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퍼스트 게이트 (1)
NSA 국장실.
“……이상이 이번 LK 로직스 사건의 전말입니다.”
장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긴 보고를 마쳤다.
“뭔가 개운치 않군.”
한진영도 커피잔을 들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게다가 밤안개가 돌아왔다니. 그것도 엄청난 조직을 이끌고 말입니다.”
장진우는 그날 밤에 본 강지영을 떠올렸다.
총과 검을 쓰는 공격 일변도의 전투 스타일. 왕년의 밤안개와 겹쳐 보였다.
‘만약 내가 그녀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승률은 반반. 상당히 어렵고 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그의 생각을 깨고 다시 한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박무영의 조직이야. 또 윗선을 통해서 압력이 들어올 테지. 하지만 우리도 명색이 NSA 아닌가? 외압에 굴복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조직의 위신, 혹은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이 믿고 따르던 신념. 누군가의 압력 때문에 행동을 바꾼다는 건 신념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게다가 밤안개의 마지막은……”
장진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일단은 윗선의 말에 따르는 척할 거야. 그러나 장 팀장은 장 팀장대로 밤안개와 블랙을 계속 파고들어 봐. 다른 결재라인은 거치지 말고, 나한테 직접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사건의 영웅은 뭐 하시나? 지금 혜성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높은 분들이 줄을 선 상태인데 말이야. 특히 이번에 재계의 거물들을 구하면서 대활약했잖아. 물밑에서 혜성 씨를 스카우트하려고 치열하다던데?”
한진영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마냥 농담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으로 혜성의 주가는 폭등한 상태였다. 소문에 의하면 백지 수표 제안도 심심치 않다고 했다.
심지어 모 그룹에서는 혜성과 동료를 전부 데려다가 새로 길드를 창설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물론 길드장은 혜성, 그룹은 지분을 투자하는 형태였다.
“혜성 씨의 블랙에 대한 집념은 아시지 않습니까? 가족을 건드린 일로 놈들과 끝장을 보려 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조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장진우도 따라 웃으며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친구이자 주치의인 태호가 작성한 혜성의 건강 보고서였다. 이상 무. 격전을 통해 각성 전의 능력도 A급과 AA급 사이로 레벨업돼 있었다.
“부럽군. 싸울수록 강해지다니. 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
한진영이 보고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어제 밤새 치료를 받고 아침에 퇴원했습니다. 지금 본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조사?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그런 게 아니라 참고인 조사입니다. 이번 사건의 시작은 코드명 닥터 J에서 비롯된 거 아닙니까? 지금 닥터의 수색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아마 지금쯤 혜성 씨는……”
장진우가 한창 대답하던 중이었다.
부웅, 그의 핸드폰이 재킷 안에서 진동했다. 그는 한진영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잠시 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장진우는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NSA 본부 영상분석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혜성은 분석 요원들과 함께 대형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막내와 한수호도 혜성의 뒤에 서서 구경했다.
모니터에는 CCTV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장소는 우민창의 비밀 아지트. NSA 특수팀이 덮친 장면이었다.
복면을 쓴 요원들은 결계와 함정을 돌파하고, 20여 분의 대치 끝에 놈의 부하들도 전부 제거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사무실 안쪽의 밀실을 덮친 찰나, 타깃인 닥터 J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혜성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분석 요원을 돌아봤다.
“이상한 놈들이 먼저 닥터를 빼돌렸습니다.”
분석 요원은 마우스를 움직여 다른 영상을 보여줬다.
20분 전, 검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네 명이 벽을 관통하듯 스르르 나타났다. 밀실에는 닥터 J 혼자만 결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민창의 부하들은 NSA의 팀과 한창 교전 중이었다.
“어?”
뒤에 있던 막내와 한수호가 대번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는 사람입니까?”
분석 요원 중 하나가 영상을 정지시키고 물었다.
“희망 정신병원에서 봤습니다. 각각 왕, 드래곤, 마법사, 절세 미녀라고 불립니다.”
혜성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엥?”
분석요원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막내가 정신병원에서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누군가가 영상을 확대했다. 왕은 고사하고 노숙자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
막내가 피식 웃으며 대신 설명했다. 아, 그제야 요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닥터는 허공에 대고 한창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왕이 웃으며 그의 결박을 풀었다. 그리곤 그들은 올 때처럼 벽을 통과해서 사라졌다.
“어떻게 벽을 통과한 거지? 저런 스킬도 있나?”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영상을 뒤로 감았다. 속임수나 특별한 스킬을 쓴 흔적은 없었다. 그들은 벽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상합니다. 제일 미친놈이 안 보입니다.”
한수호가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맞아. 신이 보이지 않아.”
혜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들은 신을 중심으로 한 파티였다. 신만 혼자 빠지는 건 말이 안 됐다.
“신?”
옆에 있던 분석요원들은 갈수록 가관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막내가 웃으며 설명하자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CCTV에 안 잡힌 게 아닐까요? 아니면 투명화 스킬을 가졌거나.”
다시 막내가 혜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 생각도 비슷해. 그가 정말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스킬을 지닌 능력자라는 건 분명하니까. 그놈들, 닥터를 데려가서 뭘 하려는 걸까?”
혜성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신이라고 했나? 정체는 모르겠지만, 블랙처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오히려 더 불안했다. 경우에 따라 최고의 동료가 될 수도, 반대로 최악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닥터 J. 신을 자처하는 남자. 그리고 블랙.”
그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 외에도 의문점이 많았다. 조만간 박무영을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
SJ 기획, 소회의실.
“……이상이 이혜성의 새로운 능력. 어빌리티 캔슬링입니다.”
한수은은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이며 긴 보고를 끝냈다.
“상대의 능력을 무효로 만든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사기 같은 스킬이군.”
박무영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어빌리티 캔슬링’이란 단어를 반복했다.
“그렇습니다. 이혜성이 언젠가 마스터를 상대할 때 비장의 카드가 될 겁니다.”
“하지만 혜성 씨도 당분간은 그 스킬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을 거야. 그때는 강지영의 버프도 있었고, 놈과 많이 싸운 덕도 있었으니까. 마스터 급이라면 파장의 분석이 더 어려울 테지.”
박무영은 혜성의 새로운 능력을 간단히 설명했다. 혜성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정확했다.
“우민창은 어떻게 됐지?”
“지금 NSA의 특수팀이 조사 중입니다. 내부의 적을 의식해서인지 이번엔 국장 직속의 팀을 붙였다더군요. 우민창의 현 위치는 NSA 내에서도 극비라고 합니다.”
한수은은 우민창에 관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일본 쪽 정보원들을 동원해 밝혀낸 그의 과거였다.
- …… 쌍둥이 각성자. 생체 실험. 한국 잠입. 물류사업을 위장한 자금 세탁.
박무영은 키워드 위주로 보고서를 빠르게 넘겼다.
“블랙은 불법적인 각종 실험으로 능력을 강화하는 것 같습니다.”
보고서 너머로 한수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힘이 최고다. 블랙다운 발상이군. 아마 이런 실험은 일이 년 사이에 벌어진 게 아닐 거다. 그리고 하나의 연구가 성과를 얻기까지 수많은 실패가 있었겠지.”
“안 그래도 최근 10년 동안 행방불명된 각성자들의 전수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조만간 뭔가 성과가 나올 겁니다.”
“수고했군.”
이윽고 박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보고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블랙은 다음에 누굴 보낼 것 같습니까?”
“글쎄. 내 생각에는 마스터가 직접 나설 것 같군. 백의(白衣)의 마스터가 그리 느긋한 성격이 아니거든.”
박무영은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일급비. 표지를 넘기니 회색 마스터의 사진 몇 장과 간단한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세상 참 좁군. 이혜성과 회색 마스터가 이런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보고서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예선은 끝. 이제부턴 마스터가 나오는 본선이다. 이혜성, 너와 인연이 있는 마스터를 어떻게 상대할 텐가?”
박무영은 복잡한 의미의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에 따라 한탄, 불안, 놀람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웃음이었다.
***
NSA 본부 분석실.
“오케이. 일단 닥터 J와 정신병원 4인방의 사진을 전 지부에 배포하자고.”
분석 요원은 지부에 배포될 전단을 프린트해 혜성에게 건넸다.
“부탁드립니다.”
혜성은 전단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놈들은 변장하고 CCTV를 가급적 피해 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괴상한 분위기와 돌발 행동은 변장 등으로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꼬리를 잡힐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분석요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다음 일정은……”
막내가 백팩에서 태블릿을 꺼내 확인했다.
“막내가 매니저야?”
분석요원 중 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매니저 겸 보디가드 겸 감시자입니다.”
“선배님은 조금도 방심할 틈을 안 주시지 말입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났다. 그래, 다음은 뭐야?”
혜성도 피식 웃으며 막내를 돌아봤다.
“저녁에 S 호텔에서 행사가 있어요. IT 관련 거물들이 참석하는 모임인데, 형도 거기 VIP로……”
설명은 장황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당대의 영웅을 모셔다가 공치사하는 자리. 물론 얼굴을 비추기만 해도 수입이 상당했다.
“그런데 수익 활동을 해도 되는 거야?”
“그쪽 협회에서 공문을 보내 요청한 건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부웅, 막내가 한창 말하는데 재킷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발신자가 장진우였다.
“잠깐만.”
혜성은 몸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이혜성입니다. …… 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요?”
막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녁 일정까지 시간 있지?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와야겠다.”
“누구요?”
“우민창. 놈이 우리 쪽에 순순히 협조하는 조건으로 나를 요구하고 있나 봐.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던데.”
혜성은 장진우가 마지막에 남긴 말을 떠올렸다.
다른 요원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민창이 그를 요구한 건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는 게 아니었다.
그와 회색 마스터의 연결 고리. 우민창은 그것을 미끼로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와 회색 마스터가 인연이 있다고?’
뜻밖의 인연. 이 말이 목구멍의 가시처럼 계속 마음에 걸렸다.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