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유혹 (3)
9시 무렵, 장안역 근처.
막내와 한수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다.
“일본이라.”
막내가 조금 조바심이 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혜성과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뭘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쩌죠? 형 동기들은 뭐래요?”
한수호도 초조하게 시텐노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최근 한, 중, 일 삼국의 능력자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막내의 동기 중에도 일본에 파견을 나갔거나 일본과 연줄이 있는 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막내는 그들에게 슬쩍 시텐노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오창수 말대로야. 간사이에서 떠오르는 유망 길드라던데? 대우도 좋고. 소문엔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도 연결된 것 같아. 아이템이 많이 나오는 던전은 거의 싹쓸이하고 있다니까.”
막내는 동기들이 두서없이 전해준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인원, 길드장, 조직 구조 등은 비밀. 베일에 싸인 게 많았지만, 대우가 워낙 좋았다. 일본의 젊은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계약 일 순위 상대로 꼽히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데 하필 이럴 때에.”
한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떨떠름했다. 지금은 블랙과 퍼스트 게이트를 쫓아야 할 때. 게다가 혜성을 노리는 블랙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랐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가는 게 맞겠지.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혜성이 형인데……”
막내도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그도 혜성이 마음에 걸렸다. 전에 혜성이 CIC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혜성 선배님이 이걸 알면 뭐라고 하실까요?”
“뻔하지. 당장 가라고 등을 떠밀겠지.”
“역시 그렇겠죠? 그럼 한 3년만 다녀오는 건 어떨까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 팀장급으로 경험까지 쌓아서 혜성 선배님께 돌아오는 겁니다. 그때쯤이면 혜성 선배님도 특수팀의 팀장이 되셨을 테고요.”
“정말 그래야 하나? 근데 3년 후에 시텐노 쪽에서 우릴 놓아줄까? 그사이에 혜성이 형한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럼 그냥 거절할까요?”
“근데 거절하자니 너무 아쉽고.”
둘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나저나 아까 혜성이 형도 표정이 안 좋던데. 집에 잘 들어……”
막내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부웅, 재킷 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막내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어머니한테 온 전화였다.
“어, 엄마. 왜……”
- 아이고, 성후야. 네 아버지가……
“뭐? 지금 어디야?”
막내는 말을 하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위의 이목이 순간적으로 그에게 집중됐다.
“왜요? 게이트라도 터졌어요?”
한수호가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핸드폰 스피커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언뜻 들렸다.
“미안, 당장 가 봐야겠다.”
막내는 백팩을 챙기고 급히 커피숍을 나섰다.
“뭔데요? 같이 가요!”
한수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허겁지겁 따라갔다.
***
30분 뒤 서울대병원.
혜성은 연락을 받고 급하게 뛰어갔다. 그가 한수호의 전화를 받은 건 20분 전. 집에 들어가기 애매해서 혼자 한강 근처를 배회하던 참이었다.
한수호는 대기실을 오락가락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초조한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어떻게 된 거야? 막내는?”
혜성이 한수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지금 의사하고 얘기 중이에요. 어머니도 같이요.”
한수호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국가 요원들의 가족 사항은 극비. 가급적 서로의 가정사는 묻지 않는 게 요원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때문에 혜성과 한수호도 막내의 아버지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건 모르고 있었다.
“그게……”
한수호는 울먹이며 사정을 대충 설명했다.
1시간 전, 막내의 아버지가 저녁 식사 도중 갑자기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놀라서 119를 불렀고, 곧장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 처음엔 단순히 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 게이트로 인한 신종 질환의 일종인 것 같다는 소견이 나왔고, 서울대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그래서? 치료는 가능하고?”
“저도 잘 몰라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치료할 수 있다는데, 치료비가 한두 푼이 아닌가 봐요.”
한수호는 아까 의사가 대기실에서 했던 말을 전했다.
게이트의 비정상적 파장. 혈류. 담도 조직의 비정상적 활성화. 어려운 의학 용어가 많아 솔직히 말을 전하는 것도 어려웠다.
‘막내야!’
혜성도 얼굴이 굳어졌다.
문득 자신이 태호의 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때가 떠올랐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지금 막내가 어떤 기분일지 이해됐다.
“연우 씨는?”
“지금 태호 형님하고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대요. 한 30분 정도 걸릴 거라던데요?”
그때였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막내가 힘없이 걸어 나왔다. 어머니로 보이는 평범한 아줌마를 부축한 채.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몇 걸음 비틀거리며 걷다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님은 괜찮으셔?”
“의사는 뭐라고 하십니까?”
혜성과 한수호는 막내에게 달려가 동시에 물었다.
막내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의사의 말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혜성을 바라봤다. 그리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본. 20억 원.”
***
30분 뒤, 병원 근처 커피숍.
혜성은 한수호와 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다. 각자 커피와 초콜릿우유를 시켰지만, 음료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막내는 병원 로비에 남아 있었다.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옆에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한바탕 눈물을 쏟았을 터. 입술을 깨물고 어머니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니 녀석이 더 측은했다.
“20억 원이라. 아마 아버님의 치료비겠지?”
혜성은 막내가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그가 알기로 막내의 집은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보험은 들었을 테지만, 게이트로 인한 질환은 예외인 경우가 많았다. 막내의 아버지처럼 질환의 원인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고, 설사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쾅, 혜성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20억 원이 뉘 집 애 이름도 아니고. 갑자기 20억 원이라는 큰돈을 마련하는 건 무리일 게 뻔했다. 옛날 같으면 집이라도 급매로 내놓으면 되겠지만, 게이트 시대 이후에는 부동산 시장도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였다.
“NSA에서 지원은 없나요?”
“글쎄.”
혜성은 핸드폰으로 NSA의 내부망에 접속, 직원 복지를 검색했다.
지원은 다양했지만, 공무상 재해에 대한 지원이 대부분이었다. 가족에 대한 지원은 교육이나 주거 정도. 공무원연금대출 제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어 20억 원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시중 은행의 대출이나 사채를 쓰자니 영 찜찜했다.
“NSA 직원들끼리 모금을 하는 건 어떨까요? 공무원노조나 직원상조회 같은 거 없나요?”
“그것도 기껏해야 몇 천만 원일 거야. 20억 원을 만들기에는 어림도 없지.”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방법은 그것밖에 없나?”
한수호는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묻고 싶었는데, 그게 뭐야? 저녁 먹을 때도 분위기가 안 좋고 말이야. 낮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비밀을 꼭 지켜달라고 했는데.”
한수호는 혜성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하긴, 언제까지 비밀에 부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혜성에게도 말을 해야 했다. 차라리 지금 말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실은 오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녀석은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오창수의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시텐노 오창수?”
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네. 재일교포가 중심이 된 일본의 신흥 길드라는데……”
한수호는 낮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계약금, 연봉, 각종 특전. 혜성이 듣기에도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국내 최고라는 백호 길드도 이 정도 조건으로 능력자를 스카우트하는 건 드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아직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좋은 조건이긴 한데, 타이밍이 좀 이상한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터진 느낌이야.”
혜성은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랑 막내 형 생각도 비슷합니다.”
“일단 당분간은 네가 막내 곁에 있어줘. 시텐노 쪽은 내가 좀 더 알아볼 테니까. 정 안 되면 그쪽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혜성은 핸드폰을 꺼내 명함을 촬영했다. 그리곤 사진을 첨부해 메시지를 보냈다. 수신자는 강지영. 명함에 나온 조직과 인물을 조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외국 길드의 스카우트 제의. 막대한 치료비.’
그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었다.
***
같은 시각, 경부고속도로 상행.
태호는 SUV를 운전하며 옆을 힐끔거렸다.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조수석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아버지.”
김연우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눈물을 글썽였다. 왼손으로는 핸드폰을 꼭 붙들고 있었다.
하아, 태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생각도 정리할 겸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해서 들떠 있던 게 불과 1시간 전. 지금은 말을 붙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혜성을 떠올렸다. 이럴 때는 옆에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 덕분에 결심이 굳어졌다.
“저기, 연우 씨. 아버님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김연우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그를 바라봤다. 파랗게 번진 마스카라가 유독 안타깝게 다가왔다.
“아버님 치료비 말인데요. 그 20억 원. 제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태호는 청룡 길드에게서 받은 제안을 설명했다.
계약금만 10억 원. 거기에 지금까지 모아둔 돈과 병원을 처분하면 20억 원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김연우는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태호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거금을 왜 나에게?’라고 되묻는 표정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요. 우리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요.”
태호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김연우의 얼굴을 보니 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크게 심호흡한 뒤 말을 이었다.
“연우 씨. 저하고 같이 중국에 가시죠. 제가 비록 씹다가 만 오징어처럼 생기고 몸도 허약합니다만, 연우 씨 하나는 평생 지켜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태호 씨.”
그녀는 감동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혜성아, 미안하다.’
태호의 눈에 혜성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녀석의 병을 알고 있는 치료사이자 친구. 녀석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