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유혹 (2)
강남 커피숍.
오창수는 시텐노의 설명을 계속했다. 숫자는 적지만 AA급 이상의 능력자들도 다수. 재일교포 출신 재계 거물들이 후원하고 있어 자금력도 탄탄하다는 내용이었다.
“저희 시텐노는 일본의 간사이 지역에서만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일본 제패. 나아가 한국까지 아우르는 국제적인 길드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한국의 유망한 능력자들을 섭외하는 것입니다.”
“아. 하지만 저희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데요.”
막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얼떨떨했다. 국내의 사설 길드에서 몇 번 스카우트 제의를 받긴 했지만, 외국의 길드에서 제안받는 건 처음이었다.
“맞습니다. 혜성 선배님을 스카우트하려다가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한수호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거들었다.
“하하하. 저희가 주목한 건 두 분의 현재가 아니라 잠재력과 미래입니다. 저희와 함께라면 두 분은 AAA급, 나아가 S급까지 성장하실 수 있습니다. 길드의 팀장급 이상으로 말입니다.”
오창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S급?”
“팀장급 이상?”
막내와 한수호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둘 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계약금은 한화로 10억 원. 연봉 5억 원에 각종 수당은 별도입니다. 또한 AA급 이상 희귀 아이템, 주거, 차량, 항공권 등을 지원하겠습니다. 김성후 씨는 팀장급, 한수호 씨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 부팀장급이죠. 물론 앞서 말씀드린 연봉과 수당 외에 직책 수당과 특전은 따로 드릴 겁니다.”
오창수는 가져온 서류가방에서 노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길드에서 흔히 사용하는 계약서였다. 보장액만 15억 원. 막내와 한수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전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졸업하고 의무적으로 국가기관에서 복무해야 합니다. 아니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거나.”
한수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오.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분의 위약금도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입을 벌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장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 결정하시라는 건 아닙니다. 며칠 여유를 드릴 테니, 천천히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창수는 커피를 비우고 일어나며 덧붙였다.
“오늘 일은 비밀입니다. 이혜성 씨한테도 말입니다. 저희가 다국적 능력자들을 스카우트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방에서 제재가 들어오거든요.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막내는 오창수의 명함을 지갑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
태호의 병원.
태호는 진료를 잠시 멈추고 낯선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상대는 정장을 입은 단정한 사내였다. 다만 입가의 긴 상처 때문에 인상이 조금 차가워 보였다.
“저희는 중국 쪽에서 활동 중인 신생 길드입니다. 기존의 길드처럼 게이트나 던전에서 직접 싸우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뒤에서 활약하는 힐러와 서포터 등의 연합이죠.”
사내는 흰 종이로 만든 평범한 명함을 내밀었다. 비상하는 청룡이 그려져 있었다.
“청룡?”
태호는 조금 전에 인터넷에서 검색한 상대의 정보를 떠올렸다.
청룡 길드.
처음엔 조선족 능력자들의 연합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한족들도 가세한 상태였다. 중국 동남부에서는 제법 유명했다.
사내는 힐러와 서포터의 애로 사항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유창한 한국어로.
게이트와 던전이 생긴 이후 각성자가 최고의 직업이 됐지만, 같은 각성자라도 직종에 따라 대접이 천차만별이었다. 아무래도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은 화려한 딜러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탱커도 최일선에 서기 때문에 비교적 대접이 좋았다. 하지만 후방에서 지원 역할을 하는 힐러와 서포터는 상대적으로 연봉이 박하고 대접도 소홀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태호도 맞장구치며 적극 공감했다.
그나마 그는 혜성의 주치의로 유명해진 덕분에 벌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요즘엔 각성자 외에 일반인 환자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혜성이 하급 보조요원이었을 때는 그도 겨우 적자만 면할 정도였다.
“이제 힐러와 서포터도 단체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청룡은 이러한 단체 행동의 시작이죠.”
사내는 권리와 이익을 강조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 청룡은 중국이나 아시아 시장에 만족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힐러, 서포터 길드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제 몸 상태는 아시죠? 저 같은 치료사도 함께할 수 있을까요?”
태호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기쁘긴 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현재 태호 씨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EF가 약한 편입니다. 에너지를 이용한 힐링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아이템을 활용하거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업계 최고이며, 잠재력도 높다는 게 우리 쪽의 평가입니다.”
사내는 한 차례 크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청룡에서 제공할 중국의 전통의학과 각종 약재, 거기에 태호 씨의 힐링 능력과 현대 의학 지식을 더한다면……. 태호 씨는 몇 년 안에 최고의 힐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가져온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책임 연구원급 대우입니다. 계약금 10억 원에 연봉 5억 원. 최고의 연구 시설은 기본. 주택, 자동차, 항공권, 통역, 비서 등 필요하신 건 전부 제공하겠습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동행할 배우자와 가족의 편의도 봐 드리겠습니다.”
“배우자와 가족까지요?”
태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전투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지, 각성자로서의 꿈과 야망까지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업계 최고의 힐러가 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 도장을 찍자는 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결심이 굳어지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아, 이혜성 씨나 다른 이들에겐 비밀인 거 아시죠? 저희 청룡이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오거든요. 비밀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태호도 일어나서 상대와 악수했다. 부상에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한 걸 이제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
그날 저녁 8시.
혜성은 막내, 한수호와 강남의 삼겹살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평소처럼 안경과 뿔테, 간단한 도구 등으로 변장한 탓인지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혹시 이번 사건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래? 아니면 둘이 나 없을 때 다투기라도 했어?”
혜성은 다 익은 고기를 한수호의 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평소 삼겹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둘의 반응이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밑반찬만 깨작거릴 뿐. 간간이 혜성의 눈치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둘 다 나 때문에 힘들었겠지.’
그는 쓰게 웃으며 조용히 젓가락과 집게를 놀렸다.
사실 막내와 한수호는 그를 만난 이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둘이 워낙 착한 녀석들이라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는 마음 한편에 늘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둘 다 평범한 요원으로 남기엔 아까운 녀석들인데.’
기회만 된다면 둘을 언제든 더 큰물로 보내고 싶었다. 백호처럼 유명하고 돈도 많이 주는 길드로. 국외의 유명한 길드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점심을 좀 늦게 먹어서 그렇습니다.”
한수호가 뒤늦게 얼버무렸다. 척 봐도 거짓말이었다.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태호는 왜 안 오는 거야?”
혜성이 나직이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든 찰나였다. 부웅, 태호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참석 못 한다는 내용이었다.
- 무슨 문제? 병원에 일 생겼냐?
- 별거 아니야. 그냥 며칠 동안 바람 좀 쐬고 올게.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라.
- 알았다. 잘 다녀와라.
그는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혹시 태호하고 연우 씨하고 무슨 일 있었어?”
혜성이 막내를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요. 어제도 데이트 잘한 거 같던데요.”
막내는 다소 건성으로 대답했다. 역시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게 분명했다.
공기가 어색해졌다. 원래 목적은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퍼스트 게이트를 어떻게 조사할지 의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위기상 퍼스트 게이트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냥 삼겹살만 먹고 일찍 일어났다.
혜성은 둘을 먼저 보낸 뒤, 택시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이제 뭐하지?”
그러고 보니 2차 각성 이후에는 일에만 매달린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도 막내, 한수호, 태호 등이 전부였고, 만나서 하는 대화도 일에 대한 게 대부분이었다.
‘강지영한테라도 연락해 볼까?’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지난번에 BJ 앞에서 강지영과 사귄다고 말한 이후, 그녀에게 연락하는 게 어쩐지 껄끄러웠다. 게다가 그 일 이후 파파라치들이 둘을 포착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늘 변장하고 있었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장진우에게 연락하자니, 그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철저한 외톨이.
“갑자기 외롭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오피스텔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뭔가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
그날 밤, 명동 L 호텔 VIP룸.
“그래, 어떻게 됐지?”
회색 마스터는 창가에 서서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야경은 언제 봐도 황홀했다. 그의 뒤에는 입가에 상처가 있는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계약서를 건넸습니다. 다만 다들 좋아하면서도 망설이는 눈치였습니다.”
사내는 그들과 했던 대화를 간단히 설명했다.
“지금 한창 고민하고 있겠군.”
노인은 그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막내와 한수호, 태호의 반응이 눈에 그려졌다. 아마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외 길드의 스카우트 제안에만 골똘히 빠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터넷으로 시텐노와 청룡을 검색하며 고민하고 있을 터. 문제 될 건 없었다. 시텐노와 청룡은 실재하는 길드였고, 그가 내민 계약서도 진짜였으니까.
“잘됐군. 의심은 안 하던가?”
“그런 낌새는 없었습니다.”
사내는 소리 죽여 웃으며 덧붙였다.
“모레쯤 다시 접촉하겠습니다. 상황이 좀 변했다. 빨리 답변을 주셔야 할 것 같다. 아니면 다른 능력자가 대신 스카우트될 거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회색 마스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웃음기를 머금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퍼스트 게이트의 사건은 예고편이었지. 이번 이혜성의 공략 포인트는 고립과 외로움. 이혜성, 혼자라는 고독감을 뼈저리게 느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