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04화 (104/150)

# 104. 퍼스트 게이트 (5)

포인트 AB-001, 일명 퍼스트 게이트 캠프.

김 대위는 오랜만에 중무장하고 게이트 앞에 섰다. 육군의 군장이 아니었다. 중세 스타일의 갑옷을 입고 활을 손에 든 원거리형 능력자의 무장이었다.

“게이트 상태는 어때?”

“파장이 바뀐 것 외엔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철갑옷을 입은 하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그 또한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었다. 원거리에 특화된 B급 능력자였다. 사설 길드에서 활동하기엔 애매한 등급이라서 일찌감치 직업군인이 된 케이스였다.

부대의 병사들도 하급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중세 스타일로 무장한 채 퍼스트 게이트를 포위하고 있었다.

“씨발. 볼 때마다 기가 막히네.”

김 대위는 가래침을 뱉고 정면의 게이트를 쳐다봤다.

약 50m 전방, 거대한 보라색 게이트가 지상 10m 높이에 떠 있었다. 언뜻 보면 졸려서 반쯤 감긴 거인의 눈 같았다.

“애들은?”

“대기 중입니다. 언제든……”

둘이 한창 대화하는 도중이었다.

“멈추십시오! 여긴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둘의 뒤에서 병사들이 실랑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또 뭐야?”

대위와 하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구 쪽을 돌아봤다.

이중 바리케이드 앞에 웬 승용차 세 대가 서 있었다. 군이나 관에서 쓰는 차량은 아니었다. 대기업 회장님이 탈 것 같은 고급 세단이었다. 그리고 세단 앞에는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과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여섯 명이 서 있었다.

병사 하나가 방패를 앞세워 경호원을 밀치려는 찰나였다. 회색 노인이 뒷짐을 지고 앞으로 나섰다.

“말이 많군.”

노인은 대위 쪽을 힐끔 쳐다본 뒤 무심하게 손을 살짝 휘둘렀다.

퍽, 병사의 머리가 목과 분리돼 김 대위 쪽으로 날아갔다. 처음엔 잘못 보거나 장난인 줄 알았다. 다들 병사의 목을 보고도 눈만 멀뚱거렸다.

“너 뭐야?”

병사들은 뒤늦게 방패를 앞세우고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경호원들이 노인을 에워싸고 앞으로 나섰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시퍼런 단검을 꺼내 들며. 파팟, 빛이 번쩍였다고 느낀 순간, 병사들의 머리는 목과 분리돼 바닥에 떨어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

김 대위가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필요 없었다. 에너지를 주입하자 빛 속성의 화살이 날아갔다.

“내가 나서지.”

노인은 손을 들어 경호원들을 물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쾅, 대위의 화살이 노인의 턱을 강타했다. 노인의 턱은 튕겨 나가듯 뒤로 젖혀졌다.

“뭐야? 저……”

김 대위는 다시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려 했다.

“겨우 이 정도냐?”

노인은 히죽 웃으며 왼 주먹을 들어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파파팟, 왼손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화살이 병사들을 향해 쏟아졌다. 김 대위와 똑같은 빛의 속성이었지만, 위력은 훨씬 강했다. 노인은 동시에 김 대위를 향해서도 오른손을 슬쩍 휘둘렀다. 하루살이라도 쫓는 것처럼.

“으아아!”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거대한 빛의 화살을 보며, 김 대위는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길게 질렀다.

***

5분 뒤.

“이런 놈들이 퍼스트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니.”

경호원은 죽은 군인들을 돌아보며 가래침을 뱉었다. 입가에 칼자국이 있는 자였다.

20년이란 시간이 퍼스트 게이트의 의미를 퇴색시킨 걸까? 전원이 능력자로 구성된 군의 특수부대였지만, 그가 보기엔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만든 당나라 군대였다.

그때 게이트 앞의 회색 마스터가 그에게 손짓했다. 그는 노인이 공항에서 가져온 캐리어를 끌고 달려갔다.

“이걸 죽었다고 생각하다니.”

노인은 게이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퍼스트 게이트는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다. 그저 측정이 안 될 정도로 느리게 열리고 있었을 뿐.

노인은 캐리어의 열쇠에 엄지를 갖다 댔다. 덜컹, 캐리어가 열리고 평범한 옷가지들이 쏟아졌다. 그는 옷가지 사이에서 노트북처럼 생긴 케이스를 꺼냈다. 공항 검색대에서도 잡지 못한 특수 아이템이었다.

“세상은 아직 진실을 알 준비가 안 됐어.”

그는 케이스를 힐끔 내려다보곤 몸을 돌렸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둘이 달려와 케이스를 열고 게이트 주위에 결계를 만들었다.

“정령은?”

“안 그래도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칼자국이 있는 경호원은 노인에게 태블릿을 건네 드론의 영상을 보여줬다. 혜성의 동료들이 정령을 멋지게 제압하는 장면이었다.

“역시 이혜성도 퍼스트 게이트의 비밀을 어렴풋이 눈치챈 건가? 파리들이 많이 꼬이는군.”

노인은 영상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혜성이 스스로 퍼스트 게이트까지 이르렀을 리는 없었다. 우민창이 단서를 준 게 뻔했다.

“이혜성과 동료의 유대는 각별합니다. 게다가 막내와 한수호는 이혜성을 따라다니며 실력이 부쩍 늘었습니다. 이혜성을 잡으려면 그 동료들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나도 알아. 그동안 놈의 동료를 제거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으니까. 밤안개의 광고회사도 뒤에서 놈을 돕고 있고 말이야.”

노인은 미간을 좁혔다.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도 실패. 던전에서 떼어놓는 것 실패. 이혜성으로 위장해서 동료들을 이간질하는 것도 실패. 각개 격파도 실패. 지금까지 시도했던 건 전부 실패였다.

“그럼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경호원이 마스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으로 상대를 꺾는 건 야만인들이 하는 짓 아닌가?”

마스터는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네?”

“막내와 한수호. 둘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어떨까?”

그는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설명했다. 일본에서부터 준비한 계획의 하나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경호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조만간 이혜성이 도착할 텐데.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겠군.”

마스터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김 대위의 시체로 다가갔다.

***

10분 후, 퍼스트 게이트.

“이제 괜찮습니다.”

혜성은 심호흡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상했다. 5분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상태가 안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멀쩡해졌다. 대신 암흑의 수호자를 포함한 아이템들이 일제히 동면에 접어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교감 스위치를 끈 것처럼.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화를 삭였다.

“역시 블랙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몰살이라니.”

막내와 한수호도 흥분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특히 한수호는 주먹을 움켜쥐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중무장한 군인들은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전부 죽어 있었다. 수법을 봤을 때 범인은 많아야 열 명. 지원을 요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한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퍼진 역한 피비린내 때문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여기 책임자는 나도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 김강수라고 했나? 유명한 빛 속성의 딜러라고 했는데.”

혜성은 게이트 쪽을 힐끔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였다.

“퍼스트 게이트는 어때?”

오른쪽에서 장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쪼그려 앉아 시체들을 살피고 있었다. 여럿을 데리고 순간 이동을 반복한 탓에 안색이 창백했다. 에너지도 거의 바닥. 솔직히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일단 겉보기엔 그대로입니다만, 누군가가 외부에서 결계를 친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나중에 전문 분석팀이 나서야 알 것 같습니다.”

요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태블릿을 보여줬다.

결계는 지표면 아래에 특수한 인장을 새기는 타입. 퍼스트 게이트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져 있었다.

“이런 타입도 있나?”

“우리 쪽 기술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의 결계는 아직 연구 단계입니다.”

“역시 블랙인가?”

장진우는 결계의 분석 결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의 기술력은 인간과 몬스터를 융합할 정도였다. 지면에 독자적인 결계를 새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어? 여기 좀 보십시오!”

특수 장비를 들고 시체들을 조사하던 요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야?”

장진우를 비롯한 요원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혜성과 막내, 한수호도 불안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이 솜씨를 보십시오.”

요원은 누군가의 목을 들어 보였다. 이곳의 책임자인 김 대위의 시체였다. 레이저로 절단한 것처럼 깔끔했다.

“무기를 사용해도 약간의 거친 면은 남기 마련인데. 에너지 계통의 공격입니까?”

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한데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요원은 특수 카메라로 잘린 부분을 촬영한 뒤, 태블릿에 연결해 확대했다. 모두는 머리를 맞대고 서서 태블릿을 봤다. 잘린 표면이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이건 빛 속성의 공격에 당한 흔적입니다. 그리고 죽은 김 대위는 빛 속성의 능력자였고요. 이런 상황,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혜성에게 집중됐다.

상대와 똑같은 속성. 하지만 원본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게 찍어 누른다. 이건 스킬 카피와 증폭이라는 혜성의 특기였다.

***

잠시 후, 그들은 본부로 쓰이던 막사에 모여 앉았다. 밖의 상황을 떠올리자 아직도 속이 메스꺼웠다.

“이거 보통 놈들이 아닌데요. CCTV 영상도 전부 삭제됐습니다.”

컴퓨터를 두드리던 막내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왔다.

다른 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체 외의 현장 증거는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장진우가 팔짱을 낀 채 혜성과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첫째, 혜성 씨가 퍼스트 게이트에서 아이템의 기억을 엿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혜성 씨보다 일찍 와서 병사들을 죽이고 결계를 쳤다. 아마 고속도로에 나타난 정령은 우리의 발을 잡기 위한 미끼였을 테지.”

“이걸 역으로 생각하면, 아이템의 기억에 확실히 뭔가 있다는 뜻입니다.”

혜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장진우의 말은 계속됐다.

“둘째, 혜성 씨처럼 상대의 스킬을 이용하는 능력자가 있다. 대위를 죽인 자의 스킬과 대위가 사용한 스킬은 파장도 일치하고 있는 터. 이건 혜성 씨의 2차 각성과 똑같아.”

그 외에도 의문은 많았다. 놈들은 혜성이 여기에 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흔적을 보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조직에서 온 놈들일까? 역시 블랙일까? 다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막내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쯤 되니 퍼스트 게이트의 비밀이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일단 지원팀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혜성이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으아아!”

밖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막사로 뛰어 들어왔다. 시체들을 조사하던 요원이었다.

“무슨 일이야?”

혜성은 탁자를 손으로 치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숨을 헐떡이는 요원에게 집중됐다.

“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요원은 부들부들 떨며 밖을 가리켰다.

막사 밖, 느리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씨발, 좀비야?”

막내가 욕설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그 순간, 혜성은 뭔가를 떠올렸다. 암흑의 수호자에게서 본 기억. 죽은 자를 몬스터로 재탄생시키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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