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유혹 (4)
SJ 기획, 소회의실.
“시텐노? 청룡? 이거 속이 너무 보이는 거 아닌가?”
박무영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피식 웃었다.
증거는 없었지만, 누가 무슨 의도로 이 일을 꾸몄는지 뻔히 보였다. 테이블에는 혜성의 주변 인물들의 동향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 이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혜성도 강지영을 통해 연락했습니다. 시텐노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말입니다.”
한수은이 옆에 서서 현재 막내의 사정을 설명한 뒤 덧붙였다.
“시텐노와 청룡은 서류상으로 완벽합니다. 실제로 일본과 중국에서는 유명한 길드고요. 막내, 한수호, 태호. 셋 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눈치입니다.”
“그럼 우리가 나서야겠군.”
박무영은 깍지를 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직접 나서면 자칫 블랙에게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한수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회색 마스터가 노린 건 단지 혜성을 고립시키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었다. 혜성을 궁지로 몰아넣고, 이를 통해 SJ까지 끌어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직접 나서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뒤에서 도와주는 조연일 뿐. 진짜로 나서는 건 다른 이가 할 거야.”
“네? 누가 말입니까?”
“대한민국의 힘을 한번 믿어보자고. 후후후.”
박무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다른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블랙의 고위급으로 추정되는 인사가 며칠 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시작이지. 슬슬 회색 마스터를 사냥해볼까?”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보고서를 넘겼다.
***
다음 날, 을지로 근처 일식집.
식당을 통째로 전세 낸 가운데, NSA 요원들이 대거 참석해 회식을 했다. 막내와 한수호의 일본 진출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중앙 상석에는 국장 한진영이 앉고, 오늘의 주인공인 막내와 한수호는 그 옆에 앉았다.
“근데 뭐가 이렇게 빨라? 오늘 사직서 쓰고 바로 송별회야?”
누군가가 섭섭하다는 듯 소주잔을 머리 위로 들며 말했다.
아직 사직서는 수리되지도 않은 상태. 하지만 다들 그들의 이직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집에 사정이 있어서.”
“그쪽에서도 우리가 급한 것 같더라고요.”
막내와 한수호는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혜성을 포함한 몇 사람하고만 인사하고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특히 막내는 자신의 가정사를 남에게 드러내기 싫었다. 그런데 사직서가 결재라인을 타고 올라가며, 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퍼졌다.
“준비는 다 됐지?”
친했던 동료들의 인사가 있은 뒤, 국장이 막내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물었다. 시텐노라는 길드가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다.
“그쪽에서 다 해주기로 했습니다. 몸만 가면 됩니다.”
막내는 상체를 돌려 소주를 단숨에 비우고 대답했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대번 목이 화끈거렸다.
“근데 확실한 거야? 우리 쪽 요원 빼가려고 술수 부리는 건 아니겠지?”
“일본에 있는 동기들 통해서 서류를 다 확인했습니다. 직접 길드 사무실에 가서 윗사람들도 만나 봤고요. 그쪽에서 제안한 대로입니다.”
“하긴, 일생일대의 기회인데 어련히 잘 알아서 했겠지. 그래도 좀 아쉽네. 우리의 핵심 인력이 둘이나 나간다니까.”
한진영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에 앉은 혜성을 바라봤다.
사실 이 자리에서 둘과 제일 정들었던 건 혜성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래, 언제 간다고?”
이번엔 혜성의 맞은편에 앉은 장진우가 씁쓸한 미소를 감추며 물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입니다. 아버지는 일본 쪽 병원이 준비되는 대로 오시기로 했고요.”
“집은?”
“집도 거기서 구해주기로 했습니다. 그쪽에서는 저와 수호에게 고급 빌라를 한 채씩 준다고 했는데, 당분간은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둘이 같이 가니 다행이네.”
장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막내의 잔을 채웠다.
이어서 한진영이 혜성에게 슬쩍 눈짓했다. 혜성은 백팩에서 뭔가를 꺼내 국장에게 건넸다. 평범한 포장지로 싼 두꺼운 책 사이즈의 선물이었다.
“혜성 씨가 제일 섭섭할 텐데. 할 말도 제일 많을 테고. 혜성 씨가 직접 줘.”
“알겠습니다.”
혜성은 선물을 들고 모두의 앞으로 나섰다. 막내와 한수호는 동료의 박수를 받으며 따라 일어났다.
선물 증정식. 혜성은 선물을 가운데에 들고 막내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수호에게도 선물을 건네며 사진을 찍었다.
“축하한다!”
“빨리 열어 봐!”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둘은 거듭 감사하다고 말하며 선물을 풀었다. 손가락이 나오는 오른손용 가죽 장갑. 막내의 것은 붉은색, 한수호의 것은 파란색이었다.
“이걸 어떻게?”
막내는 눈을 크게 뜨고 혜성과 장갑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충 봐도 희귀 아이템이었다. 최소 A급.
NSA 요원이라고 전부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받는 건 아니었다. 보통 희귀 아이템은 연차와 공적이 쌓여야 하나씩 지급됐는데, 원래대로라면 막내는 아직 1년을 더 근무해야 자격이 주어졌다. 물론 한수호는 아이템은 꿈도 못 꿀 인턴이었고.
“내가 아니라 국장님이 힘써 주신 거야.”
혜성은 웃으며 국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연차는 안 됐지만, 혜성 씨를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잖아? 업적만 놓고 봤을 때는 벌써 받고도 남았지. 그래서 진즉 연구소에 주문해 놓은 건데, 공교롭게도 일이 이렇게 됐네.”
한진영은 아쉬운 듯 재차 쓰게 웃었다.
아이템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전도유망한 인재를 놓치는 게 아까웠다.
“뭐 해? 한번 차 봐.”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막내는 장갑을 끼고 에너지를 살짝 끌어올렸다. 대번 큰 화염이 맺혀 이글거렸다. 한수호의 장갑에도 물의 강기가 둥실 떠올랐다.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아이템이야.”
혜성이 웃으며 아이템의 특징과 사용법을 설명했다.
막내는 에너지 소모가 큰 원거리 딜러. 때문에 큰 공격을 연속으로 펼치면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이제부터 이 아이템을 착용하면 30%의 힘만으로도 전과 비슷한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한수호의 아이템도 속성만 다를 뿐, 사용법은 똑같았다.
“뭐 해? 소감 한마디 없어?”
다른 누군가가 짐짓 장난스럽게 물었다.
둘은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머뭇거렸다. 결국 막내가 한수호를 대신해 모두를 둘러보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이렇게 귀……”
막내의 소감은 단 네 글자. 가슴에 맺힌 말은 많았지만, 그다음 말은 목이 메어 꺼낼 수 없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잠시 후, 막내는 혜성의 품에 안겨 어깨를 떨었다.
“왜 우냐? 영전인데 축하해야지. 김성후 팀장.”
혜성은 녀석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눈꺼풀을 크게 깜빡여 눈물을 삭이며.
***
오피스텔에 돌아온 뒤.
혜성은 재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느덧 새벽 1시. 3차까지 달리며 술을 많이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막내의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막내가 시텐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일이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된 감이 있었다. 꿈만 같았는데, 막내와 한수호의 눈물을 보니 녀석들과 헤어지는 게 실감 났다.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태호와 나눴던 대화가 아직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서 나도 중국에 가게 됐다. 미안하게 됐다.”
녀석은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도 넘게 되풀이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네 길을 찾아가겠다는 건데. 병신.”
혜성은 악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머리맡으로 던졌다.
머리로는 녀석의 결정이 백번 이해됐다. 태호는 작은 개인병원에 남기엔 아까운 놈이었으니까. 게다가 김연우도 결혼을 전제로 녀석과 동행한다고 했다. 녀석에겐 그야말로 겹경사.
하지만 머리로 태호를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였다.
“이렇게 나 혼자 남는 건가?”
혜성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고 창가에 섰다.
고층 빌딩과 휘황찬란한 주황색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누군가에겐 황홀한 광경일 테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시의 고독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수고했다. 태호야, 막내야, 수호야.”
그는 녀석들의 이름을 되뇌며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혜성이 둘을 만난 건 불과 두 달 정도. 그런데 정이라는 게 참 무서웠다. 맥주가 오늘따라 차고 쓰게 느껴졌다.
***
다음 날 오전 8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출국장 앞 로비는 이른 시간인데도 북적거렸다.
막내와 한수호도 로비에서 일행들과 이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혜성과 장진우, 평소 친하게 지냈던 요원 두 명이 NSA를 대표해 둘을 배웅했다. 시텐노 측에서 전부 준비해주기로 했기 때문에 둘의 짐은 작은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어, 저거 막내하고 한수호 아니야?”
“정말이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몇몇이 막내와 한수호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일부는 인터넷 게시판에 급하게 뭔가를 올렸다.
“너희도 인기가 많구나.”
혜성은 주위를 힐끔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형.”
“선배님.”
둘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혜성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어디 죽으러 가냐? 기껏해야 일본에 가면서. 비행기로 넉넉하게 두어 시간이면 가잖아?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놀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일본어나 열심히 공부해 둬.”
혜성은 둘을 교대로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렸다.
“서, 선배님.”
특히 한수호는 혜성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흐느꼈다. 하긴, 녀석의 우상은 혜성. 녀석이 NSA를 택한 것도 혜성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그리고 계약 기간만 끝나면 다시 돌아온다며?”
“일본의 능력자들은 여기하고 많이 다르다던데. 이 기회에 일본의 스타일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맞아.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라고.”
장진우와 다른 요원들도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다른 이들과 악수를 나눴다.
잠시 후, 혜성은 포옹을 마치고 손목시계를 힐끔 내려다봤다. 출발 1시간 전. 공항검색대와 출국심사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여유롭게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곧 탑승 수속을 마감한다는 안내방송도 나왔다.
“이제 들어가라. 늦겠다.”
혜성은 제자리에 서서 녀석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둘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혜성을 계속 돌아보다가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손에 든 채.
“괜찮아?”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장진우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녀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게 좋을 테니까요. 저 녀석들은 일개 요원으로 끝나기엔……”
혜성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부웅,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긴급 재난문자는 아니었다.
“뭐지?”
그는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다가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