이었다.

‘좀비라도 나올 것 같군.’

혜성은 얼마 전에 본 세기말 좀비 영화를 떠올렸다.

- 끄아아악.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아까부터 괴성이 들렸다.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번 적은 인간형 몬스터인가?’

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형의 몬스터는 보통 신체 능력은 약해도 이를 커버하는 독특한 스킬을 한두 개씩 지녔다. 그가 신촌에서 싸웠던 바람의 송곳니가 대표적. 당시 그는 놈의 사기적인 스피드에 고전했다.

그때였다.

탕탕, 어둠 속에서 불꽃이 번쩍이며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성?’

혜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팍, 뒤에 있던 기둥에 구멍이 뚫렸다.

‘몬스터가 총을 쓴다고?’

혜성은 손가락만 하게 움푹 파인 기둥을 돌아보며 당황했다.

총은 두렵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자들은 소리만으로 총알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몬스터가 어떻게 인간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 크아아아.

다시 어둠 저편에서 놈들의 괴성이 들렸다. 아까보다 훨씬 큰 소리. 이어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이 달려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흥!”

혜성은 두 주먹에 강기를 맺고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면에서 나타난 희끗희끗한 그림자들을 보고 손을 거둬야만 했다.

숫자는 약 열 명이었다. 충혈된 흰자위와 흐리멍덩한 동공. 침을 흘리며 벌어진 입. 그리고 핏대가 선명하게 선 관자놀이까지. 이지를 제압당한 경찰들이 그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

승합차 안.

회색 마스터는 팔짱을 끼고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오창수를 비롯한 다른 경호원들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각자 핸드폰과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상에서는 혜성 주연의 액션 활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2차 각성은 없었다.

혜성은 차마 살수를 쓰지 못하고 팔다리를 부러뜨리는 선에서 경찰들을 제압했다. 하지만 경찰들의 머릿속에는 혜성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입력된 상태.

- 크아아아!

경찰들은 부러진 팔다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마치 같이 죽으려는 것처럼. 오히려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에 혜성이 간간이 얻어맞고 물러섰다.

“정신파 분석은?”

회색 마스터는 오창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오창수는 노트북 화면을 회색 마스터 쪽으로 돌렸다. 노트북 화면의 왼쪽에는 혜성의 전투 장면이, 오른쪽에는 이때 나오는 혜성의 각종 뇌파의 분석 자료가 떠 있었다.

사람은 뭔가에 몰두하면 순간적으로 그쪽에만 정신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마라톤에 몰두하면 어느 순간부터 깊은 명상에 빠진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지금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런 몰두. 혜성이 경찰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그들은 한쪽에만 집중된 혜성의 의식을 파고들어 분석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외부 저항력과 관련된 수치가 강합니다. 특히 PH1……”

오창수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늘어놓았다.

쉽게 말해 최면이나 환각으로 혜성을 상대하는 건 어렵다. 지하 마켓에서 뚱뚱이와 홀쭉이, 정신 계통의 진법을 상대한 덕분에 정신력이 무척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정신 공격에 일종의 내성이 생긴 건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회색 마스터는 턱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표는 벌거벗긴 것처럼 혜성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 혜성을 사냥하는 건 모든 분석이 끝난 다음부터가 진짜였다.

“2단계도 슬슬 끝내지. 3단계로 돌입한다.”

마스터는 씨익 웃으며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헉. 헉. 씨발.”

혜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절로 욕이 나왔다.

차라리 일반 몬스터를 상대하듯 죽이는 게 쉬웠다. 죽지 않을 정도로 타격하며 제압하는 게 더 어려웠다. 게다가 원래 미치면 괴력을 발휘하는 법. 상대는 일반인들이었지만, 놈들에게 얻어맞은 부위가 은은하게 아렸다.

“으으.”

경찰들은 전부 제압돼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모두 팔다리가 부러졌지만, 제정신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도 몇 명은 혜성에게 덤벼들려는 듯 발버둥 쳤다.

“밖은 어떻게 됐지?”

혜성은 크게 심호흡하며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통화권 이탈. 놈들이 전파 방해를 하는 게 분명했다.

“제길. 이제 어쩌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고민했다.

안에는 또 어떤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놈들의 무차별 테러가 걱정됐다. 일단 백팩에서 드링크 형태의 힐링 약물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이럴 때 막내나 수호가 있었으면.’

그는 문득 막내와 한수호를 떠올렸다.

물론 객관적인 전투력은 그가 둘보다 월등했다. 강한 적과 싸울 때도 중요한 마무리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이런 것과 별개로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큰 힘이었다.

“할 수 없지. 일단은 계속 전진할 수밖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아래로 움직였다.

놈은 지금까지 혜성이 치른 전투들을 복습하는 것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그를 낱낱이 분석하고 있을 터.

‘차성진을 흉내 낸 무차별 테러. 홀쭉이와 뚱뚱이를 흉내 낸 최면술. 그렇다면 다음엔 사령인가?’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혜성은 폐허가 된 지하 도심 남쪽에 들어섰다. 북쪽에 높이 솟은 관리 탑, 길 좌우에 길게 늘어선 상점들과 노점들, 그리고 그가 날뛰는 바람에 폭삭 주저앉은 ‘불타는 금요일’까지. 지하 마켓은 전과 비슷했지만, 거리가 엉망이었다. 경찰들의 급습과 이를 피해 도망친 상인들 때문이었다. 아이템들도 경찰들이 전부 압수한 탓에, 빈 상점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역시.”

그는 거리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중앙 광장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멈칫했다.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차원의 문. 던전이 열려 있었다. 안에 어떤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커먼 사기가 입구 밖까지 넘실거렸다.

“이제 진지하게 해보려는 건가?”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천천히 던전에 들어갔다.

***

사령의 던전과 비슷한 호숫가.

“형.”

“선배님.”

“혜성아.”

“혜성 씨.”

사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속삭이듯 작은 소리였지만, 이내 귀가 아플 정도로 크고 쩌렁쩌렁해졌다. 막내, 한수호, 태호, 그리고 김유진이었다.

“뭐지?”

혜성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그들은 혜성을 중심으로 사오 미터의 거리를 두고 사방에서 그를 포위해 왔다.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과 억양은 평소의 반가움과 거리가 멀었다. 혜성을 향한 원망, 분노, 실망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했다.

“개새끼들. 이젠 내 주변인들도 이용하는 건가?”

혜성은 가래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생각 같아선 한바탕 고함이라도 내질러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금니를 깨무는 것으로 화를 삭였다. 정신적으로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흥분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블랙이 만든 던전 안. 이들도 블랙이 만든 가짜일 게 분명했다.

‘미스터리의 스킬을 사용한 건가?’

퍼펑, 오른쪽에서 폭음과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막내가 다짜고짜 화염구를 발사한 것이다. 동시에 왼쪽에서도 한수호가 물 속성의 강기를 날렸다.

“흥!”

혜성은 양손을 수평으로 뻗어 녀석들의 공격을 막았다.

파팟, 정면의 태호가 자세를 낮추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태호는 바닥을 쓸듯이 오른발로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태호가 3분 무적 상태에서 보여준 체술과 비슷했다.

‘연구를 많이 했군.’

혜성은 왼발을 슬쩍 들어 태호의 발을 피했다.

타탕, 이번엔 뒤쪽에서 김유진이 에너지를 사용하는 특수 총을 발사했다.

혜성이 뒤를 힐끔 돌아보니 그녀는 왼손에 권총을, 오른손에 흐느적거리는 검을 들고 있었다.

강지영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터. 아무래도 블랙은 그녀가 강지영이라고 추측한 것 같았다.

“어림없다.”

혜성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움직여 총알을 피했다. 그러면서 왼발로 태호의 턱을 걷어찼다.

퍼펑, 다시 불과 물의 기운이 빠르게 그를 덮쳐왔다. 이번엔 1시 방향과 7시 방향. 2차 각성도 안 한 상태에서 넷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혹시 환영이 아닐까?’

그는 불과 물의 공격을 그대로 맞으려다가 급히 위로 솟구쳤다.

문득 만병귀가 떠올랐다. 놈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자에겐 진짜와 가짜의 공격이 무의미했다. 속임수로 생각했던 가짜 공격이 진짜 타격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 괜히 모험할 필요는 없었다.

타탕, 다시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혜성은 공중에 솟구친 상태. 피하긴 어려웠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무속성의 탄환이 아니었다.

“제길.”

혜성은 탄환을 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팔을 거뒀다.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느낌. 번개의 속성이 걸린 탄환이었다.

“죽어!”

막내와 한수호도 반 박자 늦게 그를 따라 솟구치며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불과 물이 아니었다. 칼날 같은 바람과 송곳 같은 얼음의 기운이었다.

‘듀얼 속성?’

혜성은 자연스럽게 우민창을 떠올렸다. 사용하는 속성은 달랐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우민창과 똑같았다.

뒤에서 날아온 탄환은 상체를 슬쩍 비틀어 회피. 막내와 한수호의 강기는 양팔을 뻗어 막았다. 이어서 태호가 뛰어오르며 공격하려는 찰나, 혜성은 오른발로 찍어 내리듯 녀석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결국 태호의 모습을 한 상대는 공격도 못 하고 도로 떨어졌다.

혜성은 큰 공격을 퍼부어 그들을 뒤로 물린 뒤, 공중에서 몸을 비틀고 제자리에 착지했다. AA급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잠시 소강상태. 넷은 눈빛을 교환한 뒤, 다시 혜성의 주위를 슬그머니 둘러쌌다.

‘미스터리. 우민창. 그럼 사령의 던전은……’

그때였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은은한 떨림이 느껴졌다.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뱀이나 그와 비슷한 몬스터일 게 뻔했다.

‘앞선 싸움은 내 각성 전 능력과 정신력 테스트. 이번엔 내 각성 후의 능력을 보자는 건가?’

혜성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적의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는 이제 혼자였으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적이 그의 능력을 이토록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면, 힘을 보여주고 정면에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몬스터든 회색 마스터든. 다 나와.”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울분에 찬 고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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