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9. 제주도의 밤 (2)
제주시 H 호텔 객실.
장진우가 짐을 풀고 막 운동복으로 갈아입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옆방을 배정받은 혜성이었다.
“무슨 일이야? 회의는 30분 후잖아.”
“일할 땐 일하고, 쉴 땐 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혜성은 문가에 기대서서 캔 맥주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듯 이슬이 맺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팀장님과는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런가?”
장진우는 웃으면서 혜성을 난간으로 안내했다. 아치형 지붕 아래 흔들의자 두 개가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우중충했는데, 지금은 별도 보이고 맑은 하늘이었다.
“제주도 날씨는 누구처럼 변덕스럽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혜성은 자리에 앉으며 캔 맥주를 장진우에게 건넸다.
“그냥 맥주나 마시려고 온 것 같진 않고.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장진우가 캔 맥주를 따며 물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아까 비행기에서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뭐? 자네와 은밀히 손잡았다는 조직? 그건 걱정하지 마. 국장한테 이르지 않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국장도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 밤안개의 죽음 말입니다.”
“역시…… 그거였나?”
장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혜성이 밤안개에 대해 물어보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예상보다 빠르고 직선적이어서 다소 의외였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난 밤안개와 직접 임무를 수행해본 적이 없어. 혜성 씨도 알겠지만, 밤안개는 역대 최연소 팀장이었잖아. 나는 재능만 좀 있는 신참이었고. 나이는 비슷해도 소위 말해 노는 물이 달랐지.”
장진우는 먼 산을 응시하며 쓰게 웃었다.
“밤안개는 어떻게 죽은 겁니까?”
혜성은 장진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장진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지금 블랙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이 있었네. 그 조직원 중 한 명인, 중국의 능력자가 SS급 몬스터를 소환했어. 지금이야 게이트 오프너도 있고 각종 기술이 발달했지만, 당시에는 정말 미친 짓이었지. 하긴, SS급이면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만.”
“팀장님은요?”
“그때 난 밤안개를 서포트하는 역할로 멀리서 대기 중이었지. 그들의 전투는 내가 낄 레벨이 아니었거든.”
“그게 밤안개의 마지막 임무였습니까?”
혜성은 오래전에 스쳐 가듯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한국과 중국의 국제적 문제로 번졌던 큰 싸움이었다.
“맞아. 밤안개는 중국의 능력자와 몬스터를 상대로 우세를 점했지만, 최후의 순간 놈들의 자폭에 휘말려 같이 죽었지. 공식적으로는.”
장진우는 공식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듣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럼 비공식적인 건 뭡니까?”
혜성의 의문이 더 커졌다.
“글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난 혜성 씨를 처음 봤을 때 그 밤안개를 떠올렸네. 마치 일부러 죽으려는 듯한 저돌적인 움직임. 그때 밤안개의 행동이 딱 그랬거든.”
“일부러 죽으려 했다고요?”
“그래. 물론 확실한 건 아니네. 세상에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살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이지.”
“하긴, 그렇죠.”
혜성은 맥주를 마시며 말을 얼버무렸다. 내심 뜨끔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어.”
장진우는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혜성을 바라봤다.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혜성도 덩달아 긴장해서 장진우를 쳐다봤다.
“워낙 어두운 탓에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그때 밤안개가 흘린 피는 붉은색이 아니었네.”
“네?”
“그때 밤안개가 흘렸던 피는…… SS급 몬스터와 같은 보라색이었네.”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물론 말이 안 되지. 지금은 지하 마켓의 놈들도 인간과 몬스터를 융합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기술이 없었으니까.”
“그가 죽은 후 현장검증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지. 하지만 자폭 때문에 큰 폭발이 있었거든. 내가 갔을 때는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한 뒤. 제아무리 밤안개라도 살아남는 건 무리였지. 아니, 무리인 것처럼 보였지.”
“몬스터의 피라.”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박무영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블랙과 지하 마켓의 능력자들을 상대하며 익숙해진 감각. 몬스터 특유의 이질적인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꼰대의 노파심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하지. 혜성 씨는 너무 정이 많은 것 같아. 그게 장점이지만, 때론 단점이 될 수도 있거든.”
다시 장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은 생각을 잠시 미루고 그를 쳐다봤다.
“사람을 믿지 마. 이 바닥에 오래 있다 보니 배운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거야. 나를 포함해서 말이지. 제일 믿었던 친구가 언제 뒤통수를 쳐도 이상하지 않은 게 이 바닥 생리니까.”
장진우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아픈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혜성이 말하려는 찰나였다.
난간의 문이 덜컥 열렸다. 막내였다.
“형. 여기서 뭐 해요? 핸드폰도 놓고 가서 한참 찾았잖아요.”
“내일 작전 회의 안 하십니까? 다들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수호도 뒤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덧붙였다.
혜성과 장진우가 몰래 무슨 얘기를 했을까? 둘은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아.”
그제야 혜성은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봤다. 10시 정각. 별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어느새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맥주 잘 마셨네. 다음에는 근사한 곳에서 내가 한잔 사지.”
장진우는 빈 캔을 우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혜성도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진우에게 하지 못한 마지막 말. 그게 자꾸 그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
혜성의 객실 중앙.
다른 팀원들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건 혜성의 팀 셋, 그리고 장진우의 팀 셋이었다. 두꺼비와 회색 여우의 다른 팀원들은 오피스텔에 남아 대기했다.
직사각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혜성과 막내, 한수호가 왼쪽에 앉고, 나머지는 오른쪽에 앉았다.
“이번 적은 만만치 않아. 듀얼 각성자. 솔직히 나나 혜성 씨라도 놈과 일대일로 맞서면 이길 자신이 없어.”
장진우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전투를 하러 온 것이었다. 놈을 끌어내서 혜성과 장진우, 막내, 한수호 등 모두가 협공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내일 세미나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인데요. 놈들은 세미나장에 함정이나 매복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혜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민간인 신분으로 위장하지 않습니까? 변장도 하고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한수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건 어려울 거야. 우리가 제주행 비행기를 탄 건 이미 놈들에게 알려졌을 테니까.”
장진우는 대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꺼냈던 한수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럼 드론으로 감시하는 건요? 제게 맡겨주시면 ICC에 설치된 CCTV도 전부 해킹해 보이겠습니다.”
“요즘 테러 때문에 보안이 대폭 강화됐잖아. 경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요즘 국가기관의 민간 사찰이다, 뭐다, 말이 많은 거 알지? 잘못했다간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막내가 나섰지만, 이번엔 혜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테러 제보를 핑계로 경찰과 같이 들어가는 게 어떠냐? 아니면 ICC의 직원으로 위장하는 건 어떠냐? 그 외에도 이것저것 의견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문제점이 한두 개씩 나왔다.
“남은 건 정면돌파뿐인가? 혜성 씨 생각은 어때?”
장진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생각에도 정면돌파가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아직 LK 로직스와 블랙이 관련이 있다는 건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놈은 영리하고 조심스러운 자입니다. 어설픈 작전은 역효과만 날 겁니다.”
혜성은 놈들이 닥터 J를 빼돌린 것을 떠올렸다.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같은 상황을 다시 겪는다고 해도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결국 그들은 다 같이 세미나에 들어가는 것으로 작전을 짰다. 다만 놈들이 어떤 함정을 준비했을지 모르는 상황.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꼭 뭉쳐 다니기로 했다.
“이번 세미나는 놈들 외에도 재계의 거물들도 다수 참석할 거야. 사람이 많은 곳으로만 다니면, 놈들도 보는 눈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야.”
장진우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며 회의를 끝냈다.
***
각자의 방에 돌아간 뒤, 혜성은 다시 장진우를 찾아갔다. 캔 맥주를 들고 왔을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그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오늘 나를 많이 찾아오는군. 또 뭔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진우가 문을 열자, 혜성은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그를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까 못 드린 말이 있어서요. 이대로라면 계속 놈에게 끌려다닐 뿐입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놈의 방심을 유도해야 합니다.”
혜성은 미스터리 등 그동안 싸웠던 상대를 떠올렸다.
피를 보는 것만이 싸움은 아니었다. 그들이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부터 놈과의 싸움은 시작된 셈이었다.
“어떻게? 혜성 씨 말대로 놈은 여간 영리한 게 아니야. 어지간해선 방심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걸 준비했습니다.”
혜성은 주머니에서 작은 아이템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
장진우는 케이스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세 꼬리 도마뱀 아시죠? 두꺼비 연구원이 세 꼬리 도마뱀을 베이스로 해서 개발한 아이템입니다. 아직 연구소에 등록되지는 않았고, 프로토타입만 나왔습니다.”
“세 꼬리 도마뱀?”
장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 꼬리 도마뱀.
그 이름처럼 꼬리가 세 개 달린 귀여운 하급 몬스터였다. 등급을 매기는 것도 부끄러운 레벨. 워낙 약한 놈이어서 다른 몬스터를 만나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래서 놈은 살기 위해 독특한 스킬을 하나 손에 넣었는데, 그건……
“아!”
그제야 장진우는 혜성의 생각을 눈치채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까 팀장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누구도 믿지 말라고. 그래서 회의 땐 꺼내지 않았습니다.”
혜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비밀이 새어나갈 가능성도 컸다.
“아마 적은……”
혜성은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듣고 있던 장진우의 얼굴에도 점점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야말로…… 장렬히 죽는다.”
잠시 후, 혜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장진우의 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