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8. 4차 각성 (2)
ICC 앞 정원.
“뭐야?”
장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우민창이 바람과 물의 공격을 재개했다. 이건 예정된 수순. 문제는 이에 대한 혜성의 반응이었다. 놈의 공격을 막거나 피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놈의 강기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앙, 놈의 강기가 혜성의 가슴을 강타했다.
“혜……”
장진우와 강지영은 동시에 혜성에게 달려들려다가 멈칫했다.
“크윽.”
혜성이 이를 악물고 놈의 공격을 버텨낸 것이다. 암흑의 수호자는 보통의 형태를 유지한 채였다.
비록 핏물을 뿜으며 두어 걸음 비틀거리긴 했지만, 아까처럼 멀리 나가떨어지거나 볼썽사납게 처박히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팔을 슬쩍 들어 장진우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뭐야?”
공격을 한 우민창조차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력을 다한 일격. 그는 혜성이 피할 걸 예상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조금 부족한가?”
퉤, 혜성은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으며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뭔가 계산대로 안 풀렸다는 눈치였다. 그는 제자리에서 한 번 가볍게 뛴 뒤, 다시 우민창을 향해 돌진했다.
“이 무식한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우민창의 말끔한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놈은 양팔을 앞으로 뻗어 푸른 기운과 녹색 기운을 마구 쏟아냈다.
퍼퍼펑, 여덟 개의 강기가 전후좌우에서 혜성을 덮쳐 갔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조금 전보다 약했지만, 전부 합치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강해 보였다.
콰콰쾅, 다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혜성은 제자리에 서서 놈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어?”
장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폭발은 물보라와 소리만 요란했다. 혜성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우민창이 힘을 뺐을 리는 없고. 혜성 씨에게 새로운 스킬이 생기거나 방어력이 올라간 건가?”
강지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폭발은 찰나의 순간. 그녀가 정확히 본 건 아니었지만, 혜성이 특별한 스킬을 사용한 것 같진 않았다. 물이 솜에 스며들 듯 놈의 공격이 스르르 약해진 느낌이었다.
“혹시 4차 각성일까?”
장진우의 목소리에 불안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성의 징후는 아직 2차 각성 상태. 만약 정말 4차 각성이 있다면, 뭔가 다른 징후가 나올 것 같았다. 3차 각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개새끼! 죽어!”
그사이 우민창이 사력을 다해 공격을 펼쳤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크고 강한 공격. 혜성의 전신을 뒤덮고도 남을 크기였다. 다만 무리한 탓인지 놈의 입가에 엷은 핏물이 흘렀다.
“흥.”
혜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
장진우와 강지영은 눈을 부릅떴다.
이제야 보였다. 혜성이 무얼 한 건지. 그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암흑의 수호자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형의 파장을 만드는 것처럼. 이어서 놈의 공격은 그의 주위에 닿자마자 스르르 소멸했다.
“어빌리티 캔슬링?”
장진우는 신음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디버프처럼 상대의 능력을 줄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정 범위 내의 능력자와 아이템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꿈의 스킬이 떠올랐다.
***
어빌리티 캔슬링, 일명 능력 무효화.
최초의 아이디어는 1980년대부터 항공사의 헤드폰에서 쓰이던 ‘노이즈 캔슬링’에서 시작됐다.
우선 헤드폰에 부착된 센서로 외부 소음을 받아들이고, 소음의 파장을 분석한다. 그다음 이를 상쇄하는 반대 파장을 쏴서 외부 소음을 제거한다. 최근엔 일반 이어폰에도 적용되고 있는 기술이었다.
어빌리티 캔슬링도 이와 비슷했다. 모든 스킬과 아이템에는 고유한 파장이 있는바, 이를 분석한 뒤 반대 파장을 쏴서 상대의 능력을 제거하는 기술이었다.
“그건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기술일 텐데? 혜성 씨는 정말 4차 각성이라도 한 건가?”
그는 홀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우선 스킬과 아이템의 파장은 사람의 지문처럼 전부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소음과 달리 능력자의 스킬은 파장을 받아들이고 분석하는 과정도 어려웠다.
어빌리티 캔슬링이 꿈의 스킬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각국의 각성자 연구소에서 무효화를 활발히 연구 중이지만, 완성까지 최소한 10년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혜성 씨 혼자 한 게 아니에요. 혜성 씨와 카피캣이 먼저 상대의 파장을 받아들이고, 대수영이 파장을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암흑의 수호자가 진동해서 반대 파장을 만드는 거죠.”
강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4차 각성과 달랐다. 각성은 어디까지나 혜성이 스스로 펼치는 능력이었다. 반면 지금 선보인 어빌리티 캔슬링은 혜성과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도달한 새로운 경지였다.
중간에 혜성이 몇 번 당한 건 신기술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시행착오였다.
“뭐야?”
우민창이 당황해서 연거푸 물의 공격을 날렸다. 지금 혜성은 단전이 하나인 탓에 바람의 속성만 카피한 상태. 물의 속성이라면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흥!”
혜성은 놈의 공격을 무시하고 가볍게 코웃음 쳤다.
지금 우민창은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혜성은 단전이 하나여서 스킬을 펼칠 수 없을 뿐. 물의 속성 또한 데미지를 통해 그의 내면에 파장이 각인된 상태였다. 물과 바람. 우민창이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은 모두 무효화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끝났군요.”
강지영은 혜성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당사자인 혜성 또한 어빌리티 캔슬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민창의 스킬을 그대로 카피하고 있었으니까. 2차 각성의 징후와 암흑의 수호자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카피로 인한 스킬은 자연스럽게 무효가 됐다.
이제부턴 능력자 간의 전투가 아니었다. 빗속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막싸움이었다.
“이 개새끼!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민창은 이성을 잃고 거칠게 주먹을 뻗었다. 스킬이 제거된 탓에 느리고 무기력한 주먹이었다.
혜성은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간단히 공격을 피했다. 우민창은 강력한 에너지를 이용한 원거리 딜러. 근접전은 허술했다. 반면 혜성은 하급 능력자 출신답게 이런 진흙탕 싸움이 장기였다.
퍽, 그의 주먹이 우민창의 복부에 꽂혔다.
“컥.”
우민창은 침을 흘리며 허리를 굽혔다.
다음 순간, 혜성은 상체를 숙이고 놈의 턱에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쾅, 놈은 위로 살짝 들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체력이 형편없군.”
혜성은 놈을 비웃으며 오른발로 놈의 턱을 걷어찼다.
확실한 마무리. 놈은 흰자위를 드러내고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ICC 로비에 있던 사업가 우민창이 그랬던 것처럼.
“능력 무효화라니. 대단하지 않…….”
장진우는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비바람만 거칠게 몰아칠 뿐, 강지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다정’이라고 쓰인 주인 잃은 신분증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혜성의 숨은 조력자라. 이번에도 윗선에서 개입해서 흔적을 지우겠지?”
그는 쓰게 웃으며 신분증을 주워들었다. 조만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다음 날 새벽 4시, 일본 L 호텔 VIP 룸.
쾅!
흰 정장을 입은 사내는 테이블에 놓인 수정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파편들이 벽을 맞고 유리 알갱이처럼 부서졌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건가?”
그는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을 쏘아봤다. 분노 때문에 어깨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벽에 걸린 대형 TV에서는 긴급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국의 이혜성이 블랙과 연관된 능력자를 제압하고 재계의 유명 인사들을 구했다는 내용이었다.
범인들의 모습은 모자이크로 처리됐지만, 우민창과 그 부하들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병원에 실려 가는 혜성과 동료들, 들것에 실려 운반되는 시체들, NSA의 정복을 입은 처리반의 사후 수습이 차례로 나왔다.
다만 혜성을 도운 정체불명의 여자와 인질을 구출한 특수팀은 보이지 않았다. 작전 직후의 혼란을 틈타 유령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 …… 우리 KIFFA는 이혜성과 NSA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전병수라는 KIFFA의 회장이 대표로 언론사들과 인터뷰했다. 간밤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는 혜성의 활약상을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죽음, 부활, 신기술 등장과 빗속에서의 혈투.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전부 갖추고 있었다. 그는 혜성에 대한 KIFFA와 재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장담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제 불찰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회색 생활 한복의 마스터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 같아선 당장 한국으로 날아가 우민창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우민창이나 만병쌍수를 잃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우민창이 희귀한 듀얼 각성자이긴 했지만, 그를 대신할 능력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잡힘으로 인해 조직의 자금줄이 노출됐다는 것이었다.
“고정하십시오. 일단은 사태의 수습이 우선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검은 기모노의 마스터가 얄밉게 끼어들었다.
흰 정장의 노인은 한참 동안 회색 마스터를 노려봤다. 그도 뒷수습이 먼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기물을 부순 정도로 끝냈으니까. 만약 그가 정말 화를 냈다면, 그 여파는 호텔은 물론이고 도쿄 전체를 뒤엎었을 것이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 화를 진정시키고 검은 마스터를 바라봤다.
“차라리 잘됐네. 이번 기회에 조직의 재정비도 나쁘지 않겠지. 좀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좀 나서줘야겠네.”
그는 조직의 재정비 방향을 간략히 설명했다. 당분간 한국에선 손을 떼고 중국과 일본에 집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검은 마스터는 회색 마스터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흰 정장의 노기 탓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스쳤다.
“그리고 자넨……”
흰 정장의 노인은 회색 마스터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시 화가 치밀어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겨우 화를 삭이고 말을 이었다.
“딱 1주일을 주겠네. 그 안에 자네가 직접 가서 이혜성의 목을 가져오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 대가는 자네의 목숨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아주 잠깐, 그의 찢어진 두 눈에 옅은 살기가 스쳤다.
테이블에 있던 만년필이 둥실 떠올라 빠르게 날아갔다. 마치 화살처럼.
퍽, 만년필은 회색 마스터의 목에 엷은 상처를 남기고 스쳐 지나가 벽에 박혔다.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끝까지 깊숙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쿵, 회색 마스터는 테이블에 이마를 찧으며 대답했다. 그의 하얀 목에서 칼에 베인 것처럼 엷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혜성.”
회색 마스터는 눈을 붉게 빛내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