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유혹 (1)
퍼스트 게이트 아래.
- 끄어어.
죽은 자들이 삐걱거리며 하나둘씩 일어났다. 혼란에 찬 울음을 터뜨리며.
언데드형 몬스터였다. 숫자는 김 대위를 포함해 약 50. 다만 울음이 퍼질수록 이에 호응하듯 그들의 숫자도 계속 늘어났다. 그들은 어색하고 굳은 몸동작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혜성은 뭔가를 떠올렸다.
‘죽은 능력자. 몬스터로 재탄생. 이지의 상실.’
이계의 EX급 몬스터가 사용한 스킬이었다.
“이거 뭐야? 좀비야?”
“좀비하고 좀 다른 것 같은데요?”
막내와 한수호도 놈들을 보고 주춤 물러섰다.
“뭐 해? 구경만 할 거야?”
장진우가 일어서는 놈들을 향해 강기를 날리며 외쳤다.
“아!”
혜성을 포함한 모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좌우로 흩어졌다.
그들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 포위망을 구축하고 공격을 집중해야 했다.
퍼퍼펑, 그들을 향해 사방에서 에너지 강기가 휘몰아쳤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가운데, 막내의 불과 한수호의 물 속성 때문에 안개처럼 뿌연 수증기가 퍼져 나갔다.
“제길! 이러긴 싫었는데.”
혜성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현재 상태야 어쨌건, 그들은 같은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공격을 퍼붓는 게 영 찜찜했다.
- 크아아!
뿌연 안개 가운데서 놈들의 울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조금 전과 달리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울음이었다.
“어쩌죠?”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저기서 요원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수증기를 뚫고 그림자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목표는 게이트를 중심으로 1시 방향에 혼자 서 있는 혜성. 다른 요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앗!”
11시 방향에 있던 막내, 3시 방향에 있던 한수호가 동시에 다급하게 외치며 에너지 강기를 날렸다.
그들은 언데드형의 대표격인 좀비가 아니었다. 동작이 좀비처럼 딱딱하긴 했지만, 생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갖춘 상태였다. 그들은 바깥쪽에 있던 동료들을 방패로 삼은 뒤, 호신 강기를 일으켜 이차로 불과 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 크아아!
놈들의 중앙에서 다시 분노에 찬 울음이 터졌다. 김 대위였다. 그는 활을 쏘는 것처럼 혜성을 향해 빛의 강기를 날렸다.
“제길!”
혜성은 빛의 화살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
쾅, 빛의 화살이 혜성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윽.”
혜성은 이를 악물고 비틀거렸다.
그동안 숱한 격전을 치르면서 기본 체력도 높아진 상태. 타격은 있었지만, 2차 각성까진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콰쾅, 김 대위가 더 크고 강한 빛의 화살을 날렸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달려들려는 찰나, 혜성은 뒷걸음질 치며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은은한 황금빛 서기와 전투 본능. 이제야 2차 각성이 시작됐다.
그사이 김 대위와 몬스터들은 혜성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피에 굶주린 좀비 떼가 사람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 같았다. 혜성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깔려 보이지도 않았다.
“씨발. 역시……”
막내는 거대한 화염구를 만들어 놈들에게 날리려다가 멈칫했다. 자칫하면 안에 있는 혜성마저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팀장님!”
한수호는 다급하게 5시 방향의 장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진우의 스킬이라면 몬스터들을 혜성에게서 떼어놓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기다려. 혜성 씨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장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번쩍!
중앙에서 수백 가닥의 빛줄기들이 뿜어져 그들을 관통했다. 김 대위에게서 카피한 빛 속성의 스킬을 가느다란 형태로 난사한 것이다. 언데드는 암흑 계열. 당연히 빛 속성의 공격에 약했다.
- 끄어어!
죽은 군인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눈 녹듯 허물어졌다. 그나마 김 대위가 같은 빛 속성의 방어막을 만들어 저항했지만, 그 또한 다른 이들처럼 머리부터 서서히 녹아내렸다.
“제길. 이러긴 싫었는데.”
몬스터들이 녹아내린 중앙, 혜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렁이는 암흑의 수호자와 후광처럼 뿜어지는 빛의 장막. 이중 보호막으로 전신을 감싼 채였다. 처음에 2차 각성을 위해 데미지를 받은 것 외엔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나만 노렸다? 내게 주는 선물인가?”
혜성은 김 대위의 옷가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몬스터의 숫자가 조금 많긴 했지만, 특별히 위협적이진 않았다. 블랙에서 누가 나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사 대신 자신을 공격한 게 뻔했다.
“형,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막내와 한수호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왔다.
“어때? 자네가 봤다는 이계의 능력자인가?”
장진우가 다가와 알약 형태의 힐링 아이템을 건네며 물었다.
“글쎄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놈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그놈은 죽은 자의 외형도 바꿨습니다. 몬스터가 지닌 특유의 사기도 더 강했고요.”
혜성은 말끝을 흐린 뒤 알약을 삼켰다. 2차 각성의 징후가 시나브로 약해졌다.
“이건 그놈의 솜씨를 흉내 낸 가짜입니다.”
그는 재차 주위를 둘러보며 단언했다. 우민창을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
2시간 뒤.
혜성은 어두운 조명 아래 철제 책상을 가운데 두고 우민창과 마주 앉았다.
“할 말이 많은 눈치군. 그래, 무슨 일이 있었지?”
우민창은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물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아이템의 활성화. 번개의 정령. 퍼스트 게이트의 결계 및 아이템의 활성화 해제. 그리고 김 대위와 죽은 자들의 몬스터화와 기습까지. 혜성은 현장 사진들을 보여주며 지난 몇 시간 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아쉽군. 퍼스트 게이트에 가서 아이템의 기억을 확실히 봤어야 했는데.”
우민창은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결계인지 알아보겠어?”
혜성은 태블릿을 놈에게 내밀었다. 퍼스트 게이트 주위의 1차 분석 결과였다.
“게이트 주위에 일종의 차단막을 친 것 같군. 게이트와 네 아이템의 공명을 막은 거지. 블랙 쪽 연구소에서 개발 중이라고 들었는데, 보아 하니 얼마 전에 개발이 끝난 모양이야.”
우민창은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쓰게 웃었다.
“누가 펼쳤는지 알겠어?”
“아마 마스터 중 하나가 나섰겠지. 아니면 그의 직속 경호원들이나. 이런 아이템은 블랙 내에서도 최고위층만 접할 수 있거든.”
“왜 막은 거지?”
혜성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야 뻔하지. 네가 진실에 접근하는 걸 막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내 추측은 확실해졌다.”
“무슨 추측?”
“그건 비밀이야. 네 힘으로 직접 알아봐야지. 어디서 공짜로 먹으려고 해?”
우민창은 혜성을 놀리듯 히죽 웃었다.
“이 새끼가.”
혜성은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려다가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당장 아쉬운 건 혜성. 놈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우리가 퍼스트 게이트로 갈 때 나타난 몬스터는 뭐지? 어떻게 정령급 몬스터가 게이트도 없이 나타난 거야?”
혜성은 번개의 정령이 찍힌 사진을 내밀었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위성사진이라 조금 흐릿했다.
“뭐긴, 게이트 오프너지. 아마 너희에게서 가져간 게이트 오프너를 베이스로 개량한 신형 오프너일 거다.”
“그럼 앞으로도 정령급의 몬스터를 불러올 수 있는 건가? 게이트도 없이?”
“게이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다만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 거지.”
혜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놈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덧붙였다.
“블랙의 기술력을 만만하게 보지 마. 너희 정부가 인권이니, 윤리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재를 가하는 동안, 블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으니까. 몇몇 분야에서는 이미 정부 연구소를 능가한 상태고.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신형 게이트 오프너야.”
놈의 말대로였다.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 몬스터의 힘을 이용한 강화. 확실히 정부의 연구소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들이었다.
“퍼스트 게이트의 책임자를 비롯해 죽은 자들은 내 2차 각성과 비슷한 스킬에 당했다. 블랙 중에 나와 같은 카피와 증폭 스킬을 지닌 자가 있나?”
혜성은 파란 서류철을 내밀었다.
죽은 김 대위에 대한 분석 자료였다. 죽은 김 대위는 빛 속성의 원거리 딜러. 그리고 그를 죽인 것도 빛 속성의 공격이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마스터의 스킬은 블랙에서도 최고급 비밀이거든.”
우민창은 서류를 천천히 넘기며 눈을 빛냈다. 그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죽은 자들을 언데드로 만든 건 누구의 솜씨지? 그런 스킬도 있었나?”
“그건 아마 스킬이 아닐 거야. 블랙 쪽 연구소에서 EX급 몬스터의 스킬을 따라서 뭔가를 개발 중이라고 언뜻 들은 적이 있거든. 물론 EX급 몬스터를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부활과 몬스터화라.”
혜성은 놈이 남긴 말의 키워드를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질문은 여기까지.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건 장진우가 나서야만 했다.
“솔직히 넌 기업 경영 쪽은 하나도 모르잖아. 밖에 회계 전문가 있지? 들어오라고 해.”
혜성은 놈을 노려보다가 일어났다.
‘추측이 확실해졌다? 무슨 뜻일까?’
놈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같은 시각, 강남 커피숍.
막내와 한수호는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입가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였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창수라고 합니다.”
사내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시텐노?”
막내는 사내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명함에는 ‘시텐노(四天王) 오창수’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이 아니라 일본 쪽 길드였다.
사내는 웃으며 유창한 한국어로 설명했다.
“저희는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에서 이름을 빌려 온 조직입니다. 시텐노지는 오사카에 있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백제 스타일로 유명한 절이죠.”
그는 조직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류가 유행했지만, 반대로 혐한이나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도 알게 모르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에 재일교포 능력자들이 자경단에서 출발해 길드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시텐노였다.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한국의 핏줄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교포들도 많습니다. 지금도 한국식 이름을 유지하는 교포들이 많고요. 저도 일본식 이름보다 오창수라는 이름이 더 편합니다.”
“아. 스카우트 제의입니까?”
그제야 막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혜성의 활약이 일본에서도 화제라는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혜성 선배님은 지금 다른 임무 때문에 바쁘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수호가 아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는 이혜성 씨한테 볼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닙니다. 물론 이혜성 씨에게도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한 건 김성후 씨와 한수호 씨, 바로 두 분입니다.”
오창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 저요?”
“저를 스카우트한다고요?”
막내와 한수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