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6. 악연 (2)
3일 후 오전 8시, H 오피스텔.
혜성은 소파에 편히 앉아 LK 로직스의 자료를 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자료였지만, 그는 밤새 재검토했다.
카피캣을 통한 만병쌍수의 고유 파장 분석은 끝난 상태였다. 언제든 재동기화가 시작되는 순간, 카피캣의 감응 능력으로 만병쌍수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재동기화가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 모른다는 것. 따라서 혜성은 물론이고 두꺼비 등 모든 요원은 오피스텔에서 24시간 비상대기했다.
“혜성 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근처 사우나라도 가서 눈 좀 붙이지?”
회색 여우 소속의 요원 하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건네며 말했다. 아까 잠깐 아래층 커피숍에 들러서 사온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혜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커피와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쓰면서도 시원한 카페인이 들어가자, 대번 몸에 활력이 돌았다.
“오늘은 신호가 오겠죠?”
막내가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외출도 못 하고 사흘째 오피스텔에만 있으니 답답한 눈치였다. 한수호도 슬그머니 다가와 막내의 옆에 앉았다.
“글쎄. 그건 나도 잘……”
혜성이 쓰게 웃으며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하고 장난해?”
회의실로 쓰이는 우측 테이블에서 큰 고함이 들렸다. 장진우였다. 그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혜성은 장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했다. 장진우가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TV 켜 봐.”
장진우가 손으로 벽면의 대형 TV를 가리키며 외쳤다.
근처에 있던 요원이 TV를 켰다.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장소는 마포대교. 드론이 현장을 촬영한 듯 흔들림이 심했지만, 상황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콰쾅, 대교 중앙의 승용차 두 대가 폭탄에 휘말린 것처럼 높이 솟아올랐다가 박살 났다.
- 으아아!
-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현장의 공포와 혼란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특히 만원 버스에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서로를 밀치고 난리였다.
시민 몇 명이 혼란을 틈타 차에서 내려 도망치려 했지만, 화살처럼 날아온 놈의 뇌전을 맞고 새카맣게 타 쓰러졌다. 경찰들도 방패를 앞세워 놈에게 접근을 시도했다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벼락 탓에 손도 못 써 보고 후퇴했다.
“설마……?”
혜성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드론의 카메라가 폭발한 승용차 옆을 클로즈업했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파란색 죄수복을 입은 능력자가 양손에 뇌전을 맺은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뇌전의 광견?”
혜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은 그대로였다. 그때보다 몸이 많이 상해 보였지만, 가늘게 뜬 눈은 여전히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놈이 왼손을 슬쩍 들었다. 콰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그를 중심으로 떨어졌다. 뇌전을 넘어서 기후마저 영향을 미칠 정도. 몬스터의 융합으로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저 새끼, 형한테 깨지고 잡혔잖아요?”
“저놈이 저기서 왜 나옵니까?”
막내와 한수호도 황당한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 이혜성 나와! 내가 돌아왔다!
놈은 미친 듯이 웃으며 혜성을 불렀다. 찢어진 눈이 충혈된 것처럼 붉게 번뜩였다.
화면이 바뀌어 스튜디오의 아나운서가 나왔다.
- 지금 보시는 것처럼 교도소에서 탈옥한 능력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아나운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놈의 요구조건은 단 하나. 자신을 감옥에 처넣은 이혜성뿐이었다.
뇌전의 광견.
원조 또라이가 돌아왔다.
***
혜성은 재킷을 챙겨 들고 급히 오피스텔을 나섰다. 장진우의 설명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형, 같이 가요.”
막내와 한수호가 허겁지겁 뒤따랐다.
NSA의 헬리콥터가 빌딩 옥상에서 대기 중이었다. 본래는 헬리콥터 이착륙이 금지된 장소였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자마자 헬리콥터는 굉음을 내며 떠올랐다.
헬리콥터 안은 너무 시끄러웠다. 혜성은 통신기가 달린 헬멧을 쓰고 한진영 국장과 교신했다.
“저 또라이가 왜 마포대교에 있는 겁니까? 탈옥이라도 한 겁니까?”
혜성은 인사할 틈도 없이 다짜고짜 따지듯 물었다.
- 자세한 건 우리도 몰라. 조사해봐야 아니까. 다만 현재까지의 정황을 봤을 때, 외부의 세력이 도와준 것 같아.
수신기 너머 한진영의 목소리도 높고 흥분돼 있었다.
이어서 헬리콥터에 타고 있던 요원 하나가 태블릿을 보여줬다. 시간은 오늘 새벽 2시. 놈이 있던 특수 교도소의 CCTV 영상이었다.
시커먼 어둠을 뚫고 뭔가가 그르렁거리며 교도소 북문을 향해 돌진해 왔다. 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60톤짜리 대형 특수차였다.
특수차는 뿔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으로 그대로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이어서 복면을 쓴 능력자 10여 명이 폭탄을 던지며 주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뭐야?”
혜성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영상은 여기까지. 범인들이 CCTV를 교란하는 특수 장치를 사용한 듯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요원은 태블릿으로 슬라이드 쇼를 보여줬다. 사건 발생 약 5분 뒤,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교도소는 전쟁을 치른 듯 완전히 쑥대밭이 돼 있었다.
또라이가 머물던 독방은 벽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놈을 속박하던 특수 수갑은 반 토막이 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건 개인이 한 게 아닙니다. 조직적인 차원에서 한 겁니다.”
- 우리의 생각도 그래. 국내에 이런 화력을 갖춘 조직은 많지 않아. 아무래도 블랙의 지부가 움직인 것 같아.
한진영은 또라이의 요구 조건을 전했다.
뉴스에서 본 대로였다. 놈의 요구 조건은 단 하나, 이혜성이었다. 다른 요원이 오면, 놈은 즉시 마포 대교를 무너뜨리고 자폭한다고 했다.
“그 새끼는 상 또라이입니다. 말한 대로 하고도 남을 놈입니다.”
혜성은 국장과의 교신이라는 것도 잊고 욕설을 퍼부었다.
잠시 후, 헬리콥터가 마포대교 근처에 도착했다. 경찰은 이미 마포대교 양쪽을 막아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경찰 간부가 사정 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마포대교는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었다. 게다가 다리를 지나던 수많은 시민이 본의 아니게 인질이 된 상태였다. 특수팀이 몰래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NSA에서도 능력자들이 파견됐지만, 일단은 혜성을 믿고 대기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턴 제가 맡겠습니다. 경찰은 시민의 대피로 확보 및 교통 통제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혜성은 정장과 장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대교 쪽으로 걸어갔다.
“형.”
“선배님.”
막내와 한수호가 습관처럼 따라오려다가 멈칫했다.
“괜찮아. 한 번 박살 낸 상대니까. 어쩌면 2차 각성을 하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을 거야.”
혜성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녀석들을 안심시켰다.
솔직히 놈과의 싸움은 두렵지 않았다. 문제는 주위의 차량과 그 안에 타고 있는 시민들. 만원 버스라도 한 대 부서지면 사상자는 금방 수십 명이 될 터였다. 가급적이면 대교 난간 쪽으로 붙어서 놈과 싸워야 했다.
‘두꺼비의 계산대로라면, 만병쌍수의 재동기화도 슬슬 준비가 끝났을 거다. 그런데 하필 이런 때 또라이가 탈출했다고? 혹시 닥터를 데려간 놈들이 일부러 노리고 꾸민 건가?’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
LK 로직스, 사무실.
“오. 드디어 한판 붙는 건가?”
우민창은 약 올리듯 웃으며 벽에 걸린 모니터를 바라봤다. 문득 팝콘과 콜라가 생각났다.
모니터에서는 마포 대교의 상황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꼬리에 NSA라고 쓰여 있는 헬리콥터가 대교 입구 쪽에 도착했다.
잠시 후, 혜성이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마포대교로 천천히 걸어갔다.
물론 지상파 방송국은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청률에 눈먼 몇몇 BJ들이 멀리서 드론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위 기레기라 불리는 일부 기자들도 합세해서 인터넷 등으로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벌금을 내거나 징역을 좀 살더라도 이번에 화끈하게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저놈들은 이걸 게임으로 생각하나 보지?”
우민창은 맞은편에 서 있는 부하를 돌아보며 비아냥거렸다.
“돈에 환장한 놈들이니까요. 하여튼 개, 돼지들이 넘쳐난다니까요.”
부하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래서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해. 대부분은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하거든.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찍어 눌러야 저런 개, 돼지들이 찍소리도 못하지.”
우민창은 냉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혜성은 또라이에게 맡기고. 그럼 우리도 슬슬 시작할까?”
“하지만 닥터는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괜찮아. 내가 직접 만날 테니까.”
우민창은 모니터에 클로즈업된 혜성을 쳐다봤다.
아이템 하나에 능력치가 얼마씩 상승한다. 이건 게임에서나 나오는 방식이었다. 실제로는 같은 아이템이라도 소유주와 상황에 따라 능력치는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특히 혜성의 아이템들은 아주 특별한 놈들. 그 가능성이 무한했다. 따라서 혜성을 상대하려면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 못지않은 특별 아이템, 가령 만병쌍수 같은 게 필요했다.
“기다려라, 이혜성. 만병쌍수를 접수하는 대로 네 놈의 목을 따 줄 테니까. 동기화를 끝내고 이혜성의 목을 가져간다면, 마스터도 만병쌍수의 소유권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겠지.”
그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부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갔다.
***
마포대교 위.
“여어, 이게 누구신가? 우리 멋진 이혜성이 아닌가?”
뇌전의 광견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혜성을 환영했다. 말이나 표정만 보면 정말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이 미친 새끼. 이게 무슨 짓이냐?”
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위기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구세주. 차에 탄 사람들은 목을 움츠린 가운데서도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원체 바쁜 사람이잖아. 인기도 많고. 그러니 널 만나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또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히죽 웃었다.
우연히 옆에 있는 승용차의 운전자와 또라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또라이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뻗어 뇌전을 발사했다.
콰쾅, 승용차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잿더미가 돼 주저앉았다. 운전자 또한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가 돼 고개를 옆으로 떨궜다.
“새끼가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지랄이야?”
또라이는 가래침을 뱉은 뒤 다시 혜성을 바라봤다. 바퀴벌레라도 죽인 듯 태연했다.
‘몬스터 융합?’
혜성은 놈에게 다가가다가 주춤하며 멈췄다.
너무 많이 상대해서 이젠 익숙한 기운이 또라이에게서 느껴졌다. 놈도 유수혁이나 만병귀처럼 몬스터의 힘을 이용해 능력치를 강화한 것이다.
혜성은 블랙과 지하 마켓을 떠올렸다. 또라이가 다시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블랙이나 지하 마켓의 거물이 배후에 있음이 분명했다. 동시에 놈들이 또라이를 이용해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 또라이로 혜성을 끌어내고, 그사이 만병쌍수의 동기화 해제 및 재동기화를 진행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혜성이 번번이 놈들의 일을 방해하니, 뇌전의 광견으로 아예 그의 발을 묶은 것이다.
‘지금쯤이면 닥터 J도 작업을 시작했겠지?’
혜성은 주먹을 움켜쥐고 또라이와의 싸움을 준비했다.
그가 먼저 또라이를 해치우느냐, 아니면 닥터 J가 먼저 작업을 끝내느냐. 일종의 시간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