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88화 (88/150)

# 088. 제주도의 밤 (1)

오후 2시.

경기도 외곽의 낡은 공장.

쾅!

“NSA다!”

갑옷을 입은 요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장진우와 그의 팀원들이었다. 혜성도 막내, 한수호 등과 합류한 상태였다.

밖에서 드론으로 1차 확인한 대로였다. 상황 종료. 공장은 버려진 장비 몇 개를 제외하면 휑했다.

“그 또라이 새끼 때문에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 아마 진즉에 도망쳤을 거다.”

마지막으로 두꺼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제길.”

요원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공장 사방으로 흩어졌다. 혹시 모를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혜성도 두꺼비와 함께 공장을 돌아봤다.

잠시 후, 두꺼비는 쪼그려 앉아 뭔가를 집어 들었다. 아이템을 연결하는 낡은 소켓이었다.

“단서를 찾았습니까?”

혜성이 뒤에 서서 두꺼비의 어깨너머로 소켓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일련번호가 지워진 중고야. 지하 마켓에서 샀겠지.”

두꺼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켓을 불빛에 비춰봤다. 혜성의 얼굴에 대번 실망의 빛이 스쳤다.

“요즘도 이런 모델을 쓰는 사람이 있나? 이건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쓰던 건데.”

“역시 닥터 J입니까?”

“맞아. 이런 구닥다리를 쓸 사람은 그 양반밖에 없지.”

두꺼비는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나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곧 피가 든 플라스틱 컵을 찾았다.

“그것도 닥터가 쓰던 겁니까?”

“맞아. 아마 사용자의 혈액 성분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겠지.”

“혈액? 그럼 놈을 잡을 수 있는 건가요?”

다시 혜성의 눈이 반짝였지만, 두꺼비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어. 동기화 과정에 노출되면 금방 오염되거든.”

영악한 놈들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요원들이 몇 가지 증거품을 가져왔지만,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하긴, 뇌전의 광견을 탈옥시킬 정도로 계획적인 놈들이 증거를 남기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만.

“어? 이걸 왜 쓴 거지?”

두꺼비는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녹색 액체가 반쯤 든 비커였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뒤, 백팩에서 작은 시약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뭡니까?”

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느새 장진우를 비롯한 다른 요원들도 그의 곁에 돌아와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닥터가 놈들 몰래 뭔가를 꾸민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놈들에게 협조하긴 했지만, 그냥 두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걸 예상했겠지.”

“놈들에게 덫이라도 놓은 겁니까?”

“비슷해. 내 짐작이 맞는다면 닥터는……”

두꺼비는 뭔가를 소리 죽여 설명했다. 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 모두 닥터의 의도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닥터는 무슨 생각으로……”

다시 장진우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선배님. 여길 좀 보십시오!”

오른쪽을 살피던 한수호가 크게 외쳤다.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녀석의 곁으로 몰려갔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누군가가 강한 스킬을 사용한 흔적이었다.

“만병쌍수로 한 건가?”

혜성은 쪼그려 앉아 부서진 파편을 주워들었다. 물기가 남아 있었고, 부서진 면은 삭풍에 할퀸 것처럼 거칠었다.

“이건 그냥 힘자랑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막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를 향한 경고이자 도발인가?”

혜성도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과 물. 혜성이 카피캣으로 뇌전의 광견을 공격한 것과 비슷한 흔적이었다.

도로 일어나려는 순간, 찢어진 팸플릿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콘크리트 파편 때문에 더러워지긴 했지만, 종이와 색은 바래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표시였다.

“KIFFA.”

혜성은 팸플릿 조각을 들어 불빛에 비춰 보며 중얼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뭔가의 약자 같은데요?”

막내가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

“한국국제물류협회? 이게 왜 나오지? 전에 여기가 인쇄소였나?”

막내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깜짝 놀라 혜성을 바라봤다.

“어라? 이번에 제주에서 세미나가 있다는데? 그런데 오프닝 기조연설이…… LK 로직스 대표이사 우민창?”

다른 요원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외쳤다.

LK 로직스. 국제물류협회. 혜성은 자연스럽게 뭔가를 떠올렸다.

“이건 우연히 떨어진 게 아냐. 혜성 씨를 노골적으로 유인하는 거지.”

장진우도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협회 홈페이지에는 LK의 서류를 검토할 때 수십 번도 봤던 얼굴이 나와 있었다.

“뜬금없이 웬 제주도일까요?”

한수호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제주도는 뭐가 유명하지?”

혜성은 팸플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되물었다.

“그야 당연히 여자, 돌, 바람, 바다가……. 아!”

한수호는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놈은 바람과 물을 다루는 듀얼 각성자. 그런 점에서 볼 때 제주도는 놈의 홈그라운드인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LK를 수사해야 합니다.”

“뭐로?”

“그야…….”

혜성의 물음에 한수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찢어진 팸플릿은 누군가가 우연히 떨어뜨린 것일 수도 있었다. 증거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황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너도 알잖아. 우린 국가 기관이라는 거. 만약 정황과 의심만으로 LK를 조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쪽 변호사들이 미친개처럼 물어뜯을걸? 아마 국장님의 공개 사과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팸플릿 조각을 바라봤다. 이건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할 수 없지. 우리도 제주도로 간다.”

혜성은 팸플릿 조각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

A 신문사 사회 1부 소회의실.

김유진은 직원들과 대형 모니터로 영상을 분석하고 있었다.

마포대교에서 혜성과 뇌전의 광견이 싸운 영상이었다. 멀리서 찍었지만, 화질은 선명했다. 마지막에 혜성이 물의 강기를 쏘는 순간,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영상을 정지시켰다.

조명 아래, 팀장 김유진이라는 사원증이 반짝였다. 부장의 구박에 시달리던 일개 기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혜성의 기사를 전담하는 특별팀의 팀장이었다.

“분석관님 생각은 어떠세요?”

김유진은 맞은편에 앉은 나이 지긋한 사내를 바라봤다.

길드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능력자였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능력자들의 영상을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글쎄요. 저 듀얼 스킬은 이혜성의 2차 각성 때문이 아니라 카피캣이란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분석관은 김유진을 비롯한 3명의 기자를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싸움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하는 게 아닙니다. 복싱도 라운드별로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능력자 간의 싸움에서야 더더욱 전투 플랜이 중요하죠. 누차 강조했듯 수치화된 능력이 낮더라도 이길 방법은 얼마든 있으니까요.”

“전투 플랜이요?”

“그렇죠. 상대를 어디로 유인해서 어떤 방법으로 공격하겠다. 뭐, 이런 거 말입니다. 듀얼 각성자가 유리한 건 이 때문입니다. 운용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의 폭이 넓어지거든요.”

그는 모니터 속 혜성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혜성이 또라이를 이긴 것도 그냥 되는 대로 싸운 게 아니었다. 바람으로 상대를 띄우고, 물로 약점을 공략한다. 카피캣에 바람과 물이 깃든 걸 확인한 순간, 그는 즉흥적으로 이런 전투 시나리오를 짠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당사자의 인터뷰가 필요하겠군요. 일단 기사는 분석관님이 말한 듀얼 스킬을 메인 테마로 해서……”

김유진이 팔짱을 끼고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긴급! 긴급 정보입니다!”

막내 기자가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뷔였다. 김유진은 말을 멈추고 막내 기자를 바라봤다.

“공항 관계자한테 입수한 정보입니다. 지금 막 이혜성이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 합니다.”

“뭐? 어딜 가는데?”

김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주도입니다.”

막내 기자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주도? 뜬금없이 거길 왜 가?”

기자들은 핸드폰을 꺼내 제주도 관련 뉴스를 검색했다. 특별한 사건, 사고는 없었다.

“한국국제물류협회 세미나? 중국, 일본의 관계자들도 대거 온다는데요? 장소는 제주시에 있는 ICC 제주국제컨벤션센터라네요.”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ICC?”

김유진은 대번 뭔가를 떠올렸다. 그곳은 바다에 인접한 국제회의 전문시설이었다.

“바람과 물.”

분석관도 놀란 표정으로 김유진을 바라봤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물과 바람을 동시에 다루는 능력자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도 빨리 갑시다.”

김유진은 다이어리를 챙겨 들고 급히 회의실을 나갔다.

***

그날 저녁, 비행기 안.

“계속 생각해 봤습니다. 왜 하필 물류회사인지.”

혜성이 왼쪽에 앉은 장진우에게 말했다.

장진우는 오는 동안 태블릿에 저장한 KIFFA의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잠깐 내려놓고 혜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물류회사는 통관이나 운송이 비교적 수월하겠더군요. 국제적인 자금거래도 활발하고 말입니다.”

“내 생각도 그래. 블랙처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에겐 최고의 위장 사업체지.”

장진우는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혜성 씨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뭡니까? 말씀하십시오.”

“혜성 씨가 NSA 외에 다른 조직과 손잡고 있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네. 전에 VIP가 위장 기관을 만드셨다는 소문도 있었고. 혹시 내가 생각한 그 사람도 관련이 있는 건가?”

“누구 말입니까?”

혜성은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우리 NSA의 전설. 밤안개.”

“어떻게 아셨습니까?”

혜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장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성의 반응은 긍정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었다.

“NSA 요원치고 밤안개가 우상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가 죽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지. 아니, 믿고 싶지 않았지. 그런데 혜성 씨는 밤안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솔직히 자세한 내막까진 모릅니다.”

“그럴 테지. 나도 그때 막내 요원으로 그를 몇 번 봤을 뿐이니까.”

장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이것 하나만 명심하게. 분명 밤안개는 뛰어난 요원이었네. 모두의 우상이었지. 하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진 말게. 그는……”

그때였다. 딩동, 안전벨트 사인에 불이 들어오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 제주공항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뭡니까?”

혜성은 방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아닐세.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제주도는 정말 오랜만이군.”

장진우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저도 몇 년 전에 친구들하고 여행 온 이후 처음입니다.”

혜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 같아선 장진우에게 계속 묻고 싶었다. 박무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나 지금은 LK의 사건이 우선. 그리고 장진우가 말을 아끼는 건 분명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조심하게. 몬스터도 지역이나 기후, 시간 등에 따라 다양하니까. 특히 속성과 장소의 시너지는 인간만이 아니라 몬스터도 받을 수 있잖아.”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기내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

“제주도라.”

혜성은 창밖을 바라봤다.

나무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을 것처럼 하늘이 우중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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