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퍼스트 게이트 (2)
NSA 지하 주차장.
검은 승합차 한 대가 깜빡이를 켠 채 대기 중이었다. 장진우와 낯익은 회색 여우 팀원 하나가 밖에 마중 나와 있었다. 혜성은 둘에게 꾸벅 인사하고 뒷좌석에 앉았다.
막내와 한수호도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이제부터 그가 갈 곳은 1급 특수 시설이었다. 아무리 NSA 요원이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둘은 입맛을 다시면서 어쩔 수 없이 본부에서 대기했다.
“우민창의 거래 제안이라뇨? 무슨 일입니까?”
혜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장진우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지금 막 연락을 받았으니까. 다만 자네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더군.”
장진우는 우민창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현재 놈은 심리 전문가들이 조사 중이었다. 조사가 이뤄지는 곳은 지도에도 없는 NSA의 비공식 시설이었다.
“놈의 정신력과 사이코닉 배리어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았거든. 그런데 놈이 갑자기 변덕을 부려 혜성 씨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거야.”
장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사업가 우민창은요?”
“그놈도 다른 전문가들이 따로 심문 중이지.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능력자 쪽이 진짜고 사업가는 일종의 대리인인 것 같아.”
“사업가 쪽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게 좀 이상해. 상식적으로는 단전이 없으니까 죽었어야 하는데, 좀 약골이긴 해도 멀쩡하단 말이지. 지금 두꺼비 연구원이 의사들과 놈의 몸을 연구 중이야. 왜?”
“아닙니다. 단전과 에너지를 이식해주고도 살아 있는 놈이라니. 좀 신기해서요.”
혜성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렸다.
‘능력이냐, 목숨이냐?’
어젯밤 태호가 했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장진우는 혜성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파란 서류철을 건넸다. 놈이 탈취한 만병쌍수에 관한 자료였다.
“닥터 J가 만병쌍수의 동기화를 진행하며 이중으로 암호를 걸었어. 두꺼비가 암호를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야.”
“그럼 제 카피캣이 필요하겠군요.”
“맞아. 카피캣과 만병쌍수를 비교해서 암호 구조를 파악해야 하지.”
장진우는 여기까지 말한 뒤 서류의 뒤쪽을 가리켰다.
“경기도 외곽의 공장에서 두꺼비가 했던 말 기억해? ‘닥터 J는 놈에게 순순히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만병쌍수에 함정을 팠다.’ 두꺼비의 말대로 만병쌍수는 한계 제어 쪽이 고장 났더군.”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사용자의 정신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일부 연구가 있었다. 그래서 대형 트럭의 제동장치처럼 유니크 아이템에는 일종의 한계가 있었는데, 닥터는 그 제어장치를 고의로 손상한 것이다.
“혹시 우민창이 성급하게 나선 것도 만병쌍수 때문일까요?”
혜성은 그날 우민창의 행동을 떠올렸다. 자신과 장진우가 위장 사망으로 속인 것도 있었지만, 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경솔하게 행동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아이템 때문에 폭주했다는 사례도 많으니까.”
장진우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의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 블랙으로 이어지는 열쇠는 아직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사이 승합차는 경기도 외곽의 폐타이어 공장에 도착했다. 위장 사업체였다. 평범한 작업복을 입었지만, 눈매가 날카로운 요원들이 곳곳에 있었다.
‘우민창. 인제 와서 내게 뭘 제안하려는 거냐?’
혜성은 심호흡하며 승합차에서 내렸다.
***
혜성은 비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장 지하로 내려갔다.
특수 감옥을 연상시키는 시설이었다. 긴 복도를 따라 철제문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면서 핸드폰을 슬쩍 꺼내보니 ‘통화권 이탈’이라고 나왔다.
“놈은 혜성 씨와 단둘이 대화하고 싶어 해. 난 밖에서 대기하지.”
장진우가 앞장서서 안내하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놈의 심리전에 말려들지 말 것. 필요한 말 외에는 삼갈 것. 무슨 일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 중인 자신에게 신호할 것 등등.
“알겠습니다.”
혜성은 그의 설명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민창은 제일 안쪽의 방에 있었다. 우민창이 있는 곳에서는 밖을 볼 수 없지만, 밖에서는 그를 볼 수 있는 특수 유리로 나뉜 구조였다. 장진우가 유리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가운데, 혜성은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민창은 능력을 봉인하는 특수 수갑을 찬 채 파란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생각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왔어?”
놈은 수갑 찬 손을 들어 보이며 반갑게 인사했다.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혜성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놈의 맞은편에 앉았다.
“밖에는 누가 있나? 장진우? 막내하고 한수호라고 했나? 걔들은 아직 이런 시설에 출입할 짬이 안 될 테고.”
놈은 유리창을 힐끔 바라보며 웃었다.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놈은 밖의 상황을 본 것처럼 정확했다.
“상관없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이건 오직 너만 가능한 일이거든.”
우민창은 이렇게 말한 뒤, 웃음을 지우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봤나?”
“뭐?”
“신, 악마, 천사. 모습과 명칭은 다양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괴물 말이야.”
다소 어두운 조명 아래, 놈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암흑의 수호자에게서 본 그림자.
“블랙이 그걸 어떻게 알지?”
혜성은 굳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몬스터의 힘을 이용한 거 몰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
“그놈의 정체는 뭐지?”
“솔직히 그건 나도 몰라. 지금까지 나타난 괴물들은 애교 수준. 다른 차원에는 악마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괴물이 존재한다. 대충 이 정도만 알고 있지. 블랙 내부에서는 놈을 등급 외의 괴물, EX급이라고 부르지.”
EX급 몬스터. 돌연 공기가 서늘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나와 회색 마스터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다는 거지?”
“성격이 급하군. 너희에게 협조하겠다. 블랙의 자금 흐름도 내가 아는 선에서 전부 알려주지. 어차피 조직은 실패자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벌써 내 입을 막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지도 모르지. 대신……”
우민창은 말끝을 흐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역시 공짜는 없군.’
혜성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춘천에 가서 일을 하나 해줘야겠어. 사실 내가 만병쌍수를 손에 넣으려 했던 건 춘천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뭐, 너를 제물 삼아 힘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춘천? 거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잊었어? 퍼스트 게이트. 이 세상에 최초로 나타난 게이트이자, 우리 같은 각성자들의 시작 말이야.”
혜성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퍼스트 게이트.
그 이름처럼 20년 전에 나타난 최초의 게이트였다. 다만 다른 게이트와 달리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쯤 벌어진 상태로 정지.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죽은 게이트’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세계 곳곳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들이 나타난 것도 퍼스트 게이트의 괴상한 파장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었다.
“퍼스트 게이트로 가.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마스터들을 비롯해 세상의 몇몇이 숨기고 있는 불편한 진실.”
놈은 진실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혜성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창 쪽을 힐끔 쳐다봤다. 장진우도 뭔가 알 것 같진 않았다.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네가 나 대신 춘천에 가서 진실을 찾아줘. 운이 좋으면 너와 회색 마스터의 인연도 알 수 있을 테지.”
놈은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설명했다.
***
우민창과 짧은 대화를 마친 뒤.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다.
“퍼스트 게이트? 숨겨진 진실?”
장진우는 팔짱을 낀 채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또한 혜성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놈이 다른 수작을 부리는 거 아닐까? 퍼스트 게이트 근처에 뭔가 함정을 만들고 혜성 씨를 유인한다든지.”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블랙은 지금까지 실패한 자를 살려두지 않았으니까요. 놈이 우리 쪽으로 전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혜성은 아이템의 힘을 빌려 죽었을 때, 암흑의 수호자를 통해 본 광경을 설명했다.
다른 차원의 능력자. 죽음. 몬스터로 부활. 다시 죽음. 아이템으로 재탄생. 솔직히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황당했다.
“EX급?”
장진우도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놈의 눈치를 봐선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혜성 씨 결론은?”
“일단 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혜성은 유리창 너머의 우민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놈은 의자에 앉아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나하고 회색 여우 팀은 거리를 두고 따라가지.”
장진우는 잠깐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인천공항, 입국장.
일본발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다들 한국 여행에 들뜬 표정들이었다.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도 그중 하나였다.
“내가 이 땅을 다시 밟다니.”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오랜만에 방문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그가 알던 천박한 나라가 아니었다. 노쇠화된 일본, 어딘지 어수선한 중국 등을 제치고 아시아의 중심으로 우뚝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검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곤 그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들고 게이트 앞으로 안내했다.
입국장 앞 도로에는 고급 세단 세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고 대기 중이었다. 짙게 선팅이 된 탓에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기업 회장님인가?”
지나가던 행인들이 노인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호의는 고마운데 좀 불편하군.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진 철수시켜.”
노인은 차 앞에서 대기 중인 다른 경호원들을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경호원은 절도 있게 대답하며 가운데 세단의 뒷문을 열었다. 노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차에 올랐다. 이어서 경호원이 조수석에 타자, 세단은 부드럽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차 안에는 오늘 자 신문이 비치돼 있었다.
“한글로 된 신문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노인은 다리를 꼬며 신문을 펼쳤다.
헤드라인은 김유진이 쓴 제주도 사건이었다. 다만 그때 혜성을 도와준 여성과 특수팀 등은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혜성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 걸로 마무리돼 있었다.
“이혜성이 혼자 우민창을 상대했을 리는 없고. 이번에도 광고회사가 나선 건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명동에 호텔을 예약해뒀습니다.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경호원이 노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이혜성은 나중에. 그 전에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어.”
그는 신문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춘천에 좀 갈까?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되는 불편한 진실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