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3. 이혜성, 죽다 (4)
ICC 로비.
“워, 원하는 게 뭡니까? 돈?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해운 회사의 사장이라고 했는데, 조금 뚱뚱하고 거만한 인상이었다.
“돈?”
놈은 가면 뒤에서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멈……”
혜성이 사장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외치려는 찰나였다.
펑, 돈을 주겠다며 나선 자는 펑하고 머리가 날아갔다. 바로 옆에 있던 경호원이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으아아!”
“사람 살려!”
그제야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아비규환.
밀고 밀리고, 부딪치고 넘어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다들 위층 세미나장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글 생각인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도망일 뿐. 그런다고 괴한이나 게이트의 위협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젠장.”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로비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이 전부 빠져나가려면 최소한 10분은 걸릴 것 같았다.
‘우민창은?’
혜성은 뒤를 돌아봤다.
우민창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주요 인사들과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병신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나?”
괴한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이런 혼란을 오히려 즐기는 눈치였다.
“넌 누구냐?”
혜성이 놈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순진하군. 내가 물어본다고 대답할 거 같나?”
“이 자식이.”
우측에서 거친 욕설이 들렸다. 막내가 놈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한수호도 특유의 수(水) 속성 강기를 맺고 막 공격하려 했다.
“잠깐.”
혜성은 놈을 노려본 채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막내와 한수호는 달려들려다가 멈칫했다.
“왜요?”
“일단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야. 모두 피할 때까지 싸움의 불똥이 다른 이들에게 튀지 않도록 보호해줘.”
혜성은 재차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대부분 얼이 빠져 있었다. 이대론 위험했다.
“하지만 형 혼자 놈을……”
“우리가 어디 소속인지 잊었어?”
혜성은 단호하게 외쳤다. 언제, 어디서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NSA 헌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젠장. 알았어요.”
막내는 혜성과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긴 한숨을 내쉬며. 한수호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아랫입술을 깨물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와 한수호, 반쯤 남은 경호원들은 괴한과 혜성의 주변을 둥글게 에워쌌다.
“눈물겨운……”
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비아냥거렸다.
‘게이트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지만, 놈보다 더 강하진 않을 거다.’
파팟, 혜성은 돌연 벼락같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놈에게 맞서기 위해선 2차 각성이 필수였다.
“흥. 맞고 시작하겠다는 건가? 받아주지.”
예상대로 놈은 오른손의 단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놈의 속성과 아이템이 공명한 것일까? 슬쩍 휘두른 것 같은데 회오리 같은 녹색 강기가 발사됐다.
퍼펑!
혜성은 강기를 얻어맞고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양팔로 가드를 올렸지만,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득해졌다. 나름 A급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놈의 일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콰쾅, 그는 성인보다 두꺼운 대리석 기둥을 연달아 두 개 관통하고 기둥에 처박혔다. 기둥이 무너지며 대리석 먼지가 그의 몸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렇지!”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환호했다. 일단 맞는 게 혜성의 오프닝. 그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안 죽은 거 안다. 일부러 죽지 않을 만큼만 쳤으니까.”
괴한은 혜성이 쓰러져 있는 더미로 한 걸음 옮기며 말했다.
“이 개새끼.”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혜성이 등장했다. 상스러운 욕과 성난 표정. 전투적으로 인격이 바뀐 2차 각성의 혜성이었다.
***
- 끄아아.
몬스터의 울음이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가운데, 혜성과 괴한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퍼펑, 혜성과 괴한의 신형이 로비 중앙에서 십여 차례 교차했다.
- 조심해라.
언제나처럼 혜성의 머릿속에서 대수영의 경고가 울렸다.
놈의 수법은 만병귀에 비해 단순했다. 만병쌍수를 이용한 에너지 계통 공격. 하지만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은 만병귀보다 훨씬 강했고, 바람의 능력자답게 보법도 신속했다.
막내와 한수호, 경호원들은 둘의 싸움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요인들이 대피하는 동안 자리를 지키며 충격파를 막아내는 게 고작.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퍼펑, 둘이 서로를 공격할 때마다 충격파 일부가 주위로 날아왔다.
“역시 이혜성. 상대가 강할수록 강해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이혜성에겐 3차 각성도 있잖아?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는걸?”
경호원들은 방어막을 펼치는 와중에도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단 두 명만 제외하고.
‘놈은 바람 속성의 공격만 하고 있다.’
‘진짜는 놈이 물의 속성을 꺼낸 다음부터.’
놈에 대해 알고 있는 막내와 한수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거 알아? 물은 약하고 부드럽지만, 때론 강철이나 바위를 뚫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는 거.”
교차하는 흐릿한 그림자 속에서 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혜성이 놀라 외친 순간, 놈의 등 뒤에서 물방울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젠장.”
혜성은 암흑의 수호자로 목과 심장, 머리 등 즉사 부위를 이중으로 보호했다. 동시에 언젠가 한수호가 했던 것처럼 주위에 물의 방어막을 펼쳤다.
물과 물의 충돌.
하지만 아이템에만 의지한 혜성과 달리, 놈은 속성과 아이템을 둘 다 활용하고 있다. 놈의 공격이 한 수 위.
혜성이 만든 물의 방어막은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그의 어깨, 팔, 배 등 수호자의 사각지대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젠장.”
이를 악물고 물러서는 혜성. 언뜻 봐도 출혈이 컸다.
“이 새끼가!”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동시에 좌우에서 달려들며 원거리 공격을 날렸다.
“어딜 끼어들려고?”
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단검을 슬쩍 흔들었다.
콰쾅, 거대한 물기둥으로 막내의 화염을 막고, 동시에 바람의 장벽으로 한수호의 물을 위로 튕겨냈다.
혜성은 오른쪽을 힐끔 쳐다봤다. 게이트의 색이 더 짙어졌다. 최대한 빨리 놈을 제압하고 게이트를 막아야 했다.
‘3차 각성이다.’
혜성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누적 데미지가 좀 부족한 것 같았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놈의 신경이 막내와 한수호에게 분산된 순간, 그는 잔상을 만들며 놈의 품을 파고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그가 막 놈의 배에 손바닥을 붙이기 직전.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놈의 비웃음이 환청처럼 들렸다.
괴한은 혜성을 피해 옆으로 슬쩍 움직이며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물과 바람의 동시 공격. 두 기운이 하나로 어우러져 대포처럼 혜성을 덮쳤다.
“안 돼!”
누군가의 절규와 함께 혜성은 벽에 처박혔다.
콰쾅, 대리석 파편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무너진 더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2차 각성의 상징인 황금빛 서기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혜성이 죽은……”
다른 누군가가 중얼거리다가 실언임을 깨닫고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농담이지? 형이 졌다고?”
“거짓말. 4차 각성이나 숨겨둔 필살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막내와 한수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구경하던 경호원들도 할 말을 잊고 멍하게 서 있었다.
“끝났다. 손에 확실한 느낌이 왔으니까.”
괴한은 무너진 벽을 바라보며 선언처럼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이혜성은 죽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이 새끼가!”
“죽여버리겠어!”
막내와 한수호는 눈이 뒤집혀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혜성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알게 된 순간, 이성의 끈이 끊긴 것 같았다.
콰앙, 거대한 불과 물의 기운이 좌우에서 놈을 덮쳤다.
“지금이야!”
경호원들도 놈이 서 있는 로비 중앙을 향해 일제히 원거리 공격을 발사했다.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된 건가?”
괴한은 피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콰콰쾅!
ICC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공격이 놈을 강타했다. 천장의 조명들, 근처의 유리창들이 충격에 휩쓸려 알갱이처럼 부서졌다.
“헉. 헉. 성공인가?”
일 분 후,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공격을 멈췄다. 다들 무리해서 에너지를 운용한 탓에 얼굴이 창백했다.
여러 속성이 동시에 충돌했다. 특히 막내의 화염과 한수호의 물은 부딪치면서 뿌연 수증기를 만들었다.
시야가 제한적인 상황. 잠시 후, 뿌연 연기가 가라앉으며 로비 중앙이 보였다.
“……!”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옷이 좀 더러워지긴 했지만, 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녹색과 푸른색의 보호막이 놈을 이중으로 감싸고 있었다.
“설마 내 스킬이 공격에만 특화됐다고 생각한 거냐?”
괴한은 옷을 털며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놈과 시선이 마주치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혜성은 저런 괴물과 싸운 거야?”
경호원 중 하나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레 같은 놈들.”
괴한은 수중의 단검을 교차시켰다. 수만 개의 물방울이 거친 돌풍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혼비백산.
“도망쳐!”
경호원들은 급히 몸을 돌렸지만 도망칠 틈도 없었다.
“으아악!”
“살려줘!”
비명이 길게 울리는 가운데, 순식간에 절반이 쓰러졌다. 요행히 살아남은 이들도 피투성이가 돼 비틀거렸다.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이들 중에는 막내와 한수호도 있었다.
“지금은 죽이지 않겠다. 너희는 훌륭한 자산이거든. NSA에 대해 알아볼 것도 많고 말이야.”
괴한은 둘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지금은’. 많은 의미가 담긴 단어였다.
“제길. 넌 누구냐?”
쾅, 막내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물었다.
놈을 향한 분노보다 자신을 향한 분노가 더 컸다. 혜성이 죽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선배님.”
한수호는 혜성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금이라도 혜성이 잔해를 헤치고 걸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잔해에서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나? 누군지 알 텐데?”
괴한은 키득거리며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깔끔하게 생긴 호남. 놈은 경호원들과 함께 도망쳤던 우민창이었다.
“우민창이 둘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막내와 한수호는 할 말을 잊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다른 경호원들도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놈을 다시 봤다. 틀림없는 우민창이었다.
“그럼 아까 여기 있었던 우민창은 누구야?”
누군가가 문득 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변장이나 성형으로 비슷하게 꾸민 정도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눈썰미가 좋은 능력자가 진즉 이상한 걸 눈치챘을 터. 놈은 우민창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설마…… 능력 이식?”
막내는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 사색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