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84화 (84/150)

# 084. 진짜를 보여주지 (3)

계곡을 끼고 뱀처럼 구부러진 산간 도로.

“뭐야? 저 새끼들은?”

혜성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핸들을 돌렸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연기를 뿜으며 숨 가쁘게 울어댔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나쁜 탓에 생각처럼 빨리 놈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차량 조회는?”

혜성은 조수석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막내가 특수 태블릿을 위성과 연결해 놈들의 차량을 추적하고 있었다.

“젠장. 안 나와요. 하긴,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쾅, 막내는 조수석 수납장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예상대로 대포차였다.

“젠장!”

혜성은 입에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본부에 요청한 헬리콥터는 아직이었다. 게다가 놈들의 승합차에는 닥터가 타고 있었다. 전처럼 막무가내로 돌진해 들이박는 것도 불가능했다.

퍼퍼펑, 그들이 탄 SUV가 갑자기 좌우로 흔들렸다. 놈들이 깔아놓은 지뢰나 함정을 밟은 것 같았다.

끼이익, SUV는 불꽃을 만들며 가드레일을 긁은 뒤 겨우 중심을 잡았다. NSA의 특수 차량이었기에 겨우 버텼을 뿐. 평범한 차량이었다면 뒤집혀서 가드레일에 처박혔을 것이다.

“이 새끼들이. 나한테 맡겨요.”

막내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퍼퍼펑, 거대한 화염이 도로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놈들의 함정도 화기에 반응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봤죠?”

이어서 그는 엄지와 중지를 튕겨 화염을 회수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다음은 한수호 차례였다. 도로 위에는 폭탄의 파편들, 특히 부서진 가드레일 조각들이 강철 가시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타이어가 터질 게 뻔했다.

녀석은 조수석 뒷좌석에서 창문을 내리고 상체를 내밀었다. 가드레일 아래, 시원한 계곡이 보였다.

“으아아!”

한수호는 괴성을 지르며 계곡 쪽으로 에너지를 집중했다.

부웅, 계곡의 물이 거대한 풍선처럼 떠올라 도로를 덮었다. 도로에 남아 있던 폭발의 파편은 난데없는 물벼락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나이스!”

막내와 한수호는 손바닥을 마주치고 함성을 지른 뒤, 도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좋았어!”

혜성도 짧게 환호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함정 때문에 놈들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그때였다. 중앙의 내비게이션에 터널이 보였다. 놈들의 승합차가 먼저 터널에 들어갔다. 그리고 약 3분 정도의 시차를 두고 혜성의 SUV도 터널에 들어갔다.

“왜 안 보이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혜성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10여 초 뒤, 그들의 SUV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놈들의 승합차도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씨발, 뭐야?”

혜성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저 멀리, 똑같이 생긴 승합차 3대가 일렬로 가고 있었다. 홀로그램 등으로 만든 허상이 아닌, 3대 모두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진짜 자동차였다.

***

터널 안.

부아앙, 혜성이 타고 있는 SUV가 굉음을 내며 스쳐 갔다.

“휘유. 정말 이혜성이라니. 악연도 보통 악연이 아니네.”

운전석의 사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피커에서는 경찰의 무전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도청한 것이었다.

- 여기는 이혜성. 인식 번호 M……

용의 차량을 추격 중이니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다급했다.

“괜찮아. 꼬리가 붙을 건 예상했으니까. 물론 그 꼬리가 이혜성이라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뒷좌석에 앉은 사내가 닥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닥터는 약물에 취해 멍하게 앉아 있었다.

“우리도 슬슬 가볼까?”

그들은 웃으며 승합차에서 내렸다.

승합차가 멈춘 곳은 터널 안에 있는 비상 공간이었다. 위장막으로 교묘히 가린 탓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승합차 뒤에는 흰 SUV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먼저 닥터를 뒷좌석 가운데에 태우고 이어서 차에 올랐다.

“잠깐 사장님께 보고 좀 하지.”

운전석의 사내가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혜성은 가짜들을 한창 추격하고 있는 상황. 그들로서는 급할 게 없었다.

“……네, 사장님. 피해가 좀 있었지만, 닥터를 손에 넣었습니다. 플랜 B에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사내는 이혜성과 있었던 짧은 추격전을 설명했다.

- 이혜성이 나타났다고?

“네. 우리 쪽에서 닥터를 잡고 있어서 놈도 미친 짓은 못 했습니다.”

- 녀석도 닥터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가?

핸드폰 너머에서 우민창의 웃음이 낮게 깔렸다. 그들도 사장을 따라 소리 죽여 웃었다.

잠시 후, 흰 SUV가 유턴해서 터널 반대쪽으로 나왔다.

***

이혜성의 SUV 안.

“아까 놈들 번호판 기억해요?”

막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번호판은 믿지 말자. 똑같은 승합차까지 준비할 정도면, 번호판 바꾸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혜성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갈림길이 나타났다. 승합차 중 한 대가 옆으로 빠졌다.

“어쩌죠?”

이번엔 뒷좌석의 한수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놈들의 승합차는 아무리 유심히 봐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일단 계속 가자.”

혜성은 고민 끝에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다.

몇 분쯤 지나 두 번째 갈림길이 나오고, 다시 승합차 한 대가 옆으로 빠졌다.

“제길.”

혜성은 급히 놈을 따라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 어차피 확률은 1/3.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놈들의 승합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혜성의 요청대로 경찰들이 도로를 봉쇄한 것이다. 혜성은 놈들의 승합차 뒤에 SUV를 대고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닥터는?”

혜성은 승합차의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아니, 선량한 시민한테 왜 그러십니까? 경찰이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거 다 녹음하고 있는 거 아시죠? 당장 언론사에……”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경찰들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내가 녹음이라는 말을 강조하자, 경찰들은 움찔하며 혜성의 눈치를 살폈다.

“왜 도망갔어?”

혜성은 사내의 멱살을 거칠게 잡으며 승합차를 힐끔 돌아봤다. 뭔가를 운송하는 듯 정체 모를 박스만 쌓여 있었다. 닥터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니? 댁들이 쫓아오니까 무서워서 도망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왜 나만 따라온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증거 있어, 증거?”

적반하장. 사내도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혜성은 화를 내려다가 사내의 멱살을 힘없이 놓았다.

당했다. 생각 같아선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사내의 말대로 증거가 없었다.

“좋아요. 기껏해야 속도위반하고 신호위반 좀 한 거 같은데. 얼마입니까?”

사내는 혜성을 쏘아본 뒤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젠장!”

혜성은 SUV의 타이어를 걷어차며 화를 삭였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승합차의 사내는 그런 혜성을 백미러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

“약은 새끼들. 한 방 먹었다.”

쾅, 혜성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승합차는 벌써 유유히 사라진 상태. 경찰도 멋쩍어하며 철수를 준비했다. 잠시 후, 제일 처음에 옆으로 빠졌던 승합차를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마찬가지로 가짜였다.

“역시 마지막에 놓친 승합차가 진짜였을까요?”

“셋 다 가짜였을지도 모릅니다. 영화에 비슷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막내와 한수호도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혜성은 크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떤 놈들일까? 왜 닥터를 데려갔을까? 그럼 닥터는 어떻게 찾아야 하지?’

생각할수록 의문만 더 많아졌다. ‘혹시 LK 로직스가 관련된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부웅, 재킷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혜성은 생각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장진우였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해서 전화를 받았다.

- 혜성 씨? 경찰한테 얘긴 들었어. 지금 어디야?

장진우는 다짜고짜 위치를 물었다.

“경기도 쪽 국도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혜성은 스마트 워치로 자신의 좌표를 확인했다. 정신 병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 잘됐네. 다른 데로 새지 말고 곧장 나한테 와. 좌표는 메신저로 보내줄게. 참. 카피캣 갖고 있지? 그건 절대 사용하면 안 돼.

장진우는 카피캣을 강조하며 전화를 끊었다.

“뭐야? 카피캣으로 뭘 하려는 거지?”

혜성은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어서 암호화된 메시지도 도착했다. 성남의 H 오피스텔이었다.

“본부가 아니라 성남이라고?”

혜성의 의문이 더 커졌다.

잠시 후, 그들은 장진우가 일러준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장진우와 회색 여우의 팀원 다섯 명이 오피스텔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여기 계신 겁니까?”

혜성이 오피스텔을 둘러보며 물었다.

노트북과 각종 사무용 기기, 보안을 위한 여러 보조 장치들. NSA의 사무실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설명하자면 길어. 국장님 특별 지시가 있었거든.”

장진우는 그들을 오피스텔 구석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테이블 위에는 1급비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혜성에게 건네며 국장과 나눴던 대화를 짧게 설명했다.

“LK 로직스.”

혜성은 서류를 넘기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NSA가 주목한 건 죽은 만병귀의 유니크 아이템, 일명 만병쌍수였다. 만병쌍수에 눈독을 들인 누군가가 63 스퀘어에서의 전투 직후, 혼란을 틈타 아이템을 빼돌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당장 LK 로직스를 압수수색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막내가 옆에서 서류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건 안 돼. 심증만 있지 명확한 증거가 없거든. 범행에 이용된 차량만 해도 그래. LK 로직스에서 도난당한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 오히려 LK 로직스는 어떤 바보가 자기 회사 차량을 범행에 이용하겠냐고 큰소리칠걸?”

장진우는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영악한 새끼들. 억울하면 증거를 가져오라는 건가?”

혜성도 미간을 좁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놈들이 닥터를 데려간 목적이 어렴풋이 짐작됐다. 만병쌍수의 재동기화. 강지영의 설명에 따르면 정부 소속 연구원들 외에 국내에서 재동기화가 가능한 인물은 오직 ‘닥터 J’뿐이었다.

“그런데 카피캣은 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냈다.

“잊었어? 만병귀가 왜 골프백에 무기를 넣고 다녔는지. 변형 아이템이라면 얼마든지 작은 형태로 바꿔서 다닐 수 있는데 말이야.”

“사람에게 고유한 지문이 있듯이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에는 고유한 파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파장을 감추기 위해서……”

혜성은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뒤늦게 뭔가 떠올랐다.

“맞아. 고유 파장의 형태나 강도는 아이템마다 제각각이지만, 재동기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수백 배 증폭된다는 특징이 있지.”

장진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특수 시설로 감춰도 파장을 완전히 가리는 건 무리. 특수 위성을 이용하면 만병쌍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만병쌍수의 파장이 뭔지 알고요? 유니크 아이템이 한두 개도 아닌데 말입니다.”

막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진우의 의도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잊었어? 혜성 씨의 카피캣이 뭔지?”

장진우는 서류철에서 다른 보고서를 꺼내 보여줬다. 혜성이 장갑을 끼고 만병귀와 맞섰다는 대목이었다.

“아!”

그제야 막내와 한수호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카피캣은 단순히 상대의 아이템을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야. 파장마저 복사해서 진짜 아이템과 감응할 수 있지. 텔레파시 능력을 갖춘 쌍둥이들처럼 말이야.”

장진우는 가볍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우선 카피캣에 남아 있는 만병쌍수의 파장을 분석한다. 그다음 재동기화로 인해 만병쌍수의 파장이 절정에 이른 순간, 카피캣의 원본 감응 능력을 이용해 놈들의 위치를 찾는다.

“놈들은 계획대로 됐다고 좋아하고 있겠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야. 놈들이 재동기화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도 바로 행동 개시다.”

닥터 J의 추격전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혜성도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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