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87화 (87/150)

# 087. 악연 (3)

마포대교 중앙.

“이 새끼, 죽어!”

파지직, 또라이의 뇌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혜성을 향해 날아갔다. 뇌전이 닿지도 않았는데 검은색 아스팔트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혜성은 가볍게 뛰어올라 뇌전을 아래로 흘렸다.

- 진짜는 위다!

대수영의 경고와 함께 정면에서 다른 뇌전이 덮쳐왔다.

“흥!”

혜성은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암흑의 수호자가 두꺼운 글러브처럼 변해 뇌전을 위로 튕겨냈다. 동시에 왼 주먹을 뻗어 뇌전을 발사했다. 또라이의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뇌전을.

“젠장!”

또라이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다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콰쾅, 혜성의 뇌전이 그가 서 있던 바닥을 강타했다.

‘걸렸다!’

놈이 주춤한 순간, 혜성은 바람처럼 놈의 코앞으로 접근했다.

놈이 어색하게 주먹을 날렸지만,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혀 간단히 피했다.

퍼억, 이어서 그의 묵직한 펀치가 놈의 복부에 꽂혔다.

“크헉.”

놈이 침을 흘리며 새우처럼 몸을 굽혔다.

혜성은 뒤로 한발 물러나며 놈의 턱을 걷어찼다.

쾅, 놈은 난간 쪽으로 멀찌감치 나가떨어졌다.

“그렇지!”

“역시 이혜성!”

차 안에서 시민의 환호가 들렸다.

또라이도 몬스터의 힘을 이용해 강해졌지만, 혜성도 처음 놈과 싸웠을 때와 달랐다. 현재 혜성은 시그니처 아이템과 숱한 실전경험이 더해진 상태. 유수혁이나 만병귀에 비하면 또라이는 한 수 아래였다.

“이혜성!”

또라이는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방어를 생략하고 거대한 뇌전을 발사했다. 다만 타깃은 정면의 혜성이 아닌, 좌측의 만원 버스였다.

“씨발.”

혜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만원 버스를 향해 번개처럼 움직였다.

놈이 사력을 다한 뇌전이었다. 조금 전처럼 위로 튕겨내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피하자니 뒤에 있는 버스에 직격으로 맞을 게 뻔했다. 결국 혜성은 팔을 열십자로 해서 가드를 올리고 암흑의 수호자에 에너지를 집중했다.

콰쾅, 놈의 뇌전이 혜성의 팔뚝을 강타했다. 치명상은 면했지만, 방어를 뚫고 일부 데미지가 전달됐다. 혜성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으하하!”

또라이는 미친 듯이 웃으며 마구잡이로 뇌전을 쏘아댔다. 역시나 타깃은 혜성이 아니라 시민. 그때마다 혜성은 놈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이 비겁한 새끼.”

혜성은 녀석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칭찬 고맙군. 나 어떤 놈인지 잊었어? 내가 왜 여길 골랐다고 생각해?”

또라이는 이죽거리며 공격에 열을 올렸다.

혜성의 위기.

“아아!”

차 안의 시민도 자신들 때문에 혜성이 밀리는 걸 알고 탄식을 내뱉었다.

***

경기도 외곽의 낡은 공장.

한쪽에는 아이템 동기화를 위한 각종 장비와 모니터가 세팅돼 있었다.

“정말인가?”

코드명 닥터 J. 흔히 닥터라고 불리는 노인은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정말이고말고. 어때?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협조할 생각이 드나?”

우민창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새끼.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우리의 정보력을 무시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이번 일만 도와주면 비밀은 확실히 지킬 테니까.”

닥터는 이를 갈며 한참 동안 우민창을 노려봤다. 우민창은 놀리는 것처럼 생글거렸다.

“알았다. 협조하지.”

결국 닥터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잘했어.”

우민창은 부하를 향해 엄지와 중지를 튕겼다.

부하 한 놈이 큰 골프백을 가져왔다. 물론 겉모습만 골프백일 뿐, 실제로는 아이템의 고유 파장을 차단하는 장비였다.

닥터는 골프백을 열고 장검 형태의 만병쌍수 하나를 들었다. 사람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 멍하게 앉아 있던 노인이 아니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장인이었다.

“만병귀라고 했나? 이놈의 원래 주인 말이야. 그는 만병쌍수의 힘을 반도 끌어내지 못했군.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어.”

닥터는 대번 만병쌍수의 진가를 알아보고 혀를 찼다.

“맞아.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진짜 주인은 나. 오직 나만이 만병쌍수의 진짜 위력을 100% 끌어낼 수 있지.”

우민창은 웃으며 ‘100%’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닥터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 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만병쌍수의 진짜 위력? 너 설마 보통 각성자가 아니라……”

쉿, 우민창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

마포대교 중앙.

‘젠장!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펼칠 수는 없는 건가?’

혜성은 박무영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박무영이 그랬듯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의 속성이었다.

‘이제 곧 만병쌍수의 동기화도 시작될 텐데. 시간이 없다.’

혜성은 점점 초조해졌다. 어쩌면 벌써 동기화가 시작됐을 수도 있었다.

카피캣은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카피캣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아이템에 한정된 터. 또라이처럼 특정한 아이템에 의지하지 않는 상대에겐 그저 내구성이 좋은 장갑에 불과했다.

“지난 두어 달이 내겐 이십 년처럼 느껴졌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쉽게 끝낼 수는 없잖아.”

놈은 혜성을 쉽게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벌레를 갖고 놀다 죽이듯, 놈은 고통을 주며 혜성의 체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때였다. 혜성은 손에서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만병귀와 싸울 때 카피캣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했다. 마치 아이템이 원자 단위로 분해돼서 재구성되는 느낌. 만병쌍수의 동기화 해제 및 재동기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사이에도 놈의 공격은 계속됐다.

“제길!”

혜성은 멀리 떨어져서 놈의 공격을 막은 뒤, 왼손으로 강기를 발사했다. 경황 중에 급히 만든 것. 위력도 없는 위협용이었다. 지금의 또라이라면 한 손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

퍼엉, 예상대로 또라이는 왼손으로 강기를 튕겨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녀석은 놀란 표정으로 멈칫했다. 혜성도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바람의 속성. 언제부턴가 주먹에 녹색 아지랑이가 옅게 맺혀 있었다.

“뭐지?”

그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 아지랑이, 물의 속성이 맺혀 있었다.

“듀얼 스킬? 언제 바람과 물을 카피한 거냐?”

또라이가 당황해 물었지만, 영문을 모르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원본이 새 주인과 동기화를 마치면서 변한 건가?”

카피캣의 감응 능력. 현재로서는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또라이는 이를 악물고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흥!”

혜성은 놈을 띄운다는 느낌으로 왼 주먹을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바람의 속성은 지하 마켓에서 가드들을 상대할 때 카피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낯선 감각이 아니었다.

“크윽.”

놈은 안간힘을 쓰며 비틀거렸다.

그 순간, 혜성은 오른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푸른 강기가 놈의 정면을 덮쳤다.

“안 돼!”

놈은 양팔로 가드를 올렸다. 언젠가 혜성이 박무영을 상대할 때 그랬던 것처럼.

콰쾅, 물은 가드 틈을 통과해 그대로 놈의 턱을 강타했다.

“하나 더!”

혜성은 놈의 품을 파고들며 재차 오른 주먹을 뻗었다.

콰직, 턱뼈가 부서지는 듯한 묵직한 감각이 왔다. 또라이는 흰자위를 뒤집어 까고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형!”

“선배님!”

언제나처럼 막내와 한수호가 달려오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질긴 새끼.”

혜성은 쓰러진 놈을 바라보다가 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질긴 악연을 끊었지만, 혜성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쓴웃음이 나왔다. 뇌전의 광견은 잠깐 스쳐 가는 엑스트라. 그를 잡아두기 위한 미끼였다. 진짜 배후는 LK 로직스의 누군가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군.”

그는 쓰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카피캣의 색은 아까보다 더 짙어졌다. 좌우에 각각 바람과 물, 두 개의 속성을 지닌 듀얼 아이템이 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은 이번 사건의 배후 인물이 왜 그토록 만병쌍수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씨발. 듀얼 각성자라니.”

문득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만약 그 배후 인물과 자신이 싸운다면? 솔직히 놈의 능력을 카피한다 해도 자신이 없었다.

***

H 오피스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혜성이 듀얼 스킬이라니?”

장진우는 눈을 크게 뜨고 두꺼비를 바라봤다. 다른 요원들도 TV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카피캣은 단순히 아이템을 카피하는 게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데미지를 통해 상대의 아이템과 감응하는 거지. 마치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쌍둥이처럼 말이야.”

두꺼비는 안경을 고쳐 쓰며 쓰게 웃었다.

“그게 이혜성의 듀얼 스킬과 무슨 상관입니까?”

이번엔 다른 요원이 물었다. 다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카피캣이 감응하고 있는 원본의 속성이 변했거든. 만병귀는 뇌전의 광견처럼 자연계 속성을 지닌 각성자가 아니었잖아? 쉽게 말해 만병귀는 무(無) 속성. 그래서 만병쌍수도 속성이 없이 단순히 형태 변형의 무기로만 사용됐지.”

두꺼비는 불, 물, 얼음, 바람, 번개, 흙, 빛, 어둠 등의 속성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건 누구나 아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만병쌍수의 새 주인이야. 놈은 자연계 속성을 지닌 각성자. 그리고 놈과 동기화를 마치자, 만병쌍수도 자연스럽게 놈의 속성을 받아들인 거지. 그게 바로 바람과 물이었고, 원본이 변하자 카피캣도 덩달아 변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만병쌍수는 둘이자 하나인 아이템이잖아. 두 놈이 나눠 가지는 건 말이 안……”

다시 장진우가 말하려다 멈칫했다. 뒤늦게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설마…… 놈은 듀얼 각성자인가?”

그는 신음처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드물긴 하지만, 각성자 중에는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이가 NSA의 전설인 박무영. 전성기의 박무영은 두 가지 속성을 이용한 총과 검의 스킬로 명성이 높았다.

“그렇지. 놈은 최소 2가지 속성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아. 놈이 만병쌍수에 집착한 것도 그 때문이고.”

두꺼비는 마른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장현수 기억하지? 예전에 이혜성과 싸운 얼음 속성 능력자 말이야. 놈은 흑백쌍두라는 얼음 속성의 검을 든 다음에야 본 실력을 발휘했지. 반대로 슬라임 거인을 상대할 때는 흑백쌍두가 없어 이혜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내줬고 말이야.”

속성 중첩.

자연 계통의 능력자가 자신과 같은 속성의 무기를 들면 그 위력이 배가 되는 현상이었다. 중첩의 대상은 다양했다. 사용자와 무기, 장소, 시간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했다. 가령 방송국 사건 때 불의 능력을 지닌 CP가 불바다가 된 무대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는데, 그게 장소 중첩의 대표적인 예였다.

“놈은 듀얼 각성자. 속성 중첩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처럼 2개의 속성을 지닌 무기가 필요했지. 그게 바로 사용자에 따라 변하는 유니크 무기, 만병쌍수야.”

두꺼비는 선언처럼 힘주어 말했다.

오피스텔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듀얼 각성자가 속성 중첩을 볼 수 있는 무기를 갖췄다? 그 시너지 효과는 얼마가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이혜성도 눈치챘을 거야. 이번 사건의 배후 인물과 싸우면 자신이 필패라는 걸.”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닙니까? 놈이 두 가지 속성의 무기를 사용하면, 지금 본 것처럼 카피캣도 두 가지 속성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따지듯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혜성도 놈의 속성을 쓸 수 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템에 의한 것. 사용자와 무기의 속성이 감응하면서 발생하는 중첩은 없단 말이지.”

“아.”

“쉽게 말해서 무기가 듀얼이면 뭐 해? 이혜성이 카피할 수 있는 속성은 하나뿐인데.”

두꺼비는 고개를 저으며 TV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는 무거운 표정의 혜성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듀얼 스킬.

이건 혜성의 카피를 벗어난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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