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92화 (92/150)

# 092. 이혜성, 죽다 (3)

지하 주차장.

인사따윈 없었다. 가면을 쓴 괴한은 양손을 쭉 뻗었다.

콰쾅, 바람과 물, 녹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대포알 같은 강기가 쇄도했다.

“쳇!”

장진우는 왼쪽으로 순간이동 했다.

속임수였다. 놈의 공격은 돌연 오른쪽으로 크게 꺾였다. 진짜 타깃은 장진우의 다른 팀원이었다.

“뭐, 뭐야?”

다른 팀원은 공격을 준비하다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콰직,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타격음과 함께 그는 멀찌감치 나가떨어졌다.

“날파리는 빨리 정리하는 게 좋잖아?”

괴한은 자세를 낮추고 장진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바람처럼 신속한 움직임. 바람의 스킬을 이용한 듯 놈의 발이 옅은 녹색으로 빛났다. 놈은 단검을 교차시켜 장진우의 목을 베었다.

펑, 장진우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그리곤 놈의 뒤에 나타나 허리를 걷어차고 뒤로 빠졌다.

“이 새끼가!”

괴한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비틀며 단검을 휘둘렀지만, 장진우의 그림자만 스쳤다.

장진우는 순간이동 능력자였다. 이론상 그보다 빠른 능력자는 없었다. 전후좌우.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괴한의 주요 급소만 10여 대 타격하고 빠져나갔다.

“과연 팀장급의 전투력은 다르군.”

괴한은 비틀거리면서도 감탄했다.

장진우의 대단한 점은 순간이동만이 아니었다. 스킬 자체도 위협적이었지만, 숙련도가 달랐다.

예를 들어, 막내는 스킬과 스킬 사이에 딜레이가 있었다. 물론 장진우도 그런 딜레이가 있지만, 그는 순간이동 사이에 공격을 섞어 딜레이를 최소화했다.

“흥!”

장진우가 놈의 턱을 걷어차고 멀리 오른쪽으로 물러나려는 찰나였다.

쾅, 순간적으로 사라졌던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보이지 않는 벽과 충돌한 것 같았다.

괴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쇄액, 파공음과 함께 녹색 강기가 장진우의 어깨를 향해 수평으로 날아왔다.

“젠장!”

장진우는 몸을 굴려 겨우 피했다. 다시 순간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 보이지 않는 공간 안에 갇힌 것 같았다.

괴한은 잠깐 공격을 멈추고 장진우를 내려다봤다.

“당신의 스킬은 유명하잖아? 그래서 준비 좀 했지. 당신이 주차장에 온 걸 우연이라고 생각해?”

놈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오른손을 슬쩍 휘두르며 피식 웃었다.

언제부턴가 둘의 주위에 녹색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괴한의 에너지가 섞인 돌풍. 바람에 에너지를 섞어 공간을 일그러뜨린 것이다.

‘젠장. 주차장으로 날 유인한 거였나?’

그제야 장진우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차장의 셔터만 늦게 내려간 건 실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함정. 놈은 주차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장진우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바람으로 막을 펼쳤고, 싸우는 동안 그 막을 서서히 좁혔다. 마치 그물을 끌어 올려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넌 누구냐?”

장진우가 놈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 글쎄. 누굴까?”

놈은 싸늘하게 비웃으며 다시 단검을 들었다. 단검에 서린 녹색과 파란색의 아지랑이가 더 짙어졌다.

파팟, 놈이 다시 장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곳이 없다.’

장진우는 머뭇거리다가 놈의 품을 파고들었다. 놈의 단검이 뱀처럼 꿈틀거렸다고 느낀 찰나, 그는 오른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크윽!”

그는 신음을 삼키며 오른손을 뻗었다.

마침 괴한도 그를 향해 마주 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괴한은 그의 복부에 칼을 박아 넣었다. 파앗, 피가 솟구쳐 오르는 상황에서 장진우는 오른손으로 놈의 가면을 잡아 벗겼다.

“넌?”

장진우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왜? 놀랐어?”

괴한은 단검을 뽑았다가 다시금 그의 배를 찔렀다. 확실한 마무리.

“젠장. 그랬나?”

그제야 장진우는 깨달았다. 자신과 혜성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 우민창이 그들의 눈을 벗어난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이대로라면 이혜성도 위험하다. 빨리 혜성에게 알려야……’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장진우는 의식이 아득해졌다.

***

1층 로비.

“젠장. 날씨가 완전히 미쳤네. 이게 무슨 난리래?”

경비는 투덜거리며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저녁 6시를 갓 넘겼지만, 밖은 한밤처럼 컴컴했다. ICC 일대를 뒤덮은 시커먼 비구름 때문이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뿌리째 뽑혀서 날아다니는 나무들, 그리고 겁을 먹은 것처럼 들썩이는 건물 외벽과 유리창들까지.

제주에서 10년 넘게 살았어도 이런 비바람은 처음이었다.

“이거 내일까지는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겠는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1층을 한 바퀴 둘러봤다. 혹시라도 유리가 깨져 비가 들어오면 낭패였다.

로비는 귀신이 나올 듯 을씨년스러웠다. 넓은 홀에는 그의 발걸음 소리만 낮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가 로비의 우측 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라?”

그는 놀란 표정으로 우뚝 걸음을 멈췄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그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홀 중앙.

보라색 웜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직 초기인 듯 안에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하는 괴상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왔다.

“게, 게이트다!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뛰어갔다.

***

ICC 탐라홀.

스태프들이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나눠줬다. 김밥과 조각 케이크 약간. 급조한 것치곤 제법 괜찮았지만, 다들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게. 우리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다들 볼멘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왜 세미나를 제주도에서 개최한 겁니까?”

“맞아요. 그냥 코엑스에서 하면 좋지 않습니까?”

일부는 세미나장 중앙으로 가서 주최 측과 우민창에게 항의했다. 물론 주최 측이라고 이런 사태를 예측한 건 아니었다. 불만의 화살은 기상청을 거쳐 애꿎은 슈퍼컴퓨터로 향했다.

“장 팀장님은 괜찮을까요? 벌써 3시간 넘게 연락이 끊겼잖아요.”

막내가 혜성에게 캔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맞습니다. 저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혜성의 옆에 앉은 한수호도 초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팀장님 실력 알잖아? 뭔가 사정이 있겠지.”

혜성은 캔 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겉으로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 장진우를 제일 걱정하는 건 그였다.

장진우의 실력은 믿지만, 여긴 적의 홈그라운드였다.

‘너무 성급하게 들이댄 건가?’

조금 후회가 됐다. 한수호의 말대로 신분증을 위조해서 세미나에 몰래 잠입하는 편이 나았을지 몰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일단 계획을 믿어볼 수밖에.’

그는 LK 관계자들, 정확히는 우민창을 힐끔거렸다. 우민창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였다.

“게이트, 게이트가 나타났다!”

아래층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렸다.

“게이트? 게이트가 건물 안에 왜 생겨?”

“그러게. 지금 장난하는 건가?”

처음엔 다들 피식 웃어넘겼다. 그러나 다른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며 내려갔고, 이어서 그들의 목소리도 비명에 합류했다.

“어? 정말인가?”

그제야 다른 이들도 계단을 통해 로비로 우르르 내려갔다.

“게이트?”

혜성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권 이탈. 긴급 재난문자는 오지 않았다.

“혹시 블랙의 짓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게이트 오프너는 놈들이 즐겨 쓰는 수법 아닙니까?”

막내와 한수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혜성은 막내, 한수호와 시선을 교환한 뒤 다른 이들을 따라갔다. 김유진과 기자들도 특종에 눈을 빛내며 뒤따랐다.

스태프의 말대로였다. 로비 중앙에서 게이트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변종 게이트였다.

- 끼아아악!

게이트 너머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높고 길게 울렸다.

게이트의 등급은 B급과 A급 사이 정도. 열리는 속도로 봤을 때 앞으로 약 10분 후면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으아악! 사람 살려!”

“씨발, 이게 뭐야?”

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이들, 우왕좌왕하다가 경호원들의 뒤에 숨는 이들, 혹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경호원들에게 대응 방법을 문의하는 이들. 반응도 참 다양했다. 약삭빠른 이들은 경호원에게 이곳을 지키라고 명령한 뒤 세미나장으로 내뺐다.

“우민창은?”

혜성도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우민창은 우측으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흥분한 협회 관계자들을 달래며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혜성과 우민창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새끼! 미쳤어?”

혜성은 사람들을 헤치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십여 명이 놈을 에워싸며 막았다. 막내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제법 몸값이 비싼 능력자들이었다.

“게이트 오프너! 당장 내놓지 못해?”

“폐쇄된 공간에서 게이트라니.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막내와 한수호도 눈에 불을 켜고 사납게 소리쳤다.

“뭐야? 갑자기 이혜성이 왜 저래?”

“게이트 오프너는 또 뭐야?”

다른 이들이 눈을 끔뻑이며 수군거리는 가운데, 그들과 경호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막내는 생각 같아선 화염으로 경호원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게이트 오프너가 뭡니까?”

우민창은 짐짓 겁먹은 것처럼 경호원들 뒤로 숨었다.

“이 새끼. 끝까지 시치미냐? 말로 해선 안 되……”

결국 참다못한 막내가 손에 화염을 맺고 외치려는 찰나였다.

퍼퍼펑!

게이트 반대편에서 녹색 빛이 번쩍였다. 닿는 것은 뭐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칼바람이었다.

“으아악!”

중간에 있던 사람 십여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영문도 모른 채.

“또 뭐야?”

혜성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쓰러진 사람들 너머, 하얀 가면을 쓴 괴한이 보였다.

“만병쌍수?”

그는 괴한의 손에 들린 단검을 주목했다. 각각 녹색과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경호원 세 명이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혜성이 급히 외쳤지만, 한발 늦었다.

“흥!”

괴한이 단검을 슬쩍 휘두르자 이번엔 물의 강기가 쏘아졌다.

콰쾅, 경호원들은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은 채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게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일기예보에도 없는 폭풍에, 뜬금없는 변종 게이트, 거기에 괴상한 능력자까지.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서로 먼저 도망가겠다며 밀치는 통에 몇 명이 넘어져 비명을 질렀다.

혜성은 우민창을 한 번 노려본 뒤, 아랫입술을 깨물고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은 주춤거리며 벽 쪽에 붙었다. 혜성은 게이트를 사이에 두고 놈과 마주 섰다.

“이거 찾아?”

괴한이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물었다. 작은 보라색 구슬. 혜성이 그토록 찾던 게이트 오프너였다.

‘놈이 왜 게이트 오프너를 가진 거지? 그럼 우민창은?’

혜성은 눈을 크게 뜨고 우민창과 괴한을 번갈아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