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7. 4차 각성 (1)
ICC 앞 야외공원.
콰쾅, 이제 이곳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악천후. 그 속에서 그림자 셋이 유령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우민창 대 강지영과 장진우의 연합이었다.
“크하하핫!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나?”
격전 속에서 우민창의 의기양양한 웃음이 터졌다.
현재 놈은 100% 이상의 버프를 받은 셈이었다. 강지영과 장진우가 이를 악물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바람과 물로 구성된 놈의 이중 방어막 앞에서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오히려 놈의 반격이 있을 때마다 물러서며 막아내기 급급했다.
원거리 공격은 보기보다 에너지의 소모가 컸다. 강지영과 장진우의 호흡이 서서히 가빠졌다. 공격의 흐름이 깨진 상황. 둘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깐 좌우로 물러섰다.
“10분도 못 버티나?”
우민창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둘을 향해 팔을 뻗었다. 놈의 특기. 물과 바람이 어우러진 강력한 강기가 좌우로 쏘아졌다.
“젠장!”
강지영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급히 양팔을 들어 방어막을 만들었다.
에너지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놈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장진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역시 둘만으론 무리인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였다.
“10분이면 충분하지!”
강지영과 장진우의 뒤에서 기다렸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 씨?”
둘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뒤를 돌아봤다.
퍼펑, 우민창의 공격처럼 바람과 물이 어우러진 강기가 위에서 아래로 날아오고 있었다. 타깃은 우민창. 강기 뒤로는 2차 각성 상태의 혜성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왔나?”
우민창은 히죽 웃으며 쭉 뻗은 두 팔을 앞으로 오므렸다. 강지영과 장진우를 향해 날아가던 강기가 급선회하며 혜성의 강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쾅, 놈과 혜성 사이에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혜성의 기습은 놈의 공격을 돌리기 위한 미끼였다. 그사이 혜성은 강지영과 장진우의 사이에 서서 놈과 마주했다.
“돌아올 줄 알았다. 생각보다 늦었군.”
우민창은 혜성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리곤 양팔을 쭉 뻗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려는 것처럼. 놈의 주위를 둘러싼 바람과 물의 보호막이 한층 더 짙어졌다.
‘놈은 지금 최소 S급. 저게 바로 속성과 환경의 시너지인가?’
혜성은 우민창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놈의 공격은 실내보다 훨씬 강할 터. 혜성 또한 카피캣을 통해 바람과 물의 속성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놈처럼 힘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바꾸는 건 무리였다.
“혜성 씨. 괜찮아요?”
왼쪽에서 강지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무리할 필요는 없어. 우린 팀이니까.”
장진우도 어느새 그의 오른쪽에 서서 팀을 강조하며 말했다.
혜성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비바람 때문에 정확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호흡이 거친 것으로 보아 둘 다 상당히 지친 것 같았다.
“두 분은 잠시 쉬고 계십시오. 지금부턴 제가 맡겠습니다.”
혜성은 두 주먹을 움켜쥐며 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혼자서는……”
장진우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혜성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놈에게 고정한 채. 장진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건가?”
결국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알던 혜성이 아니었다. 단순한 자신감을 넘어서 주위 사람을 들뜨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좋아요.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나, 한번 보죠.”
강지영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 웃으며 물러섰다.
“너 혼자? 한번 깨졌으면서 뭘 하려고? 그냥 다 같이 덤비는 게 나을 텐데?”
우민창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누가 혼자라는 거냐? 보면 안다.”
혜성은 씨익 웃으며 놈을 향해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눈치였다.
***
장진우와 강지영은 옆으로 물러섰다. 장진우는 그녀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콰쾅!
성난 번개가 순간적으로 세상을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혜성과 우민창은 동시에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놈. 아까는 봐 준 건가?’
장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민창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마치 혜성의 등장에 자극받은 것처럼. 장진우의 안력으로도 놈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저건 뭐지? 버프 이상인데?”
옆을 슬쩍 돌아보니 강지영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제법인데?”
우민창이 과장되게 감탄하며 오른손으로 바람의 강기를 날리려 했다.
혜성은 놈이 주먹을 뻗기도 전에 옆으로 움직여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놈의 움직임을 예상한 것처럼. 다시 놈이 기다렸다는 듯 물의 강기를 날리자, 혜성도 오른손으로 같은 물의 강기를 발사했다.
콰쾅, 폭우 속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생겼다. 역시 놈의 공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혜성의 강기가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젠장!”
혜성은 이를 악물고 놈의 강기를 얼굴로 받았다.
어차피 예상한 결과였다. 암흑의 수호자가 그의 측면에 집중, 위력이 반감된 상대의 강기를 막아냈다. 콰쾅, 그의 얼굴이 뽑힐 것처럼 위로 들렸다. 치명상은 면했지만, 순간적으로 얼굴 일부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크윽!”
혜성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왼쪽 손등으로 우민창의 얼굴을 가격했다. 에너지의 대결에는 승산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직접적인 물리 타격 위주로 작전을 바꾼 것이다.
쾅, 우민창 또한 그의 손등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역시 예상대로. 우민창은 에너지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이 장기였다. 순수하게 체술만 놓고 봤을 때는 유수혁이나 만병귀에 비해 한 수 아래였다.
“나이스!”
장진우가 주먹을 쥐며 짧게 환호한 순간이었다.
“혜성 씨의 실력이 갑자기 확 좋아진 건 아니에요. 대수영, 암흑의 수호자, 카피캣. 시그니처 아이템들이 이제야 혜성 씨를 중심으로 한 팀을 이룬 느낌이에요.”
강지영이 대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혜성이 놈에게 했던 말,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확히 봤군. 지금까지는 아이템들이 각자의 역할만 수행하며 따로 노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혜성 씨와 아이템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고 있어.”
장진우는 잠깐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숨이 멎었던 때를 떠올렸다. 육신의 감각이 사라진 대신 정신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었다. 유체이탈처럼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된 상태. 혜성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아이템과 교감을 나눈 것 같았다.
“다만 지금 상태로는 부족해요. 한 방.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요.”
다시 강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계속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지금이라도 싸움에 끼어들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잠깐만 더 기다려 보지. 혜성 씨는 분명 뭔가를 보여줄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장진우는 기대에 찬 눈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혜성 씨. 당신의 잠재 능력은 단순히 상대의 능력을 카피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이제 진짜를 보여줄 때가 됐어요.”
강지영 또한 눈을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백스핀이 성공한 뒤, 혜성은 우민창을 따라가며 추가 공격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놈이 오른손으로 강기를 쏘는 환영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카운터가 될 터.
‘젠장.’
그는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거두고 물러났다.
펑, 놈의 강기는 혜성의 가슴을 스치고 옆에 있던 화강암 조형물을 박살 냈다.
“이 새끼, 제법이군. 영화나 무협소설도 아니고.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거냐?”
우민창은 핏물이 섞인 가래침을 뱉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꽤 놀란 것 같았다. 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역시 별 데미지는 없는 건가?’
혜성은 조금 전 손에 느껴지던 감각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손에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놈을 죽이지는 못해도 그로기까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놈의 표정을 보니 놀라긴 했어도 크게 충격받은 것 같진 않았다.
- 이대로는 안 된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대수영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암흑의 수호자도 마찬가지인 듯 가볍게 진동했다.
‘3차 각성이다!’
혜성은 놈을 향해 달려들며 의식을 집중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놈이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오며 주먹을 뻗는 게 느린 동작으로 보였다. 퍼펑, 놈이 자랑하는 바람과 물의 강기가 날아왔다.
‘기회는 단 한 번!’
혜성은 상체를 숙여 놈의 강기를 머리 위로 흘렸다. 그리곤 놈의 품에 파고들며 손바닥을 놈의 배에 갖다 댔다. 아니, 갖다 대려 했다.
“병신. 또 그 수법이냐?”
우민창은 차갑게 비웃으며 뒤로 쩍 물러나며 오른발을 굴렀다.
바닥에서 난데없이 물의 기둥이 솟았다. 놈과 혜성을 가로막는 것처럼. 혜성의 손바닥은 타깃을 잃고 물을 스쳤고, 그사이 놈은 다시 바람과 물의 강기를 날렸다.
“젠장!”
혜성은 급히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콰쾅, 놈의 강기가 가드처럼 올라간 그의 팔뚝을 강타했다. 팔뚝이 대번 시큰해진 가운데, 그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우민창은 히죽 웃으며 손을 거뒀다.
“쯧쯧. 학습 능력이 부족하군. 그건 이미 안 통하는 걸 알았을 텐데? 네 3차 각성은 발경의 일종. 네 손바닥에 닿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놈은 검지를 까딱이며 짐짓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혜성의 전투 방식이야 워낙 유명한 터. 놈은 혜성의 영상을 한두 번 보고 분석한 게 아니었다.
‘3차 각성도 실패인가?’
혜성은 굳은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2차 각성에 아이템들의 유기적인 활용까지 더해졌지만, 놈도 속성 중첩이라는 버프를 받은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은 체력 저하라는 2차 각성의 고질적인 문제까지 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과는 뻔했다.
- 역시 방법은 ‘그것’뿐이다. 버프까지 받았으니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머릿속의 대수영이 ‘그것’을 힘주어 말했다.
혜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좋아. 해 보자!”
혜성은 자신의 뺨을 툭툭 치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와 카피캣의 카피 능력, 대수영의 분석 능력, 그리고 암흑의 수호자의 데미지 경감 능력까지. 넷의 호흡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면, 대수영의 말대로 충분히 가능했다. 가칭 ‘4차 각성’이라는 새로운 스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