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 이혜성, 죽다 (1)
SJ 기획, 소회의실.
“LK는 어때?”
박무영이 보고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보고서는 카피캣의 감응 능력과 듀얼 속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사용자인 혜성이 듀얼 카피를 할 수 없다는 것. 두꺼비나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과 비슷했다.
“이혜성과 NSA가 쫓고 있습니다. 조금 전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수은은 사진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혜성과 일행이 제주공항을 빠져나오는 장면이었다. 멀리서 몰래 찍은 듯했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LK도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군. 하긴, 만병쌍수를 손에 넣었으니 당장 이혜성과 한 판 겨뤄보고 싶겠지.”
박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능력자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우민창도 블랙의 주요 간부이기 전에 한 사람의 능력자. 만병쌍수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진영도 괜히 국장이 된 건 아니야. 최근 NSA의 이미지가 실추된 탓에 이를 갈고 있을 테지.”
박무영은 현장에서 뛰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한진영은 팀장이었다. 지금이야 나이를 먹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현역 때 한진영의 별명은 불도그였다. 일단 한번 발동이 걸리면 몬스터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본다는 뜻이었다.
“우린 어떻게 할까요? 유수혁이 남긴 자료는 극히 일부입니다. 그것만으로 우민창의 꼬리를 잡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우민창은 영리한 놈이다. 하지만 이혜성과 NSA를 동시에 상대하다 보면, 놈도 꼬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가 노릴 건 그 빈틈. 그때까지는 이혜성의 근처에서 대기한다.”
“알겠습니다.”
한수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테러나 조직의 운영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 LK를 잡아 단숨에 블랙의 목을 조인다.”
박무영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새삼 전의를 불태웠다.
***
다음 날 오후 2시.
혜성과 일행들은 렌터카를 두 대 빌려 타고 세미나가 열리는 ICC로 직행했다. 혜성과 막내, 한수호가 한 차, 장진우와 그의 팀원 두 명이 다른 차에 탑승했다.
ICC는 바다 옆에 세워진 대형 컨벤션센터였다. 유리가 돋보이는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이야, 임무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NSA는 휴가도 없습니까?”
막내와 한수호는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특히 한수호는 제주도가 처음인 탓에 모든 게 신기했다.
“이번 일만 끝내면 며칠 쉬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운전석의 혜성도 잠시 긴장을 풀고 웃었다.
잠시 후, 그들은 컨벤션센터 입구에 들어갔다. 최근 연이은 테러 때문인지 보안이 까다로웠다. 사설 경호업체와 길드가 센터와 주요 길목을 이중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두 번이나 차량 수색을 거친 다음에야 겨우 주차장에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센터 입구로 이어지는 길목에도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있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경호원 하나가 손을 들어 혜성을 제지했다.
혜성은 전 국민이 아는 유명인사였다. 얼굴이 곧 신분증이었지만, 상대는 그를 모른 척했다.
“NSA에서 왔습니다.”
장진우가 대표로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행사는 KIFFA의 주관하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호원은 정중하지만 사무적인 어투로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대장이나 협조 공문, 아니면 수색 영장이라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건……”
막내가 나서서 화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이쪽의 소란을 들었는지 어느새 경호원도 십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어쩌죠?”
혜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장진우를 쳐다봤다. 강제로 진입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나중에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직접 본부와 통화해 보지.”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때였다.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뒤에서 누군가가 혜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는 척했다. 뒤를 돌아보니 김유진을 비롯한 A 신문사의 기자 세 명이 보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요? 컨퍼런스 취재하러 왔죠.”
그녀는 혜성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혜성의 사건을 전담하는 취재팀의 팀장이었다. 혜성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게 분명했다. 근처에서 혜성의 일행과 경호원들의 실랑이를 본 것 같았다.
“이거면 될까요?”
김유진은 백팩에서 기자용 출입증을 꺼내 내밀었다. 신문사 명의로 발행된 진짜 출입증이었다.
“환영합니다.”
경호원은 출입증을 돌려주며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그럼 이분들도 들어갈 수 있겠죠? NSA 소속이 아니라 제 경호원 자격으로 말이에요.”
김유진은 출입증 하단에 명시된 특이 사항을 언급했다.
언제 사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어수선한 때였다. 각자 한 명씩 경호원을 대동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다.
“그건……”
“왜 안 된다는 거죠? NSA 요원은 경호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없는데요?”
그녀는 경호원을 쏘아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여차하면 서울로 전화해 지금 상황을 기사화할 태세였다. 국민 영웅 혜성이 일개 경호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고 사방에서 주최 측에 비난이 쏟아질 게 뻔했다.
“알겠습니다. 단, 출입증이 세 장이니 경호원도 세 명까지만 허용됩니다.”
경호원은 혜성을 한 차례 노려본 뒤 옆으로 한발 물러섰다.
“어떻게 할까요?”
혜성은 빙그레 웃으며 장진우를 바라봤다.
“차라리 잘됐군. 대책도 없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우린 ICC 주위를 살피지. 내부는 혜성 씨가 맡아.”
장진우는 혜성의 어깨를 툭툭 친 뒤 나직이 속삭였다.
“혜성 씨 혼자서 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일 거야.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일대일 대전이 아니라 전투잖아?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날 불러. 나도 여차하면 혜성 씨에게 신호를 보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혜성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ICC 앞 해안 길.
장진우는 팀원들과 함께 일대를 천천히 둘러봤다. 혜성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게 조금 못마땅한 것 같았다.
“평범한 세미나치곤 보안이 너무 철저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초대장이 어쩌고 저째? 이 새끼들, 뭔가 냄새가 납니다.”
다른 두 팀원도 인상을 찌푸리고 차례대로 말했다.
“할 수 없지. 대한민국 공권력이 개판인 건 유명하잖아?”
장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찰보다 흉악범의 인권이 더 우선인 아이러니. 정부 요원들 사이의 한탄은 마냥 농담이 아니었다.
“역시 본부에 연락해서 협조 공문을 받는……”
다시 팀원 하나가 투덜거리는 도중이었다.
“어라?”
그는 정면의 뭔가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저게 뭐야?”
장진우도 경악하며 바지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ICC 대회의실 탐라홀.
공식 시작은 3시부터였지만, 주요 참석자들은 대부분 일찍 도착한 상태였다. 참석자마다 비서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요 언론사의 기자도 수백 명이었다. 최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식 회의실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와, 유명한 사람들이 많네요.”
막내와 한수호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문에서 가끔 보던 재계의 유명인사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혜성도 유명인사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최근 언론의 노출 빈도는 혜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 저거 이혜성 아니야?”
“그러게? 여기까지 왜 온 거지?”
그들도 혜성을 힐끔거리며 웅성거렸다. 몇몇은 괜히 친한 척하며 같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혜성은 멋쩍게 인사하고 일행들과 구석에 앉았다. 김유진이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소책자를 한 부씩 건넸다.
“게이트 시대와 물류 산업의 미래라.”
혜성은 소리 내어 읽으며 회의 자료를 천천히 넘겼다.
게이트 시대 이후, 모든 게 변했지만 가장 크게 변한 건 역시 경제였다. 특히 공해에서도 툭하면 생성되는 게이트는 한, 중, 일처럼 수출 위주의 국가에서 특히 골칫거리였다. 이번 세미나는 이에 대한 대책 및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자리였다.
“골치 아프군요. 어려운 용어가 너무 많습니다.”
혜성은 몇 장을 읽다가 책자를 덮었다. 막내와 한수호는 아예 표지만 보고 읽지도 않았다.
“그럴 거예요. 일반인들을 위한 세미나가 아니니까.”
옆에 앉은 김유진이 웃으며 설명해줬다. 역시 엘리트 기자 출신다웠다.
잠시 후 3시 정각, 조명이 어두워졌다. 혜성이 뒤를 슬쩍 돌아보니 자리의 2/3가 차 있었다.
- 202X년도 한국국제물류협회……
사회자의 소개 아래 세미나가 시작됐다. 먼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협회장이 연단에 올라 인사했다. 어차피 뻔한 말. 혜성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잠시 후, 박수와 함께 협회장이 인사를 마치고 연단을 내려갔다.
혜성이 기다렸던 메인 무대, 우민창이 기조연설을 위해 사회자의 소개를 받으며 연단에 올랐다.
‘저놈이 LK의 대표인가?’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연단을 주목했다.
우민창은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과 비슷했다. 와인을 즐길 것 같은 도시 남자 이미지. 현대판 백마 탄 왕자님이라는 소문대로였다.
LK의 대표이사. 혜성의 추측대로 LK가 블랙의 자금줄이라면, 대표이사인 우민창도 블랙의 고위인사일 것이다.
“인상은 멋있는데, 비밀이 많은 사람이에요. 언론 노출을 꺼리거든요. 이번 기조연설을 승낙했을 때도 놀란 사람이 많았어요.”
김유진이 무대를 응시한 채 혜성에게 귓속말했다.
우민창은 여유롭게 웃으며 참석자들을 한번 훑어봤다. 농담을 곁들인 여유로운 인사를 하면서. 그런데 잠시 후, 그는 준비한 연설문을 읽지 않고 대신 다른 곳을 주목했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그는 혜성이 있는 자리를 향해 슬쩍 손짓했다. 천장의 스포트라이트가 혜성에게 집중됐다.
혜성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회장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큰 박수가 터졌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한민국의 대표 히어로. 이혜성 씨를 무대로 모시고 한 말씀을 듣겠습니다.”
우민창은 혜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혜성과는 사전에 전혀 얘기되지 않았다. 둘은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뭐?”
혜성은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사방에서 다시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일부는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혜성의 이름을 연호했다.
모두가 자신만 주목하고 있는 상황. 인제 와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시작하기도 전에 한 방 먹었군.”
혜성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