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회색 마스터 (2)
시화 공단 남쪽 진입로.
쭉 뻗은 지평선 너머에서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솟아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혜성이 탄 NSA의 특수차였다.
공단 내의 사람들은 전부 대피한 뒤. 항상 회색 연기를 뿜어대던 공장들도 오늘은 가동을 멈춘 상태였다. 먼저 온 NSA의 승합차 두 대와 요원 십여 명만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혜성이 탄 승합차는 다른 승합차의 옆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가겠습니다.”
혜성은 문을 열고 승합차에서 내렸다.
“알았네. 그럼 우린 밖에서 대기하지.”
장진우도 뒤따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깐 주위를 둘러봤다. 한낮임에도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어딘가에 CCTV나 몰래카메라, 결계 등을 설치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차성진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옛날 그놈하고 비슷한데?”
“맞아. 이건 진짜가 아닐 거야. 아마 혜성 씨를 시험하고 지치게 하려는 의도겠지. 제기랄.”
다른 요원들도 승합차에서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적의 노림수를 뻔히 알면서도 함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혜성은 승합차의 짐칸을 열고 장비를 점검했다. 정장, 장갑, 백팩에 넣은 치료제와 각종 도구.
“모두 오케이.”
그는 백팩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다가 문득 태호를 떠올렸다.
녀석은 막내보다 한 시간 전에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연우와 함께. 이제부턴 다쳐도 힐링 아이템이나 다른 치료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이제 막 도착했겠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지금은 눈앞의 임무에 집중할 때.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장진우를 돌아본 뒤 공단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끄아아아!
공단 안쪽에서 몬스터의 울음이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
혜성이 공장지대 중앙에 이르렀을 무렵.
쾅, 첫 번째 몬스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 갈라졌다. 신형 변종 게이트. 하늘의 게이트는 녀석을 토해내자마자 슬그머니 사라졌다.
“또 저 녀석이라니. 역시 내 힘을 시험하는 건가?”
혜성은 몬스터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도마뱀처럼 생긴 거대한 살라만더였다. 차성진이 그를 월드컵경기장으로 유인한 뒤 소환했던 불 속성의 몬스터. 같은 불 속성이었기 때문에 막내는 힘을 못 썼고, 고전 끝에 그가 2차 각성을 통해 힘으로 찍어 눌렀던 게 떠올랐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혜성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놈에게 다가갔다. 어깨에 멘 백팩을 내려둔 채.
- 끄아아아!
놈은 괴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쿵쾅, 쿵쾅, 놈의 발에 맞춰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흥!”
혜성은 양팔을 올려 머리를 보호했다.
쾅. 놈은 큰 머리로 혜성을 공격했다. 대형 트럭이 정면에서 들이받는 것 같았다.
혜성의 몸이 위로 살짝 떠올랐다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서너 걸음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2차 각성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 타격도 별로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공격했던 놈이 놀란 듯 주춤거렸다.
“겨우 이 정도였나?”
놈이 물러서려는 찰나, 이번엔 혜성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혜성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어깨로 놈을 들이받았다. 체격만 보면 1/10도 안 되는 작은 인간이 산처럼 거대한 몬스터에게 덤벼든 꼴이었다.
콰쾅, 놈은 차에 치인 것처럼 멀리 나가떨어졌다.
혜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돌진, 놈의 거대한 턱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혜성의 발끝에 확실한 충격이 전달됐다. 놈의 머리가 뽑힐 듯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다시 놈을 공격하려는 찰나.
- 끄아아아!
놈이 긴 꼬리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타깃은 혜성의 옆구리. 악에 받친 막무가내 공격이었다.
혜성은 피하지 않았다.
“안 된다니까!”
그는 양손으로 놈의 꼬리를 잡았다. 그의 열 손가락이 꼬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놈은 고통에 찬 울음을 길게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으랏차!”
혜성은 꼬리를 잡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렸다.
마침 1시 방향에 대형 크레인이 보였다. 그는 투포환을 하듯 크레인을 향해 놈을 던졌다. 쾅, 놈이 볼썽사납게 처박힌 뒤, 대형 크레인이 쓰러져 놈을 덮쳤다.
놈은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크레인이 넘어진 곳이 하필 놈의 긴 목 뒤였다. 사람으로 치면 거구가 뒤에서 깔아뭉개고 목을 제압한 상태였다.
2차 각성은 필요 없었다. 몇 분간 혜성의 무차별 구타가 있은 뒤, 놈은 고개를 옆으로 하고 축 늘어졌다.
“이건 준비 운동도 안 되는군. 내가 강해진 건가, 아니면 이놈이 약해진 건가?”
그는 정장에 묻은 먼지를 털며 피식 웃었다. 블랙은 카메라를 통해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을 터.
“다음!”
그는 카메라를 의식해 주위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
여의도 한강공원 주차장.
승용차들 사이에 검은 승합차 한 대가 몇 시간째 서 있었다. 몇 시간 전에 테러가 발생한 곳에서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경찰과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제법이군. 저런 놈들을 상대로는 2차 각성도 필요 없다는 건가?”
회색 마스터는 태블릿의 영상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상에서는 혜성이 해골 네크로맨서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번에도 2차 각성은 없었다. 보스인 붉은 해골이 부하들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혜성은 부하들을 지나치고 바람처럼 놈에게 달려들었다.
콰콰쾅, 해골들은 그의 강기를 맞고 수백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현재 기본적인 능력치도 AA급 이상이었다. 차성진의 함정에 질질 끌려다니며 고전하던 때와 달랐다.
“단순히 능력치만 높아진 게 아니군. 경험도 제법 쌓였어. 우리가 본의 아니게 놈의 레벨업을 도와준 셈인가?”
회색 마스터는 쓰게 웃으며 승합차 앞을 힐끔 쳐다봤다.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경호원 두 명이 노트북을 이용해 혜성의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해부. 체력, 파워, 민첩성, 순발력, 회복력 등의 신체적인 특징은 물론이고, EF를 비롯해 각종 무형의 파장까지 뽑아냈다.
회색 마스터의 맞은편.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창수가 경호원의 노트북을 힐끔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이런 테스트는 의미 없는 것 아니냐고?”
회색 마스터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맞습니다. 중요한 건 놈의 2차 각성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때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를 소환해서 놈의 진짜 실력을 테스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2차 각성은 대부분 분석이 끝난 상황이고 말입니다.”
“아니야. 2차 각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2차 각성의 핵심은 상대의 능력을 증폭해서 카피하는 거야. 단순한 따라 하기가 아니란 말이지.”
회색 마스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증폭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오창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회색 마스터는 조수석에 앉은 경호원의 노트북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증폭되는 배율은 각성 전의 기본 능력치에 비례하지. 쉽게 말해 각성 전의 능력이 강해지면, 각성 후의 카피도 훨씬 강해지는 거야. 따라서 이혜성을 분석할 때 중요한 건 각성 후가 아니라 각성 전이고.”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아, 오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의문이 들었다. 앞에 앉은 경호원들도 귀를 쫑긋거리며 회색 마스터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야 내가 놈이 가진 능력의 원조니까. 아마 나만큼 녀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
회색 마스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능력의 원조?”
오창수와 경호원들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회색 마스터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슬슬 다음 복습을 시작해볼까? 이번엔 정신력 점검이다.”
회색 마스터는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오후 1시.
혜성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엔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다들 식욕이 없었다. 잠시 후, 승합차는 깜빡이를 켜고 도로 옆에 멈췄다.
“여기라고? 역시 그동안 싸웠던 적들을 전부 불러오는 건가?”
혜성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블랙이 그를 오라고 한 곳은 인사동, 지하 마켓이 있던 곳이었다. 다만 지하 마켓은 워낙 넓었고, 여기저기에 비상 통로도 많았다. 요즘도 일대를 폐쇄한 가운데 NSA 요원들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 지하에 이런 광활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 각종 결계의 작동 원리는 무엇인가?
- 이런 마켓은 개인이 만들 수 없다. 대체 어떤 세력이 배후에 있을까?
- 지하 마켓이 과연 하나뿐일까?
등등. 지하 마켓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다만 오늘은 혜성을 노린 테러가 터진 상황이었다. 일대의 교통을 통제하고, 조사 요원들도 전부 철수한 상태였다.
“놈은 왜 혜성 씨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걸까? 단순히 혜성 씨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번엔 장진우가 문을 열고 먼저 승합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글쎄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혜성은 뒤따라 내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하고 회색 마스터가 인연이 있다고 했지? 혹시 회색 마스터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인가?’
역시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 제일 중요한 부분 몇 개가 빠진 느낌이었다. 얼마 전에 우민창을 상대했을 때처럼.
“그런데 좀 이상한데요? 경찰들은 다 어디에 간 거죠?”
요원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통제선 외에도 경찰 특공대가 주위를 지켜야 했다. 한데 지금은 드론과 장비만 보일 뿐,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놈들이……”
혜성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다른 요원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전에는 안국역 3번 출구가 있던 자리였지만, 지금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시커먼 공간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천장에는 희미한 전구 몇 개가 죽어가는 것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그럼 우린 주위를 맡겠네.”
뒤에서 장진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어서 다른 요원들을 불러 경찰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자, 블랙. 이번엔 또 뭘 준비했냐?”
혜성은 크게 심호흡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골이 송연한 가운데, 기분 나쁜 사기가 느껴졌다. 역시 함정. 그런데 그의 모습이 입구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이었다.
“크아아!”
시커먼 어둠 속에서 이성을 잃은 괴성이 들렸다.
몬스터가 아니었다. 약간 쉬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건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