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1. 이혜성, 죽다 (2)
ICC 앞 해안 길.
장진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십 킬로미터 전방. 허리케인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주위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며. 마치 거대한 회색 뿔이 하늘을 향해 삐죽 솟은 것 같았다.
“저건 미국이나 남미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허리케인이 뜬금없이 제주도에 왜 나타난 거죠?”
다른 팀원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즈의 마법사였던가? 집을 통째로 날려버렸던 옛날 영화가 생각났다.
“그렇지. 분명 이론적으론 말이 안 되지.”
장진우는 뇌전의 광견을 떠올렸다.
마포대교에서 혜성과 싸울 때, 놈은 몬스터로 힘을 강화한 덕분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 배후인물의 속성은 바람과 물.
‘혹시 놈이 인위적으로 만든 건가?’
장진우는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고 해도 그렇지, 허리케인을 만들다니. 너무 터무니없는 추측 같았다.
“빨리 혜성 씨에게 연락해야 해.”
그는 초조하게 핸드폰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태. 하지만 스피커에서는 통화 대기음만 이어졌다.
“젠장. 무슨 일이야?”
장진우는 거칠게 통화 종료를 누르고 ICC 쪽으로 내달렸다.
“괜찮겠습니까?”
“저흰 초대장이 없지 않습니까?”
다른 팀원들이 뒤따르며 불안한 목소리로 동시에 물었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정 안 되면 힘으로라도 뚫고 들어가야지.”
펑, 장진우는 순간이동하듯 십여 미터씩 이동했다.
***
ICC 탐라홀 세미나장.
“우리의 영웅! 이혜성 씨를 모시겠습니다.”
우민창은 과장된 동작으로 혜성을 소개했다.
혜성은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무대로 올라갔다. 부웅,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지만,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보조 스태프가 잽싸게 다가와 혜성의 재킷에 소형 마이크를 달아줬다.
‘차라리 잘됐다.’
혜성은 연단에 오르며 우민창을 쳐다봤다. 우민창이 정말 이번 사건의 배후인지 확인해볼 기회였다.
“대한민국 대표 영웅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LK 로직스의 우민창입니다.”
우민창은 그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이혜성입니다.”
혜성도 웃으며 상대의 오른손을 맞잡았다.
사진사가 둘의 주위를 맴돌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플래시를 번쩍인 순간, 혜성은 오른손에 에너지를 주입했다. 상대가 정말 만병쌍수를 손에 넣은 강자라면 자연스럽게 반탄강기가 나올 터였다.
“악!”
우민창은 인상을 찡그리며 비명을 길게 질렀다. 어설픈 연기가 아니었다. 얼굴이 빨개진 가운데, 식은땀까지 흘리는 진짜 일반인의 반응이었다.
“사장님!”
뒤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달려오려고 했다.
“악력이 강하시군요. 제가 허우대는 멀쩡한데, 알고 보면 순 약골입니다.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거든요.”
우민창은 혜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상대를 시험하려던 혜성이 오히려 당황해 사과했다.
‘일반인보다 약한데? 그럼 만병쌍수를 가진 건 누구지?’
혜성이 우민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능력자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엔 혜성의 악력 때문에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었다. 관객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혜성은 일단 인사라도 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그때였다. 부웅,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번엔 혜성만이 아니라 세미나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핸드폰이 일제히 진동했다.
“뭐야?”
그제야 혜성은 스마트 워치로 알람을 확인했다.
긴급 재난문자였다. 비바람을 동반한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일기예보에 그런 건 없었는데?”
다들 문자를 확인하며 당황했다.
세미나장에서는 외부가 안 보였다. 사회자가 잠시 세미나 중지를 선언하자, 다들 오션 뷰의 테라스 쪽으로 몰려갔다.
“으아! 저게 뭐야?”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다.
멀리서 잿빛 돌개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ICC는 전면이 유리인 구조. 물론 특수 유리이긴 했지만, 저런 강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차를 타고 도망치는 것도 위험해 보였다. 정확한 속도는 모르겠지만, 저런 강풍이면 차도 날아갈 것 같았다.
혜성도 다른 이들의 틈에 섞여 테라스로 갔다.
“느낌이 안 좋은데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맞습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막내와 한수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장 팀장님은…… 어라?”
혜성은 뒤늦게 부재중 전화를 떠올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권 이탈. 다른 이들의 핸드폰도 비슷했다. 요즘 세상에 비바람 때문에 통신망이 끊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외부에서 방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하여……
천장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일단 세미나장으로 대피해서 기상청의 다음 지시를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기상이변인가?”
“글쎄. 기상이변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지 않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세미나장으로 돌아갔다.
탐라홀은 회의 규모에 따라 차단막으로 섹터를 나누는 구조였다. 현재 회의는 A 섹터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 차단막을 전부 올리고 B, C 섹터까지 개방하자, 세미나장은 최대 4,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대피소로 변했다.
천장에서 대형 모니터가 내려와 긴급 뉴스를 전했다.
- …… 기상이변으로 보이는 폭우가 제주시 ICC 방향으로…… 이번 폭우는 밤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시민 여러분은 외출을 삼가고 가까운 대피소에서……
전파 방해라도 있는지 중간에 화면이 끊기고 지지직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신호가 완전히 끊겨 먹통이 됐다.
폭우. 폐쇄된 공간. 그리고 고립된 물류업계의 주요 인사들.
‘제주도는 단순히 전투에 유리하기 때문에 고른 게 아니었나? LK 로직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냐?’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측을 힐끔 돌아봤다.
우민창은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협회 쪽 관계자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우민창도 그를 돌아봤다. 워낙 짧은 순간이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우민창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ICC 정문.
“젠장.”
장진우는 정문을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언제나 신사 같은 이미지.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63 스퀘어의 사건 때문인지 건물마다 보안이 대폭 강화돼 있었다. ICC의 정문도 특수 설계된 이중 셔터로 막혀 있었다. 제아무리 공간의 마법사라도 결계를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지하 주차장!”
요원 하나가 지하를 떠올렸다.
“가자!”
장진우는 정문을 노려보다가 급히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물론 지하라고 뚫려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 힘으로라도 문을 부수고 진입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지하는 아직 막히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셔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슬라이딩을 하듯 셔터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슬아슬한 세이프.
“휴. 겨우 맞췄군.”
장진우는 옷을 툭툭 털며 주위를 둘러봤다.
주차장에는 회의 참석자들이 타고 온 차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대당 억대를 호가하는 최고급 세단, 일명 회장님 차였다.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선가 비웃음이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뭐?”
장진우는 오른쪽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의 기습. 쇄애액, 뭔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옆으로 젖혔다.
“으악!”
옆에서 비명이 길게 들렸다. 그의 팀원이 얼떨결에 대신 맞은 것이다.
“오. 그걸 피했어?”
우측 그늘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세미 정장을 입은 사내. 귀신을 연상시키는 하얀 가면을 쓴 탓에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양손에는 단검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저놈인가?”
장진우는 사내의 손을 노려보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놈의 단검은 각각 녹색과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혜성은 자리에 돌아와 세미나 일정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 밤에 호화 만찬이 준비돼 있었다. 물과 식량은 사나흘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풍족했다. ICC 내부의 휴게시설이나 편의시설도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는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한 공포, 격리됐다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장 팀장님은?”
혜성은 막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녀석은 아까부터 장진우에게 연락하기 위해 계속 핸드폰만 만지고 있었다.
“안 돼요. 일반 통신망은 물론이고 기관의 특수 통신망까지 전부 끊겼어요.”
막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낌이 안 좋아.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혜성은 백팩에서 태블릿과 펜을 꺼냈다. 우선 우민창의 건강 기록을 확인했다.
우민창은 한때 전도유망한 각성자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 원인불명의 큰 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복부에 큰 수술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태호보다 더 심각했다. 태호는 단전의 형태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지만, 우민창은 아예 단전 자체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혜성은 펜을 꺼내 태블릿의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문득 퍼즐 맞추기가 떠올랐다. 한창 조각을 맞추고 있는데, 중요한 몇 개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는 펜을 들어 빠진 조각들을 정리해 봤다.
- 의문 1. 왜 KIFFA의 세미나를 택했을까?
제주도를 택한 건 이해했다. 물과 바람이 많은 곳이니까. 문제는 세미나를 고른 이유였다. 혜성이나 NSA가 목적이었다면 굳이 세미나가 아니라도 제주도 어느 지역에서든 싸울 수 있었다.
- 의문 2. 만병쌍수는 누가 가졌나?
조금 전의 악수로 확실해졌다. 우민창은 만병쌍수를 노린 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물과 바람의 능력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 의문3. LK 로직스가 인제 와서 표면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LK 로직스는 지금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사실 유수혁의 단서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LK 로직스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의문이 많았지만, 일단 큰 것은 대충 이 정도였다.
‘역시 이런 타입은 질색이야.’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뇌전의 광견처럼 단순하고 직선적인 적이 편했다.
그때였다. 재킷에서 기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뭐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킷에서 뭔가를 꺼냈다. 가죽 장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각각 녹색과 파란색으로.
“물과 바람?”
혜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가 만병쌍수를 사용하고 있어, 카피캣도 이에 감응한다는 표시였다.
“왜요?”
막내와 한수호, 다른 이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다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민창과 협회 임원들이 보였다.
‘우민창이 아니라면? 적은 대체 누구지? 그리고 누구에게 만병쌍수를 사용하는 거야?’
혜성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도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