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9. 능력이냐, 목숨이냐?
우민창을 쓰러뜨린 후.
혜성은 기진맥진해서 주저앉았다. 장진우가 부축해서 건물 안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그 또한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건물 안에 있던 다른 이들에게 업혀 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이혜성. 이혜성. 이혜성.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건물 밖까지 울려 퍼졌다.
“……혜성 씨 정말 대단한……”
“오늘의 일을 어떻게……”
재계의 거물 몇 명이 그를 에워싸고 흥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억지로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경호원들이 우민창을 단단히 결박해서 데려왔다. 놈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 사업가 우민창과 놈의 부하들도 능력을 봉인당한 채 로비 구석에 무릎이 꿇려 있었다.
‘드디어 블랙의 꼬리를 잡는 건가?’
혜성은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놈을 바라봤다.
악전고투 속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놈은 새로운 전투로 이어지는 중간 과정. 결전을 앞뒀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요? 기쁘지 않아요?”
한수호가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캔 커피를 건넸다.
“통신망은 곧 복구될 거예요. 예상대로 놈들이 교란장치를 썼어요. 다만 문제는 이런 악천후를 뚫고 구급팀이 언제 도착하느냐는 건데.”
막내도 그의 곁으로 다가와 인상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진 건 구급약 약간뿐. 전문적으로 치료술을 익힌 사람은 없었다. 장진우의 힐링 아이템도 다 쓴 상태였다.
그때였다.
위-잉,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사람들은 창가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파란빛과 붉은빛이 교대로 깜빡이는 게 보였다. 보통 차량으론 비바람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장갑차를 연상시키는 특수차 수십 대가 줄지어 달려왔다.
“어? 누구지? 아직 통신망 복구가 안 끝났는데?”
막내도 고개를 삐쭉 내밀고 창밖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우비를 입은 요원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NSA 제주지부의 요원들과 민간 치료사들이었다.
“이 새끼야. 이젠 제주도까지 와서 이 지랄이냐?”
구급요원들 사이에서 귀에 익은 반가운 욕설이 들렸다. 안경에 뿌연 서리가 낀 태호였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
혜성이 더 놀랐다.
이번 작전은 극비. 태호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꽤 훌륭한 조수가 생겼거든.”
“조수?”
혜성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태호 뒤에서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처음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연우 씨?”
혜성은 뒤늦게 상대를 알아보고 놀랐다.
“어떻게 온 거예요?”
김연우는 웃으며 막내를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막내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아!”
그제야 혜성은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막내는 제주도에서 임무가 있다고 김연우에게 말했을 것이다. 김연우는 그걸 다시 태호에게 말했을 테고, 태호는 혜성이 걱정돼 제주도로 따라온 것이다. NSA 제주지부의 요원들도 잔뜩 데리고.
“이 새끼가 비밀 임무를 가족한테 떠벌려?”
혜성은 막내에게 화를 내려다가 피식 웃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태호가 나타난 건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최고.
“그걸 태호 형한테 왜 또 말했어?”
“내가 말한 걸 고맙게 여겨.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티격태격. 현실 남매의 싸움이 또 시작되려고 했다.
“말은 나중에 해라. 지금은 치료가 먼저니까.”
태호는 백팩에서 치료 도구를 잔뜩 꺼냈다. 먼저 소독제를 꺼내 혜성의 상처에 뿌렸다.
“크윽!”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이를 악물었다.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어서 태호는 능숙한 솜씨로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김연우도 정식으로 의료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명색이 NSA 요원의 누나였다. 각종 약물의 기본적인 사용법은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 태호가 와야 확실히 사건이 끝난 거지.’
혜성은 태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
30분 후.
태호는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끝냈다. 다음 단계는 시설 좋은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하는 것.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저놈이 우민창이냐?”
태호는 응급처치를 끝내고 우민창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우민창은 둘 다 기절해 있었다.
“그래. 듀얼 각성자다.”
혜성은 쓰게 웃으며 놈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듀얼? 신기하네. 이 기회에 잠깐 봐두는 것도 괜찮겠지?”
태호는 우민창에게 흥미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주위 상황은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는 백팩에서 몇 가지 테스트 도구를 꺼내 놈들을 검사했다. 처음엔 듀얼 각성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어느 순간, 태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건?”
그는 눈을 부릅뜨고 우민창과 혜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혜성은 피곤한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재계의 인사 몇 명이 감사인사를 하러 왔지만, 녀석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혜성아, 찾았다. 네가 살 수 있는 길.’
태호는 백팩에서 태블릿을 꺼내 놈들의 자료를 몰래 저장했다. 환호가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으며.
***
새벽해 떠오를 무렵, 폭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뿌연 새벽안개를 뚫고 무지개가 떠오른 모습은 장관이었다.
혜성은 태호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려다가, 잠깐 넋을 놓고 바다에 뜬 무지개를 바라봤다. 하늘에서 천사의 후광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제주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갑자기 감정적이 됐다. 문득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생각났다.
“왜?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
태호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미쳤냐? 난 서울이 좋다.”
혜성은 피식 웃고 다시 차에 올랐다.
그날 저녁 무렵.
혜성은 온종일 NSA의 지정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녹초가 돼 호텔에 돌아왔다. 물론 의사는 며칠은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렸지만, 태호가 24시간 옆에 있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혜성은 재킷만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스킬 무효화라니.”
그는 오른손을 들어 멍하니 바라봤다.
굳은살이 박인 평범한 손이었다.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은 탓인지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수영을 비롯한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스킬 무효화를 다시 쓸 수 있을까?”
혜성은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우연에 가까웠다. 이론이야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몸에 완전히 익히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똑똑.
“뭐 하냐?”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호였다.
혜성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맥주는 안 사왔어? 난 밤에 누굴 방문할 때는 꼭 맥주를 가져갔는데 말이야.”
“넌 아직 환자잖아. 웬 맥주?”
“아니야. 그런 게 있다.”
“뭐야? 싱겁긴.”
태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테라스에 나가 나란히 앉았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밤바람이 선선했다.
“이 밤중에 웬일이냐? 연우 씨하고 데이트 안 해?”
“어떤 새끼가 툭 하면 사고를 쳐서 데이트할 틈도 없다. 내가 그 새끼 꽁무니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쁘다.”
태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악의 없는 농담을 건넸다.
“미안하다. 조금만 참아라. 길어야 4개월이니까.”
혜성은 눈을 지그시 감고 쓰게 웃었다.
처음에는 각종 보상금과 조위금, 국립묘지를 위해 아등바등 죽으려 했지만, 지금은 그 목표가 희미해졌다.
‘난 왜 이렇게 힘들게 싸우는 걸까? 그냥 평범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자신도 목적의식이 희미해져 혼란스러웠다.
“글쎄. 4개월은 좀 이른 거 같은데?”
태호는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입가를 씰룩이는 걸 보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혜성은 눈을 뜨고 태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 사건의 포상 말이야.”
“포상? 기껏해야 감사패나 표창장 좀 받겠지. 위로금 약간하고.”
혜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표창장. 언론의 인터뷰. 각계의 위로금. 이런 것도 처음 한두 번이었다. 오늘도 물류협회장이라는 사내가 공치사하며 대단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는 감흥도 없었다.
“그게 아니야. 다른 포상이야.”
“……?”
“내가 찾은 것 같다.”
태호는 계속 뜸을 들였다.
“뭘 찾아?”
“네가 살 수 있는 방법.”
“미친놈.”
혜성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고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태호가 하는 말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말이야. 내가 언제 허튼소리 하는 거 봤냐? 아직 단정 짓기엔 이르지만, 이론상으론 충분히 가능해.”
태호는 여전히 진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제야 혜성도 눈을 빛내며 다시 녀석을 바라봤다.
“해답은 우민창한테 있었어.”
“우민창? 듀얼 각성?”
혜성은 재차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아니야. 듀얼 말고 능력이 없는 우민창.”
태호는 그의 상태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알고 있는 대로 그의 몸은 각성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이야 단전이 허용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에너지의 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4개월 후에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내부에서 쾅.
“그래서 말인데. 우민창처럼 네 단전을 제거하면 어떨까? 너도 봤겠지만, 단전과 에너지가 없어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거든.”
“능력을 제거한다고?”
혜성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꼭 능력자로 살 필요 있어? 제주도 전망 좋은 곳에 펜션 하나 짓고, 마당에서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도 좋잖아.”
“…….”
“너한테 각성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 이제 막 명예를 얻었는데 포기하는 게 아깝겠지. 나도 부상 때문에 현장을 포기할 때 무척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부와 명예도 죽으면 다 끝 아니야? 일단 살고 봐야지.”
“평범한 삶이라. 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새 생명을 얻는 건가?”
혜성은 녀석이 한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각성자에게 각성 능력은 목숨보다 귀한 터.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뭐,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한 건 아직 이론일 뿐이니까. 서울에 올라가면 사업가 우민창을 좀 더 조사해야 할 것 같아. 이것저것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태호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고맙다. 며칠만 더 생각해볼게.”
혜성은 태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생각이 많았을까? 녀석이 혼자 방을 오락가락하며 고민하는 모습이 안 봐도 눈에 훤했다.
태호는 김연우와 약속이 있다며 그의 방을 나섰다. 물론 핑계. 혜성에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배려였다.
“능력이냐, 목숨이냐? 참 어렵군.”
혜성은 쓰게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