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09화 (109/150)

# 109. 회색 마스터 (1)

혜성이 메신저를 통해 받은 건 김유진이 방금 작성한 기사였다.

[이혜성, 양손이 묶이다.]

제목부터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내용은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의 능력자를 빼간다는 것이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막내와 한수호였다.

막내의 힘든 가정사, 장래성과 거액의 계약금을 앞세운 외국계 길드의 유혹, 눈물을 머금은 수락. 물론 정확한 사연은 밝히지 않았지만, 막내의 가정사는 병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이미 증권가 찌라시에 퍼진 상태였다.

기사는 이제는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능력자의 외부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강력한 논조로 끝을 맺고 있었다.

“소문 참 빠르네.”

혜성이 한숨을 내쉬는 찰나, 김유진에게 전화가 왔다.

- 제가 보낸 기사 봤죠?

그녀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무척 다급한 어조로.

“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직 NSA 내부적으로 사직서도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 병원 관계자로 보이는 익명의 제보자한테 제보가 들어왔거든요. 이런 일이 있으면 진즉 저한테 말했어야죠. 지금 이 기사 때문에 인터넷도 난리예요. 국민 청원까지 올라갔고요.

김유진은 인터넷의 반응을 요약해서 전해줬다.

- 대한민국이 중국, 일본한테 자금력에서 밀리는 게 말이 되나?

- 다른 요원도 아니고 이혜성의 최측근이 떠난 건데, 정부는 대체 뭘 하는 거냐?

- 이거 이혜성을 견제하기 위해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다들 자기 일처럼 분개. 막내를 돕고 싶다는 독지가들의 전화 때문에 신문사 전화가 마비될 정도였다.

- 성후 씨하고 수호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한발 늦었습니다. 방금 비행기 타러 들어갔거든요.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서 위약금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혜성은 게이트를 힐끔거리며 쓰게 웃었다.

- 지금 위약금이 문제예요? 당장 돌아오라고……

“꼭 돈 때문만이 아닙니다. 녀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해외에서 경험을 쌓는 건 필요합니다.”

- 하지만……

“죄송합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자세한 건 본부에 도착해서 전화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여보세요? 혜성 씨?

핸드폰 너머에서 계속 김유진의 말이 들렸다.

혜성은 잠깐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전화를 끊었다. 김유진의 마음은 이해했다. 자기 일처럼 나서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장차 녀석들의 위치는 현재처럼 자신의 보조가 아닌, 팀장급 엘리트여야만 했다.

“녀석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해서 아쉽군.”

그는 녀석들이 들어간 게이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명동 L 호텔 VIP룸.

“……이렇게 됐습니다. 막내하고 한수호가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오창수는 파란 서류철을 공손히 내밀었다.

“수고했군.”

회색 마스터는 창가에 기대서서 서류철을 열어봤다.

조금 전에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혜성과 막내, 한수호가 공항에서 헤어지는 장면, 막내와 한수호가 머뭇거리며 게이트로 들어가는 장면, 혜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장면 등이 망원 렌즈로 촬영돼 있었다.

“Ok. 사냥 준비는?”

“준비 완료입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오창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회색 마스터는 잠깐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평화로운 일상, 평화로운 대한민국.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군. 누군가가 죽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야.”

그는 가볍게 웃으며 오창수를 돌아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창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성 사냥. 지금 당장 시작하지.”

잠시 후, 회색 마스터는 히죽 웃으며 방을 나섰다.

***

같은 시각, 비행기 내.

- 딩동,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여객기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출발 30분 전. 기내에서는 출발 준비가 한창이었다. 좁은 통로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가운데, 차례대로 손가방을 머리 위 선반이나 의자 아래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승무원들도 바쁘게 오가며 승객들을 도왔다.

막내와 한수호도 복도에 서 있는 승객 중 하나였다. 둘은 1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끄트머리 창가에 이르렀다. 이윽고 둘이 손가방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고 앉으려는 찰나였다.

“저어, 실례합니다.”

누군가가 막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는 척했다.

처음에는 지나가게 옆으로 살짝 비켜 달라는 뜻인 줄 알았다.

“잠깐만요.”

막내는 무심코 몸을 돌렸다가 곧 얼어붙었다.

“당신은?”

한수호도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쉿, 상대는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붙이고 소리 죽여 웃었다.

***

10시 정각, 경인고속도로 입구.

“지금쯤 비행기가 떴겠죠?”

혜성은 차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좌 막내, 우 수호라며 따라다니던 녀석들. 솔직히 녀석들 때문에 낯간지러울 때도 있었는데, 막상 녀석들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내가 잘한 거겠지? 근데 녀석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혜성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4개월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녀석들과의 마지막. 그는 생명이 꺼지기 전에 블랙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해야 했다.

“근데 혜성 씨는 외국으로 진출할 생각 없어? 혜성 씨가 프리 선언하면 여기저기서 난리가 날 텐데 말이야.”

옆에 앉은 장진우가 혜성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맞아. 지금 혜성 씨는 대한민국을 넘어서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아닌가? 유수혁도 꺾었으니까.”

“그건 쉽지 않을걸? 혜성 씨가 외국으로 이적한다면 아마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할 거라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요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글쎄요. 전 솔직히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혜성이 쓰게 웃으며 대답하는 도중이었다.

부웅, 장진우의 핸드폰이 숨 가쁘게 울어댔다. 한진영의 전화였다.

“국장님이 웬일이시지?”

장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장진……”

- 자네들 지금 어디야?

장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국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본부의 긴급 상황실인 것 같았다. 국장의 목소리 너머로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천에서 막 빠져나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겁니까?”

- 지금 난리가 났다. 당장 인터넷을 확인해 봐라.

장진우는 굳은 표정이 돼 전화를 스피커 통화로 전환했다.

“혹시 막내와 수호의 기사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건 저희 쪽에서……”

- 그게 아니야. 보면 알아!

국장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어?”

조수석에 앉은 요원이 태블릿을 꺼내 확인했다가 사색이 됐다.

“뭔데?”

“이것 좀 보십시오.”

조수석의 요원은 상체를 돌리며 장진우에게 태블릿을 보여줬다. TV에서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장소는 여의도 광장.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세 개, 팔이 여섯 개 달린 인간형 몬스터 스무 마리가 날뛰고 있었다. 마침 그곳은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시민으로 가득 찬 상태. 신형 변종 게이트인 탓에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 끄아아아!

몬스터 특유의 괴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사이렌을 울리며 군용 트럭을 타고 NSA 요원들이 뒤늦게 도착했지만, 서로 밀고 밀리는 사람들 때문에 대형을 갖추는 것도 어려웠다. 오히려 사람들이 요원들 주위로 몰리는 통에 혼란이 가중됐다.

화면전환. 이어서 스튜디오의 아나운서가 나왔다.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 범인의 요구는 이혜성. 이혜성이 안 나타나면, 전국 각지에 30분에 하나씩 급속으로 열리는 변종 게이트와 던전을……

“블랙?”

혜성은 차성진을 떠올렸다.

예고 테러는 놈의 특기. 하지만 폭탄 대신 던전과 게이트를 이용하는 건 놈이 아니라 사령의 수법이었다.

- 맞아. 블랙이야. 개새끼들.

한진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놈들의 수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연속된 테러로 NSA의 보안은 대폭 강화된 상황이었다. 지하철역마다 검색대가 설치됐고, 특수 훈련을 받은 경찰견들이 24시간 돌아다녔다. 그러나 놈들의 신형 게이트 오프너는 NSA를 비웃듯 강화된 보안을 간단히 통과한 것이다.

- 게다가 놈들은 단순히 신형 게이트 오프너만 이용한 게 아니야. 더 골치 아픈 게 있다고. 자료 보낼 테니까 빨리 확인해 봐.

한진영의 한숨 소리가 다른 요원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더 골치 아픈 것?”

장진우는 태블릿을 받아들고 몇 단계 암호를 입력했다.

CCTV에서 찍은 영상들이 나왔다. 시간은 9시 30분. 막내와 한수호가 비행기에 오른 뒤였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백팩을 메고 여의나루역에서 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걸이가 좀 어색했다. 마치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CCTV의 각도는 그의 동선을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잠시 후, 그는 역을 나온 뒤 여의도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백팩에서 뭔가를 꺼냈다.

콰쾅,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거대한 폭발. 그의 몸은 폭연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변종 게이트와 몬스터들.

“씨발, 가미카제도 아니고. 자살 테러야?”

장진우는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장과의 통화라는 것도 잊고 욕이 나왔다.

NSA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현장까지 가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전국 각지에서 뜬금없이 게이트가 터진다면, NSA와 CIC, 군경이 총동원돼도 몬스터를 막을 수 없었다.

- 놈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보안을 뚫은 것 같아. 언론의 입은 막았지만, 벌써 일부에서 이번 테러에 대해 의문이 터지고 있어.

다시 스피커 너머에서 한진영의 욕설이 들렸다.

“제정신으로 자살 테러를 저질렀을 리 없습니다. 누군가가 세뇌나 최면을 건 게 분명합니다.”

장진우는 이렇게 말하며 혜성을 돌아봤다.

혜성도 굳은 표정으로 태블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성진의 예고 테러. 사령의 던전과 게이트. 그리고 홀쭉이와 뚱뚱이의 최면술까지. 역시 회색 마스터인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색 마스터의 능력은 이것만이 아닐 것 같았다. 최면술을 쓸 수 있다면, 다른 스킬도 쓰지 말란 법이 없었다.

‘설마 미스터리의 변신과 복제 능력, 거기에 우민창의 듀얼 스킬도 가진 건 아니겠지?’

그 이름처럼 모든 스킬의 마스터. 그는 생각만으로 오싹해졌다.

“혜성 씨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장진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 인천 시화공단 근처야. 자세한 좌표는 메신저로 보내줄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놈이 요구한 건 혜성 씨 혼자야. 만약 다른 요원이 보였다간 당장 게이트를 터뜨릴 거라고.

이어서 한진영은 다급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제길. 녀석들이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이 터지다니. 역시 블랙의 짓인가?”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며 창밖을 바라봤다.

비행기 한 대가 흰 꼬리를 만들며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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