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4. 부활 (1)
ICC 4층, 여자 화장실 마지막 칸.
정장을 입은 한 중년 여성이 숨어 있었다. 조금 전 경호원이 죽는 걸 본 사람답지 않게 차분했다. 목에 걸린 신분증에는 ‘JU 컨설팅 이사 강다정’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가짜 신분이었다.
완벽한 변장으로 다른 사람이 된 강지영이었다.
‘설마 혜성 씨가 당할 줄이야.’
그녀는 피곤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혜성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단전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 처박히던 장면이었다.
일반인도 단전을 다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런데 능력자가 단전이 뚫렸다? 그건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실제로 그녀의 스킬로도 혜성의 기척을 더는 감지할 수 없었다.
“으아악!”
“살려줘!”
멀리서 비명과 고함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금방이라도 괴한들이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이닥칠 것 같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다가 멈칫했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건 금물이었다.
“씨발.”
강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 요원에게는 슬픔조차 사치다. 전장에서는 설사 부모나 형제가 죽어도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녀가 햇병아리였을 때, 어느 선배가 해준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한 선배도 슬퍼할 틈도 없이 비명횡사했지만.
머리로는 그 말을 백번 이해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였다. 특히 죽은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성이었다.
‘웅이 안 와서 다행인가?’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웅은 눈에 띄는 덩치 때문에 이번 작전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만약 녀석이 혜성의 죽음을 봤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미쳐서 날뛰다가 적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집중하자, 강지영. 지금은 임무가 우선. 슬퍼하는 건 복수를 한 다음에도 늦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두 뺨을 찰싹 두드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의 폭우는 더 심해졌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돌풍에 휩쓸린 승용차 한 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스마트 워치의 베젤을 돌렸다. 버튼에서 특수한 레이저가 폭풍을 뚫고 날아갔다. 마치 등대가 어둠을 뚫고 멀리까지 빛을 쏘는 것처럼. 이어서 그녀는 스마트 워치를 두드렸고, 이에 레이저도 반복적으로 깜빡거렸다.
- 이혜성 사망. 인질 구출 작전 개시. 지원 바람.
***
로비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막내를 포함해 살아남은 자들은 팔을 뒤로 해서 결박당해 있었다. 능력을 봉인하는 특수 수갑을 찬 채였다.
‘개새끼들. 근데 우릴 왜 살려둔 거지?’
누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막내는 능력자 우민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계의 인사들이야 훌륭한 인질이니까 그렇다 쳐도, 경호원 능력자들을 살려둔 건 의외였다. 그러나 잠시 후, 두 우민창의 대화를 언뜻 듣고 의문이 풀렸다.
“…… 그래, 실험체들도 다수 확보…… 특히 NSA의 A급 둘…… 연구소에서……”
“……불과 물…… 가급적 생포…… 예정대로 놈들의 단전을 추출해서……”
거리가 멀어서 몇몇 단어밖에 듣지 못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실험실의 생쥐들.
놈은 막내와 다른 이들을 이용해 인간과 몬스터의 융합에 관련된 실험을 하려는 것 같았다.
‘역시 놈들은 블랙이나 지하 마켓과 관련된 건가?’
막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옆을 슬쩍 돌아봤다.
한수호는 충격이 큰 듯 아직도 멍해 있었다. 하긴, 우상처럼 여기던 혜성이 죽은 상황이었다. 능력은 강해도 녀석은 아직 중학생이었다.
‘그나저나 우민창이 둘이었다니.’
한 명은 단전이 없는 일반인이고, 한 명은 단전이 둘인 능력자. 막내는 뭔가를 떠올렸다.
능력 이식.
상대에게 수술로 능력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식술은 아직 연구 중이었고, 설사 수술한다 해도 그 성공확률이 너무 낮아서 문제였다. 수술 대상도 일부 쌍둥이들만 가능했고, 그나마도 성공확률이 5% 미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우민창을 뒷조사했을 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건가?’
그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빛과 어둠의 형제. 아마 한 명은 양지에서 회사를 키우고, 다른 하나는 음지에서 라이벌들을 제거하며 서포트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젠장.”
왜 처음부터 우민창이 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막내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로비가 시끄러워졌다. 도망쳤던 이들이 우민창의 부하로 보이는 복면인들에게 하나둘씩 끌려온 것이다.
복면인들의 숫자는 스무 명 이상. 세미나의 스태프로 잠입해 있던 것 같았다. 참석자 몇몇은 아직 여기저기에 숨어 있었지만, ICC는 현재 악천후로 고립된 상태였다. 놈들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 수금 좀 해볼까?”
능력을 지닌 우민창은 히죽 웃으며 재계 인사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테러범이 인질들에게 스위스나 해외의 은행 계좌로 입금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장 현금이……”
놈과 시선이 마주치자, 인질들은 사색이 돼 주춤 물러섰다.
“괜찮아. 무기명 주식이나 채권, 담보, 사업권 등등. 돈이 되는 건 다 받아 주니까.”
이번엔 사업가 우민창이 게이트를 곁눈질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게이트 오프너를 잠시 중지시킨 상태.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개할 수 있었다.
“저, 정말 돈을 내면 살려주는 건가?”
인질 중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니.”
능력자 우민창은 말을 꺼낸 인질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퍼억, 인질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다.
“멍청한 새끼.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야. 단, 시키는 대로 하면 내일 아침까지는 살려주지.”
놈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당장 죽을 것인가? 돈을 주고 하룻밤만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결국 고민하던 누군가가 놈의 계좌로 거액을 입금했다. 한 명이 나서자 두 명, 세 명 놈의 말을 따르는 자들은 시나브로 늘어났다.
‘혜성이 형.’
막내는 혜성이 묻힌 곳을 힐끔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혜성이 더미를 헤치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슬퍼하는 것보다 복수가 우선이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도 비장의 카드를 꺼내자.”
그는 한수호의 팔을 툭 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형.”
한수호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녀석도 막내의 생각을 눈치챈 것 같았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둘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그걸 혜성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미친놈은 자기 하나로 족하다고 반대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혜성이 죽은 상황이었다. 이판사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놈들은 장진우와 혜성을 죽이고 방심한 것 같았다.
‘개새끼들. 이혜성의 미친 짓, 시즌 2를 보여주마.’
막내는 로비 중앙의 우민창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전의 혜성이 했던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
지하 주차장.
핏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쓰러진 장진우의 배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각성 에너지의 근원인 단전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능력자 특유의 에너지나 생체 반응은 느껴지지 않았다.
찌직, 어디선가 작은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며 피 냄새를 맡더니, 죽은 장진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시체가 맞았다. 방심한 녀석은 입을 크게 벌리고 장진우의 새끼손가락을 깨물려고 했다.
“쿨럭.”
마른기침과 함께 장진우의 새끼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기침 때문에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쥐는 화들짝 놀라 근처에 있던 승용차 밑으로 달아났다.
“크헉.”
장진우는 다시 핏물을 토해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몇 분이 지나자 기력이 사지로 퍼졌다. 얼굴도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제길. 혜성 씨 말대로군.”
그는 단전을 내려다봤다. 찢어진 옷 사이로 빨갛게 부어오른 단전이 급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보라색 알갱이들이 나왔다. 세 꼬리 도마뱀을 베이스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세 꼬리 도마뱀은 몬스터 중에서 손에 꼽히는 약골.
놈은 살아남기 위해서 한 가지 독특한 재주를 지녔는데, 그건 바로 죽은 척하고 도망치는 기술이었다. 단순히 몸을 굳게 만들거나 심장 박동만 멈추는 게 아니었다. 에너지나 생체 파장 역시 완벽하게 가릴 수 있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절단과 같은 큰 상처도 아물었다.
“설마 우민창이 둘일 줄이야. 쌍둥이나 복제인가?”
장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듀얼 각성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놈의 준비가 없었더라도 그가 놈을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놈이 왜 세미나를 골랐는지 알 것 같군.”
제주도에서 혜성과 NSA를 해치우는 건 기본. 놈이 노린 건 세미나에 참석한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그 후의 혼란을 틈타 물류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일석이조.
‘수금이 끝난 다음에는 다들 몬스터들에게 죽은 것처럼 꾸밀 테지. 물론 우민창과 그 추종자들은 간신히 몸을 피해 살아남은 것처럼 할 테고.’
장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쓰게 웃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현장에서 사고를 막지 못한 NSA와 혜성에게 집중될 터. 최악의 경우에는 정, 재계의 압박을 받고 NSA가 해체될 수도 있었다.
쿨럭,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마른기침이 다시 터졌다. 핏물이 올라오면서 목구멍이 불에 타는 듯 화끈거렸다. 그는 한참 동안 캑캑거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도 못 감고 죽은 팀원들이 보였다.
‘미안하다. 너희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눈을 세게 깜빡여 애써 눈물을 삭였다.
혜성이 가져온 아이템은 프로토타입 두 개뿐. 자신만 대표로 죽고 팀원들은 인질로 만드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한번 죽음으로써 일종의 예방접종을 한 셈. 놈의 능력과 목적을 알았으니 이제부턴 그들이 반격할 차례였다.
‘지금은 임무가 우선. 이제부턴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
잠시 후, 장진우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
ICC 로비.
뚱뚱한 50대 사내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믿었던 경호원은 우민창의 손에 죽은 뒤. ‘협회장 전병수’라 쓰인 신분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너흰 대체 누구냐? 왜 이러는 거냐?’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놈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이들처럼 구석에서 몸을 떠는 게 전부였다.
“회장님.”
누군가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회장이 나서서 우민창과 협상해 보라는 신호였다. 그러고 보니 몇 명도 간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를 더 숙였다. 나서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우민창이 지금이라도 자신을 부를까 봐 조마조마했다.
‘천하의 이혜성이 쓰러질 줄이야. 그럼 이제 놈들을 막을 사람은 없는 건가?’
전병수는 로비 구석, 혜성이 묻힌 더미를 힐끔 쳐다봤다.
‘어?’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그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더미 중간쯤에 있던 파편 일부가 스르르 떨어졌다. 바람이나 다른 건 없었다. 내부에서 뭔가 움직인 것 같았다. 다만 흘러내린 파편은 모래알처럼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우민창과 부하들은 ‘수금’에 정신이 팔린 상황이었다. 아무도 그쪽을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그쪽을 쳐다봤다.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하긴, 죽은 놈이 살아오는 건 말이 안 되지.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파묻었다.
누구든지 좋았다. 그는 영웅이 나타나 저 미친 테러범들을 죽이고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