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96화 (96/150)

# 096. 부활 (3)

혜성은 검은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정신은 평소처럼 멀쩡했다. 유체이탈이었던가? 언젠가 초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이게 죽음이라는 건가? 아니지. 난 평소처럼 생각하고 있잖아. 만약 정말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그래서 죽은 후에도 의식이 남아 있다면, 죽음은 대체 어떤 의미지?’

그는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4개월 남짓.

예정된 죽음을 조금 일찍 맞이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죽음의 예행연습.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블랙의 강자와 싸우다 죽었는데, 겨우 한다는 고민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니.

부웅, 진동과 함께 위에서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빛은 처음엔 반딧불이처럼 작았지만, 이내 태양처럼 커져 그를 감쌌다.

쾅!

“으아악!”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비명이 들렸다.

“뭐야? 적이냐?”

혜성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 있던 이상한 공간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불타고 있는 거대한 성의 홀이었다. 중세 영화의 한 장면과 비슷했지만, 복장이며 언어가 낯설었다.

“환각인가?”

그는 자신의 뺨을 꼬집어봤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오감도 정상인 것 같았다.

“크윽!”

우측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렸다. 그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인을 연상시키는 중년의 기사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손에 든 장검은 날카로운 빛을 잃고 부러진 상태. 바닥에는 기사의 제자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시체가 돼 널브러져 있었다.

기사의 정면, 키가 큰 사람 형태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뭐지?’

혜성은 그림자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을 주목했다.

몬스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사기(邪氣). 언뜻 블랙의 기운과 비슷했지만, 블랙의 기운보다는 맑고 순수한 느낌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린 순수한 악. 만약 세상에 정말 악마가 있다면, 그게 딱 저 그림자일 것 같았다.

기사는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꼿꼿하게 버티며 뭐라고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 하지만 무슨 말인지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분하다. 하지만 나…… 이대로 끝이 아니다. 비록 육신은 이대로 소멸…… 영혼은 언제까지나…… 투쟁할 것이다.”

부상 때문에 말이 중간에 끊겼지만, 그 안에 담긴 기사의 의지는 생생했다.

“당신들은 대체……”

혜성은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가려 했다. 기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를 도와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허공을 맴돌았다. 마치 그 혼자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기사와 악마의 그림자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림자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기사의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오오, 검은 바람과 함께 죽은 마스터가 다시 일어났다. 피처럼 붉은 해골 기사.

‘블러디 나이트?’

혜성은 강원도 산간에서 발견된 S급 몬스터를 떠올렸다.

10년 전이었나? 한국에 최초로 등장한 S급 던전의 주인이었다. 놈의 특기는 강력한 방어력과 힘. 당시 CIC와 백호 길드가 연합해 겨우 사냥에 성공했다고 했다.

이어서 기사의 제자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되살아났다. 블러디 나이트의 부하, 블러디 스켈레톤이었다.

“크크크!”

그림자는 한참 동안 블러디 나이트와 스켈레톤을 둘러보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시간이 흘렀다. 영화의 필름을 빠르게 감은 것처럼 낮과 밤이 교차했다. 성은 점점 이끼가 끼고 낡게 변했다. 그리고 블러디 나이트와 블러디 스켈레톤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 갔다.

얼마 후, 갑옷을 입은 능력자들이 나타났다.

“아!”

혜성은 탄성을 내뱉었다. 능력자들 중앙, 젊어 보이는 김준수가 있었다.

그다음은 그가 알고 있는 대로였다. 능력자들과 블러디 나이트의 사투, 던전 클리어, 몬스터들의 시체와 각종 진귀한 아이템의 약탈.

“……이게 다 얼마짜리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오랜만에 큰 거 물었는데?”

백호 길드 능력자들의 탐욕에 찬 대화가 일부 들렸다. 몇 놈은 블러디 스켈레톤이 지녔던 무기를 슬쩍 백팩에 넣었다.

다시 장소가 바뀌었다. 송도의 연구소. 두꺼비 선임 연구원이 모니터를 보며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모니터에서는 아이템의 동기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이템의 코드명은 ‘암흑의 수호자’, 그리고 그의 새 주인은 ‘이혜성’이었다.

환상이었다. 혜성이 발을 내딛는 순간, 그가 보고 있던 것들은 환한 빛이 돼 사라졌다. 대신 처음의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 이제 알겠어?

그의 머릿속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수영이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수호자의 과거냐?”

- 맞아.

대수영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피식 웃었다.

“이계의 능력자가 죽어서 몬스터가 되고, 다시 몬스터가 죽어서 아이템이 됐다? 나보고 이 말을 믿으라고?”

혜성의 말이 빨라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림자에게 죽으면 모두 몬스터가 되는 건가? 아니면, 그림자의 스킬을 받아야만 몬스터가 되는 건가? 등등. 묻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 그럼 넌 아이템이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했어? 당장 암흑의 수호자만 해도 모양과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하는데. 이런 물질이 이 세계에 있을 거 같아?

“하지만……”

혜성은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멈칫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아이템에도 의식이 남아 있나? 사람과 몬스터였던 시절의 기억이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 당연하지.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너희들 기준으로 아이템의 등급이 높을수록 잠재된 의식도 크지.

“혹시 두꺼비나 다른 이들이 카피캣을 조심하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인가?”

- 그래. 생전의 놈은 야망이 컸거든. 결코 널 보조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거야.

“그럼 너와 카피캣은 뭐였지?”

- 글쎄.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나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적을 처리하는 게 우선 아닌가?

대수영은 웃으며 되물었다.

혜성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부서진 기물들이 쌓인 더미 속. 우민창의 공격을 맞고 단전이 박살 나던 것도 떠올랐다.

- 가자, 네가 있던 세계로. 빚은 갚아줘야지?

“쿨럭!”

마른기침이 터졌다. 의식의 공간이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한바탕 긴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머리맡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광역형 힐링 아이템. 장진우가 전송한 것이었다.

‘팀장님도 무사한 거 같군.’

그는 의식을 집중하고 힐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지하 마켓에서 진법에 갇혔을 때 느꼈던 기운. 강지영의 버프였다.

‘강지영도 온 건가?’

혜성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가자. 이제부턴 내가 반격할 차례다.”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

ICC 로비.

막내와 한수호는 등을 맞대고 우민창의 부하들과 대치 중이었다. 우민창이 사라지고 억압도 풀렸지만, 여전히 팔을 뒤로 하고 능력이 봉인된 상태였다.

“젠장. 어때? 버틸 만해?”

“아직 괜찮습니다. 형은요?”

“명색이 불사신 이혜성의 오른팔인데, 내가 이 정도로 죽을 거 같아?”

막내와 한수호는 쓰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말뿐이었다. 몇 대 맞은 탓에 둘 다 얼굴이 멍들고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다리도 후들거리는 상황. 안 쓰러지는 게 용했다.

“뭐해? 빨리 저 두 놈을 처리하지 않고?”

사업가 우민창이 부하들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콰쾅, 폭음과 함께 천장에서 연막탄이 쏟아졌다.

“뭐야?”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파팟, 연기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내려오고, 뒤이어 여기저기서 테러범들의 비명이 들렸다.

“누구지?”

막내는 어리둥절해서 한수호를 쳐다봤지만, 한수호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우민창은?”

막내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1시 방향 출입구. 우민창이 부하들을 앞세우고 도망치고 있었다.

“우민……”

그가 막 놈을 부르며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쾅, 우민창은 고개가 옆으로 꺾여 벽에 처박혔다.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또 누구지?”

“바람의 능력자?”

막내와 한수호는 동시에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0여 초가 지나자 연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

둘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다른 이들도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닐까, 하고 눈을 비볐다.

“많이 걱정했지?”

흩어지는 연기를 배경으로 혜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형?”

“선배님?”

둘은 미친 듯이 혜성에게 달려갔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났다.

“이혜성이 돌아왔다!”

다른 이들도 혜성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렀다.

적의 잔당은 순식간에 특수팀에게 진압당했다. 특수팀의 숫자는 약 스물. 잔당 몇 놈이 약삭빠르게 도망쳤지만, 그래 봐야 독 안에 든 쥐였다.

‘NSA나 CIC는 아닌 것 같고. 강지영이 지원팀을 부른 건가?’

혜성은 대번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가 양지에서 블랙을 유인하고, SJ가 숨어 있다가 블랙의 뒤통수를 친다. 지금까지 여러 번 반복된 패턴이었다. 이번에도 강지영이 어딘가에 숨어서 그를 지켜보다가 지원팀을 부른 게 분명했다.

“아무튼 잘 버텼다. 이제부턴 내가 맡지.”

혜성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형 혼자?”

“저희도 돕겠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섭섭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수팀이 능력을 봉인하던 수갑을 자른 상태였다.

“아냐. 너흰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지켜줘. 놈들의 잔당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혜성은 인질들을 곁눈질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막내는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와 한수호는 부상이 심한 상태였다. 혜성을 돕겠다고 나서봤자 방해가 될 게 뻔했다. 다만 혜성은 이걸 직접 말하지 않고 인질 핑계를 대며 돌려 말한 것이다.

“알았어요.”

막내는 한수호와 시선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혜성은 둘의 어깨를 툭툭 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저편, 3개의 기운이 빠르게 움직이며 싸우는 게 느껴졌다. 우민창 대 강지영과 장진우 연합일 게 분명했다. 2 대 1의 싸움이었지만, 우민창은 조금도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둘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강지영과 장진우가 무릎을 꿇는 것도 시간문제.

“우민창.”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며 놈의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

‘어? 형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순간, 막내는 혜성의 옆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님이 뭔가 보여줄 것 같은데요?”

한수호도 혜성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혜성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푸른빛의 버프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 이전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다.

둘은 문득 신촌의 사건을 떠올렸다. 혜성이 자력으로 3차 각성을 처음 선보였을 때와 같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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